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별게 아닌 건 아닌데 하여간 혼인 신고가 조금 먼 세상의 얘기라면 전화와 문제는 현실의 위협이었다.
아버지랑 형들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한데 대표님까지 더할 걸 생각하니 멀미가 날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삼촌하고 결혼할 걸 그랬나…… 라고 잠시 생각해 봤지만…… 그래도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래, 그건 아니다.
그러니 지금 이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수현은 애써 자신을 위로하며 이 상황을 정당화했다.
빌어먹을 영감탱이들의 자존심 싸움에 휘말려 인생이 난장판이 되어 버렸지만 어쨌든 결혼 상태가 현규 형인 건 그렇게 나쁘지 않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에도 또 낚인 기분이 들긴 하지만 여기 안 낚이면 저쪽에 낚였을 판이라 그 부분에 대해서는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다.
이제 중요한 건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 가느냐다.
오늘만큼은 쓸데없이 빠른 자신의 회복력과 멘탈에 감사하며 수현은 비장하게 젓가락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그런 수현을 바라보던 현규는 기분 좋은 듯 웃고 있었다.
애가 참 단순해서 다행이라고.
* * *
점심시간이 지난 후, 화장실 변기 위에 쪼그려 앉은 수현은 심각한 얼굴로 무음으로 설정해 둔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무실은 언제 대표님이 들이닥칠지 몰라 얼굴도장만 찍고 도망쳤고, 옥상은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 갈 수 없었다. 그리고 차는, 어차피 오피스텔 건물 주차장에 서 있으니 거길 갈 거라면 그냥 집에 가는 쪽이 낫기에, 여러 상황을 고려해 숨은 곳이 화장실이었다.
사실 근무 시간에 변기 위에 쭈그려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는 자신에게 회의감이 들 만도 한데 조용하게 외부의 모든 폭격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휴대폰을 보고 있자니, 그런 감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대충 대표님이 전화 열여덟 통, 아버지가 전화 네 통, 작은형이 전화 두 통, 윤 팀장님이 메시지 다섯 개, 주영이가 메시지 일곱 개, 삼촌이 전화 한 통, 그리고 큰형은…….
“신고할까…….”
1시간이 안 되는 사이에 전화 마흔여덟 통과 메시지 서른여덟 개다. 휴대폰 알림난을 꽉 채우다 못해 지금도 화면 위에서 반짝이고 있는 ‘큰형’이라는 이름에 수현은 진저리를 쳤다.
“와, 지치지도 않아.”
혹사당하는 형 휴대폰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며 뚫어져라 화면을 바라보는데 소리 없이 울려던 벨이 어느덧 뚝 하고 끊긴다.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기다리자 10초가 넘도록 고요하다.
그렇다는 건 다른 볼일이 있어 잠시 휴대폰을 손에서 놨다는 거다.
순간, 수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앞으로 몇 분간은 조용하겠지.
그틈에 현규 형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두 손으로 휴대폰을 드는데 ‘삼촌♡’이 알림 창에 뜬다. 반가운 이름을 재빨리 누르자 바로 삼촌의 메시지가 드러난다.
[혼인 신고 했다는 게 무슨 소리야?]
역시 삼촌에게까지 연락이 갔구나, 라는 생각에 삼촌에게만은 곧장 메시지를 보냈다.
[구청에 끌려가서 사인 하나 했는데 혼인 신고서였어.]
간략한 한 문장으로 상황을 정리해 보내자 곧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소리는 없지만 화면에 보이는 삼촌 이름에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누르곤 작게 대꾸했다.
“응.”
- 이게 무슨 소리야?
“본 그대로.”
- 지금, 현규가 강제로 널 데리고 가서 혼인 신고를 했다는 거야?
“어…… 얼결에 따라가기는 했는데…….”
- 했는데?
“실질적으로는 나도 동의한 거라…….”
- 수현아…….
어이없어하는 삼촌의 부름에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누가 봐도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기는 한 터라 얌전히 무슨 욕이든 하세요, 모드로 기다리고 있자 삼촌이 긴 한숨 뒤로 가장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다.
- 대체 왜 혼인 신고를 한 건데?
“그게…… 잠깐만…….”
자세하게 설명하긴 해야 하는데 혹시나 사람들이 오가다 들을까 조용히 변기통에서 내려와 문을 열고 밖을 살폈다. 다행히 밖에는 사람이 없었고 칸도 전부 열려 있었다.
그걸 확인하곤 슬금슬금 화장실을 빠져나가 곧장 복도를 가로 질러 가장 만만한 서버실로 들어섰다.
서버실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 비밀 대화를 하기엔 최적이었다. 다만, 좀 추운 게 문제일 뿐.
“그러니까, 그게…….”
* * *
우리 대표님과 서 국장님, 그리고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유치한 싸움에서 시작된 비극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자 삼촌이 앓는 소리를 낸다.
- 아…… 정현 형…….
본인도 오늘 강제로 혼인 신고 당할 뻔했다는 걸 그제야 눈치챈 삼촌의 한탄에 수현이 곧장 맞장구친다.
“내 말이…….”
그래서 내가 유부남이 된 거라고 수현이 답한 순간 해준이 그건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 아무리 그래도 혼인 신고를 해 버리면 안 되지.
“나도 본의는 아니었지만…… 그때 안 했으면 삼촌하고 나랑 혼인 신고 당했을걸.”
우리 아버지와 큰형의 실천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어느 쪽과든 자신은 결국 혼인 신고를 했을 거였다.
큰형이 만약 현규 형처럼 무작정 사인하라고 했다면 자신은 분명히 얌전히 사인했을 거다. 아무것도 모른 채.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범위여야 경계를 해도 하지, 혼인 신고는 진짜 상상도 못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진짜 신박하다.
아버지도, 현규 형도.
- 나도 모르겠다, 이젠.
“그래, 이미 벌어진 일이니 신경 쓰지 마. 하여간 우리가 혼인 신고 했으니까 다시는 주영이랑 현규 형 결혼 얘기는 안 나올 거야. 삼촌하고 내 결혼 얘기도.”
- ……과연 그럴까?
오늘 얘기까지 듣고 나니 두 사람이 혼인 신고 했다고 어른들이 포기할 것 같지는 않다는 게, 해준의 솔직한 의견이었다. 승부욕과 괴팍하기로는 둘째가라 하면 서러워하는 사람들인데 그 세 사람의 성질을 너무 건드려 놨다, 현규가.
어른들도 과했던 건 맞지만 현규가 짜낸 방법은 너무 극단적이었다.
조금 당해 주는 척하면서 앓는 소리를 했으면 결국 버티는 놈이 이겼을 텐데, 현규가 일을 너무 키워 놨다.
저 만만치 않은 세 양반을 잔뜩 약 올려 놔 이젠 어른들 셋의 자존심 싸움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 간의 전쟁이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그럼 절대 저 어른들은 포기 안 한다. 그리고 현규 역시 절대 얌전히 당할 성격은 아니다.
그러니 이제 남은 건 전쟁뿐이라는 해준의 설명에 수현은 섬뜩한 듯 몸을 떨었다.
“삼촌, 무서운 소리 하지 마.”
지금까지도 충분히 피곤하고 귀찮은데 여기서 더 뭔가 생긴다면 난 그냥 다 포기해 버릴 거라고 수현은 진저리를 쳤다.
아니, 혼인 신고라는 초강수를 뒀는데 이 뒤에 뭔가 더 있다면 그건 딱 두 가지뿐이다.
이혼 아니면 임신, 인데…… 불행히도 이 경우에는 하나의 루트뿐이다.
이혼.
- 네 말대로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은 어쩔 수 없으니 더는 말 안 하겠지만…… 그렇다고 다 끝난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 정현 형도 형인데 서 국장님이나 강 대표님도 절대 이대로 넘어갈 성격들은 아냐. 진짜 최악의 상황에는 중혼이라도 불사할 수 있어.
혼인 신고는 혼인 신고고, 결혼식은 주영이랑 올리게 할 수도 있다는 삼촌의 예언에 수현은 소름 끼쳐 팔을 벅벅 긁어 댔다.
그 영감탱이들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걸 알아서였다.
흥분하면 가끔 이성이 가출하는 어른들이라 진짜 너무너무 약이 올라 미칠 것 같으면 저 방법을 불사할 수도 있다.
“아니, 우리는 무슨 죄야?”
어른들이 싸울 거면 자기들끼리 싸울 것이지, 왜 자식들 인생을 개판으로 만드는 거냐고 탄식하자 삼촌이 진짜 난장판이 된 상황을 차분히 브리핑해 준다.
- 지금 진원이랑 지수가 너 가만 안 둔다고 난리야. 당분간은 연락받지 말고 집에 찾아가도 문 열어 주지 마.
“하아…….”
이제 집도 안전하지 못한 거냐, 라고 한탄하는 사이 삼촌이 안타까운 듯 작게 중얼거린다.
- 다른 때면 내 아파트에 와 있어도 되는데…….
‘지금은 좀 그렇지?’라고 말을 흐리는 삼촌의 음성에 그대로 받아쳤다.
“지금은 안 되지.”
삼촌네서 지내면 형들에게 발각당할 위험이 크기도 하지만, 일단 현규 형이 안 좋아할 거다.
그러니 그건 안 된다고 아예 선택지에서 빼 버리자 삼촌이 의외라는 듯 웃는다.
- 우리 수현이 다 컸네. 그게 안 되는 것도 알고.
“현규 형이 삼촌하고 따로 만나지 말라고 했어.”
- 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어쨌든 삼촌이 내 전 약혼자니까, 신경 쓰인대.”
- ……현규가 그래?
“응.”
- ……그런 거 신경 쓸 정도로 섬세한 성격은 아닌 걸로 아는데……?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보수적이래, 본인 말로는.”
확인된 바는 없지만 일단 본인이 그렇다니 그렇겠지, 라고 수긍하자 삼촌이 여전히 납득이 안 되는지 애매하게 말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