소설리스트

27화 (27/160)

“지갑에 잘 넣어.”

“아니, 그건 그런데요…….”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라는 현규의 말에 일단 신분증을 받아 지갑에 넣은 수현이 다시 막 입을 열려는데 현규가 바삐 걸음을 옮겨 간다.

“가자.”

올 때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걸음을 서두르는 현규의 뒷모습에 얼결에 현규를 따르던 수현은 더는 정신없이 흘러가는 상황에 절박하게 현규의 양복 자락을 손에 쥐었다.

“형, 지금 이게 무슨 소리예요?”

지금 제가 잘못 들은 거죠, 라는 말을 대신해 수현은 간절한 눈빛으로 현규를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지만 불행히도 현규에게 자비란 없었다.

“들은 대로.”

“아니, 아니. 그게 아니죠! 말이 안 되잖아요! 저분이 왜 결혼을 축하한다고 해요?”

동거인으로 전입 신고를 해서 그런가, 라고 정신 승리를 해 보려고 해도 그게 말도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아니, 머리가 아니라 본능이 이르고 있었다.

어젯밤 느꼈던 불길한 예감의 진원지가 바로 여기라고.

“차에 타서 얘기해. 점심시간 얼마 안 남았어.”

“아니, 지금 점심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점심시간에 가장 큰 문제는 점심이지. 일단 차에 타.”

밖에서 할 얘기는 아니라며 구청 건물을 나간 현규는 순식간에 계단으로 내려서 차로 다가섰다.

정오를 지나자 햇살도 따갑고 점점 기온도 오르고 있었다.

말 그대로 뙤약볕이다. 여름의 볕이 창이라면 가을의 볕은 바늘이다. 날카롭고 예리하게, 피부 깊은 곳을 찔러 대는 햇살에 수현은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을 가로질러 우람하게 선 차 안에 올라탔다.

아침에는 공기가 싸늘해 일부러 검은 후드티를 꺼내 입고 나왔는데 낮이 되니 또 덥다.

예측 불가능하게 변덕스러운 날씨가 마치 자신의 미래 같았다.

아주 지랄스럽다.

“형, 에어컨 좀요.”

운전석에 올라타 막 시동을 켜는 현규에게 옷자락을 펄럭이던 수현은 에어컨 온도를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바로 에어컨 바람을 강으로 조절한 현규가 내비게이션 화면의 검색란을 누르며 묻는다.

“가게 이름은?”

“북향 만두요. 여기서 5분 거리예요.”

“그래.”

“그래서, 지금 뭘 한 거예요?”

주차장에서 곧 차를 빼는 현규 형을 보며 이제 제대로 얘기해 보라고 다그치자 형이 귀찮다는 얼굴로 작게 혀를 찬다.

“안 까먹네…….”

“그걸 까먹겠어요?”

다른 것도 아닌 혼인 신고인데, 라고 수현이 눈을 부릅뜨자 현규가 들고 있던 서류를 건네준다.

“네가 확인해.”

설명하기 귀찮으니 네가 알아서 보라는 현규의 태도에 서둘러 서류 봉투를 받아 든 수현은 그 안에 든 종이를 꺼내 들었다.

접수증이었다.

일반적으로 공공 기관에서 서류를 내면 받는 게 접수증이니 그건 특이할 게 없었다.

문제는 그 내용이었다.

서류 가득 빼곡하게 찬 형과 자신의 개인 정보까지는 괜찮다.

공문서니까…….

그런데, 그 개인 정보 아래에 절대 거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사건명 : 혼인 신고

그래, 진짜 사건은 사건이다.

그러니까 혼인 사기 사건이다.

“이게 뭐예요?”

어떻게 봐도 혼인 신고 접수증이 분명한 종이를 찢을 듯 손에 든 채,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자 형이 막 주차장을 빠져나오며 별거 아니라는 얼굴로 대꾸한다.

“운전 중이야. 시끄러워.”

“제가 지금 안 시끄럽게 생겼어요? 지금, 이게 뭐예요? 왜 형하고 제 혼인 신고 접수가 돼 있냐고요? 아니, 혼인 신고 할 때 증인도 필요하잖아요!”

얼마 전 결혼한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어, 이게 말이 되냐고 따지자 현규 형이 담담히 대꾸한다.

“있어, 증인.”

“증인이 어디 있는데요?”

“거기.”

봉투를 가리키는 형의 눈짓에, 다시 봉투 안을 들여다보자 안에 신분증 두 개가 굴러다니고 있다.

윤준성, 강주환.

둘 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강주환이 누군데요?”

“내 동생.”

“그럼 윤준성은 누군데요?”

“우리 어머니.”

“……아…….”

아까 입구에서 기다리던 남자가 말한 ‘윤 이사님’이 그분이셨나 보다. 그분이 서류를 작성해 신분증과 보내신 거다.

그래, 이건 이해가 됐다.

문제는 그래서 더 절망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증인까지 있다면 진짜 혼인 신고가 됐다는 거다.

“그럼, 우리가 지금 진짜 혼인 신고를 한 거란 말이에요?”

“응.”

“아니, 이건 진짜 아니죠! 이건 일 마무리된 후에 그냥 ‘우리 헤어져요.’로 못 끝내요.”

“알아.”

“알면서 어떻게 이런 짓을 해요?”

대체 이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추진력이냐고 우리 큰형보다 형이 더하다고 수현이 비명을 내지르는 사이 막 1차선으로 들어서 유턴을 한 현규가 차분히 상황을 설명해 준다.

“걱정 마. 다 방법이 있으니까.”

“무슨 방법이요? 혼인 신고까지 한 이상 이건 가벼운 문제가 아니에요. 이제 우리가 헤어질 방법은 이혼밖에 없다고요.”

그 이혼도 그냥 소송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재산 분할에 위자료에, 재산 분할 논쟁의 중심이 될 특유 재산인 주식까지 얽힐 게 뻔하다.

그건 보지 않아도 아수라장이다.

지옥이 있다면 아마 거기일 거다.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찔해지는 광경에 수현은 패닉 상태에 빠졌지만 현규는 태연했다. 그건 내 알 바 아니라는 태도였다.

“그렇겠지.”

“형, 이거 우리 얘기예요.”

“알아.”

“이거 집에서 알면 저 쫓겨나요.”

“이미 집 나왔으니 상관없잖아.”

“그건…… 그렇기는 한데요…….”

흥분해 높아졌던 수현의 음성이 갑작스러운 수긍과 함께 낮아졌다.

이미 나이는 차다 못해 넘치고 경제력까지 갖춰져 독립도 했으니 결혼 문제에 관해서는 사실 집안에서 이래라저래라 할 게 아니긴 하다. 일단,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성인이니까.

하지만 이런 도둑 혼인 신고는 좀 문제가 다르다.

“아무리 그래도 부모님한테 허락은 받아야죠.”

“우리 어머니는 허락하셨고 너희 아버지도 허락하셨으니 문제없는 거 아닌가?”

“아버지가요? 언제요?”

처음 듣는 그 이야기에 수현이 형 상상 속에서 허락한 거냐고 되묻자 저 멀리 보이는 ‘북향 만두’라는 간판을 향해 차를 몰던 현규가 너야말로 기억 상실이냐는 듯 대꾸한다.

“네가 그랬잖아.”

“제가요?”

“어젯밤에, 이 대표님과 통화 후에 이 대표님이 나랑 결혼하라고 했다고 했잖아.”

그래서 중혼하게 생겼다며 재밌어하지 않았냐는 말에, 수현은 그제야 어젯밤 아버지와 한 통화 내용을 기억해 냈다.

하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해서 그냥 기계적으로 텍스트만 외웠을 뿐 그 내용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결혼하라고 하기는 했다.

대표님이 주영이와 현규 형의 결혼 발표를 하기 전에 먼저 결혼하라고.

그렇게 보면 허락을 받기는 했다.

그건 맞는데…….

“아니, 그래도 이건 아니죠.”

내가 왜 평생 안 해 본 효도를 이런 식으로 해야 하냐고 따지려는데, 북향 만두 건물 앞에서 차를 세운 형이 기어를 바꾼 뒤 이쪽을 돌아본다. 그러곤 더없이 심각한 음성으로 묻는다.

“이수현, 구청에 가기 전에 네가 뭐라고 했지?”

갑자기 낮아진 목소리와 박력 있는 현규의 눈빛에 수현이 조금 기가 죽은 목소리로 작게 되묻는다.

“……제가 뭘요?”

“폭행, 살인, 강간, 마약, 음주 운전만 아니면 뭐든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몇 번이나 물어봤는데도 네가 분명히 그랬다는 말에 수현은 할 말을 잃었다.

“……제가, 그러긴…… 했는데요…….”

“네가 한 말은 반드시 지킨다고도 했지?”

“…….”

“난 몇 번이나 네게 신중히 생각하라고 경고했고?”

“…….”

“아까, 진원 형이 너한테 신분증 가져오라고 한 게 왜일 것 같아?”

“그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