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160)

뭔가 이유가 있겠지, 하는데 형에게 내 신분증이 필요할 일이 없긴 하다. 그게 조금 이상하긴 해 말을 흐리는데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이 울려왔다. 그 소리에 본능적으로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화면 위로 큰형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다.

[올 때 가족관계 증명서도 한 장 뽑아와.]

“어…….”

어디서 많이 본 서류명에 눈을 껌뻑이던 수현은 작게 신음했다. 그러고는 잠시 후 확실하게 떠오르는 기시감에 고함을 내질렀다.

“아!”

큰 깨달음을 얻은 수현의 탄성에 현규가 놀라 빠르게 되묻는다.

“왜?”

“지금, 큰형이 나 결혼시키려고 신분증 갖고 오라는 거예요?”

지금까지 자신과 있었던 현규가 큰형 사정을 알 리 없지만, 그걸 알면서도 수현은 현규에게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게 현규뿐이라 지금 내가 눈치챈 게 맞냐고 그에게 묻자 현규가 수현의 손에 든 휴대폰을 빼앗아 들곤 안의 내용을 확인한다.

그러곤 곧 이럴 줄 알았다고 작게 혀를 찬다.

“내가 아니라 네가 중혼할 뻔했네.”

사회면에 나겠어, 라며 오늘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현규를 수현이 넋이 나간 얼굴로 응시한다.

“지금 제가 쓰레기 될 뻔한 거예요?”

“응.”

“아니, 대체 왜 다들 혼인 신고를 못 해서 난리인 건데요?”

“어젯밤에 서 국장님이랑 이 대표님이 2차전을 했는데 그때 서 국장님이 주말에 나랑 주영이 결혼을 발표하겠다고 했더니 이 대표님이 너랑 해준 형이 먼저 결혼할 거라고 큰소리치셨나 봐. 그걸 서 국장님이 다시 아버지한테 알려서 급하게 일이 진행된 거고.”

현규 형이랑 결혼하라고 한 직후에 주영이 아버님이랑 통화할 때는 또 삼촌이랑 결혼시킬 거라고 한 건가, 떠올리니 갑자기 머리가 아파 왔다.

진짜 어처구니없고 말도 안 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아버지다워 할 말이 없었다.

어제 오후까지는 신이 나 현규 형과 결혼하라고 했는데, 막상 주영이네 쪽에서 주영이 결혼을 무조건 진행시킨다니 이번엔 삼촌이 눈에 밟힌 거다. 그래서 이번엔 일단 삼촌을 먼저 결혼시켜 우리 쪽에서 찬 걸로 하고 싶어진 거다.

“과격하지만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인간들을 상대로 하려면 이쪽도 비상식적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게 현규의 결론이었고 그에 대해서만은 수현도 반박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쪽이 한 수를 더 내다보고 기습한 건 맞다.

그건 그런데…….

“자, 이제 그 서류 들어.”

“……서류요?”

“그래, 이렇게.”

차의 시동을 끈 현규가 접수증을 든 수현의 손을 바로 수현의 얼굴 옆에 대곤, 휴대폰으로 인증 사진을 찍는다.

“웃어.”

그 말에 반사적으로 수현이 방긋 웃자 서둘러 두 장 정도 사진을 찍은 현규가 만족스러워하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좋아. 잘했어.”

“……사진은 왜요?”

“결혼 보고해야지.”

“누구한테요?”

“아버지.”

어머니는 아니까, 라는 말과 함께 빠르게 손을 움직이는 현규는 대표님께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 게 분명했다.

진짜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에 수현이 얼어붙어 있던 사이 휴대폰을 수현에게 건네준 현규가 차 문을 연다.

“내리자. 점심은 먹어야지.”

“형, 지금 밥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것부터 해결해야 하지 않냐고 수현 역시 재빨리 차에서 내려 성큼성큼 걷는 현규의 뒤를 따랐다.

“저기, 형…… 그러니까, 우리…… 아니…….”

말을 더듬으며 점심시간이라 제법 찬 가게에서 빈 테이블을 찾은 수현은 재빨리 그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정신이 반쯤 나간 상황에서도 빈자리는 잘 찾는 수현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그 맞은편에 앉은 현규는 메뉴판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수현이 막 수저를 챙기는 걸 본 현규가 빠르게 묻는다.

“전골은 뭘로? 중? 대?”

“대요.”

“그래. 사리는?”

“칼국수랑 느타리버섯이요.”

“음료는?”

“콜라요.”

“그래.”

이 와중에도 메뉴는 확실히 챙기는 수현을 신기해하던 현규는 곧 직원을 불러 주문을 시작했다.

“여기 만두전골 대 사이즈로 하나 주세요. 칼국수라 느타리버섯 사리로 추가하고, 음료수는 콜라로요. 혹시 얼음도 준비해 주실 수 있나요?”

애가 제정신이 아니라 콜라라도 마시고 정신을 차려야 할 것 같으니까, 라고 현규가 힐끔 수현을 바라보자 직원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인다.

“네.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서둘러 주문서에 메뉴를 적어 넣은 직원이 주문서를 테이블 위에 두곤 서둘러 자리를 뜨자 현규가 차분하게 잔에 물을 따라 건네준다.

“물부터 마셔.”

“아니, 마시긴 하겠는데요.”

“마셔.”

그 말에 물을 마시는데 캔과 얼음이 든 잔을 가진 직원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음료 먼저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빠르게 준비된 음료에 이번엔 현규가 캔 마개를 따 수현에게 건넸다. 속이 탔는지 단숨에 물잔을 비운 수현은 이번엔 현규가 내민 캔을 받아 들고는 그대로 콜라를 입 안에 들이부었다.

막 딴 캔이라 탄산이 엄청날 텐데도 시원하게 콜라를 들이켜는 수현을 바라보다, 현규은 자연스럽게 대화의 방향을 비틀었다.

“오늘 오후에 근무해?”

“오늘은 근무해요.”

“정시 퇴근?”

“네.”

“그럼, 같이 퇴근하면 되겠네. 너랑 들를 데가 있으니까.”

모처럼 표정을 풀고 싱긋 웃은 현규가 건넨 말에 막 반쯤 마신 캔을 내려놓던 수현이 겁에 질린 얼굴로 현규를 바라본다.

“또 뭘 하려고요?”

이번엔 날 또 어딜 팔아넘기려고, 라는 얼굴로 수현이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현규를 응시하자 현규가 재빨리 웃으며 수현을 달랜다.

“그렇게 쳐다볼 거 없어. 인신매매도 장기 적출도 안 해. 피곤하다면 나 혼자 움직여도 되지만 같이 저녁 식사 하고 술도 한잔했으면 하는 거야. 어쨌든, 결혼기념일이잖아.”

그 말에 다시 콜라를 마시려 캔을 들던 수현은 순간 멈칫했다.

결혼기념일이라는 말이 유독 뇌리 깊이까지 박혀 온 탓이다.

관습적으로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혼인 신고만 하는 경우 혼인 신고 날짜가 결혼기념일이 되는 건 맞다.

오는 내내 뇌가 멈춰 지금 이 상황이 말이 되냐고 따지긴 했지만 사실 접수증을 봐도 결혼이 그다지 현실로 와닿지는 않았다. 너무 큰일을 당하면 오히려 현실감이 없는 것처럼, 워낙에 기습적으로 뒤통수를 맞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바로 지금 ‘결혼기념일’이라는 단어에 드디어 결혼이 실감되기 시작했다.

그래, 난 방금 결혼한 거다. 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법적으로는 결혼이 성립된 거다.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마치 휘몰아치는 폭풍에 휩쓸리듯…….

“……형, 저…….”

진짜 이거 괜찮은 거냐고 물으려는데 갑자기 현규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려 대기 시작했다.

언뜻 듣기에는 휴대폰에 있는 기본 벨 소리였지만 그 소리가 마치 ‘너는 오늘 죽었어.’라고 고함을 지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절대 기분 탓이 아니었다.

“형, 전화요…….”

안 받으시나요, 라는 말을 축약한 그 말에도 형이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의 볼륨을 최소로 줄인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다는 얼굴로 태연히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딱 자신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현규 형이.

“휴대폰 꺼.”

“……저요?”

그렇게 되묻자 형이 그럼 지금 여기 너 말고 누가 있니, 라고 눈빛으로 말을 건넸다.

“이제 너한테 전화 올 거야.”

그 말에 설마 하며 휴대폰을 내려다보자 기다렸다는 듯 벨 소리가 울려 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무서운 속도로 쏟아지는 메시지에 형 말대로 재빨리 휴대폰 전원을 꺼 버렸다.

“당분간 휴대폰 켜지 마.”

“……그럼 연락은 어떻게 해요?”

아무리 지금 쉬는 중이라고 해도 업무가 있는데, 라고 수현이 당황해하자 현규가 곧 말을 바꾼다.

“그럼, 식사 끝난 뒤에 켜서 무음으로 해 놓고 메시지로 오는 연락만 받아. 전화는 받지 마.”

어차피 요즘 일 처리는 대부분 메시지나 메일로 보내니 그렇게 해도 상관없긴 했다.

“네. 그래야겠네요.”

“그리고 퇴근할 거 아니면 어디 도망 가 있어.”

“왜요?”

그 질문에 바로 ‘왜겠냐?’라는 시선이 날아온다.

괜히 물었다. 당연히 대표님이 잡으러 오니까 도망치라고 했겠지.

“……그럼 퇴근할게요.”

“그럼, 집으로 찾아가실걸.”

바로 옆이니까, 라는 말에 수현은 탄식했다. 내가 이러라고 바로 회사 옆 건물로 이사 온 게 아닌데…….

“그럼 어떻게 해요?”

“차에 숨어 있든가, 화장실에 숨어 있든가.”

그건 네가 알아서 하고, 라는 현규의 발언에 수현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게 대체 무슨…….”

혼인 신고의 충격이 다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폭탄이 터지니 앞의 혼인 신고 따위는 별게 아닌 게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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