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160)

- 그래…… 뭐…… 그럴 수 있지……. 연애 많이 해 본 녀석들이 결혼하면 가정에 더 헌신적이 되기도 한다니까…….

“어, 맞아. 약혼자랑 연애는 안 하지만 결혼하면 일단 파트너에게만 충실할 거라고 했으니까…… 헌신적……이겠지?”

말을 하면 할수록 뭔가 좀 앞뒤가 맞지 않는 느낌에 말끝이 의문형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삼촌 역시 좀 이상하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 ……현규가 그래? 결혼하면 상대에게만 충실할 거라고?

“응.”

- 어…… 뭐…… 그건…… 좋네. 그래, 그 녀석도 철들 때가 됐지. 혼외자만 안 만들면 바람피우는 건 상관없다던 녀석이지만…….

“응?”

- 아, 예전에는 그랬다고……. 사람은 환경에 따라 생각이, 변하니까. 결혼하면 당연히 상대에게 충실해야지.

“그렇지.”

- 혹시, 그러면서 나 만나지 말라고 한 거야?

“응. 어쨌든 외부 시선으로 보기엔 삼촌이 내 전 약혼자라고. 주영이도 별로 안 좋아할 거라던데?”

- 어…… 주영이는 괜찮아. 너랑 내 관계가 부자간도 아니라 모자간 같아서 웃긴다는 녀석이니까.

“……모자간?”

- 내가 네 옷 사 입혔던 거 알고 솔직히 처음에는 좀 기분 안 좋았는데 너 취직하고 옷 입고 다니는 거 보고는 제발 너 옷 좀 사 입히라고 하더라.

“내가 왜?”

- 주영이 눈에는 네가 가끔 바퀴벌레로 보인대. 엄마가 손 놓으니 애가 꼬질꼬질해졌다고 슬퍼하고 있어, 요즘.

다소 충격적인 표현이었지만 바로 어제 바퀴벌레 같던 팀원들을 본 이상 차마 그 말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오늘 현규 형이 지적한 것도 있고, 자신이 지금 많이 꼬질꼬질해 보이긴 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건 맞는데…… 그래도 꼬질꼬질은 아니지. 나 세탁은 잘해.”

우리 팀에서 내가 제일 깨끗하다는 반론에 삼촌이 너 말 잘했다는 듯 바로 받아친다.

- 다림질을 안 하잖아.

“그래서 면만 사잖아.”

- 면도 다림질해야 돼. 내가 너 아기 때부터 예쁜 옷만 찾아 입혀서 키워 놨는데 그렇게 키워 놨으면 지금 네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알아야지.

분명 삼촌은 그런 면에서는 헌신적이었다. 가족을 잃은 직후 우리 집으로 왔을 때 내가 태어나 정을 특별히 많이 줬다는데…… 그렇게 보면 주영이의 평이 가장 정확하긴 했다.

자신과 삼촌의 관계는 부자간도 아니라 모자간에 가깝다.

삼촌이 날 기저귀 갈고 먹이고 입혀서 예쁘게 키웠으니까.

아니, 어쩌면 보호자와 반려동물에 가까울지도…….

“내 옷 많이 이상해?”

- 응.

“……우리 팀은 다 나처럼 하고 다니는데?”

- 너희 팀이 이상한 거야.

“알았어. 접수. 주영이한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해. 현규 형이 주말에 쇼핑하러 가자고 했으니까.”

- 현규가?

“응.”

- ……그 녀석 자기 옷도 귀찮아서 안 사러 나가는데?

“쇼퍼 쓴다고는 들었어.”

- 그런데 네 옷 사러 쇼핑을 나간다고?

“응. 꼴 보기 싫대.”

- 그건 이해하지만…….

“삼촌…….”

- 내가 태어날 때부터 곱게 키워 놓은 애가 추리닝에 슬리퍼 신고 출퇴근한다고 생각해 봐. 그것도 회사 바로 옆에 집 얻어 놓고 다크서클 달고서 맨발로.

속 뒤집어지지, 라는 삼촌의 말에 도저히 반박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자 삼촌이 길게 한숨을 내쉰다.

- 하여간 개선 의지가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네. 현규가 그나마 너한테는 꽤 다정한가 봐. 그렇게 상냥한 성격은 아니라 좀 걱정했는데…….

“별로 상냥하지는 않아.”

가끔 신변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상냥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주 가끔 다정하긴 한데 그건 사람들이 있을 때랑 형이 뭔가 원하는 게 있을 때뿐이고…….

- 현규 성격에 그 정도면 상냥한 거야.

“이게 상냥한 거면 현규 형의 기본 인성이 의심되는데……?”

- 원래 말수도 적고 무뚝뚝하잖아. 그 녀석도 눈빛으로 말해요, 타입인 데다 냉한 얼굴이라 말 걸기도 쉽지 않고. 사실, 나도 유학 초기까지도 거의 연락 안 하긴 했어. 그러다 나중에 친해졌지. 아마 주영이 유학 온 뒤에…….

거기까지 말하던 삼촌이 문득 말을 멈춘다. 그리고 그러기를 잠시, 이어지지 않는 대화에 수현은 전화가 끊겼나 화면을 확인했지만 통화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여보세요?”

- ……어…… 아, 미안. 그냥 그때 생각 좀 하느라…….

“응?”

- 어……그 녀석 유학 갔을 때도 초기에는 나한테 꽤 싸늘했던 기억이 나서. 보통 유학생들끼리는 부모 죽인 원수 아닌 이상은 잘 지내는데 워낙에 태도가 안 좋아서…….

거기까지 말하던 삼촌이 거기서 또 말을 끊는다. 그러곤 뭔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말을 돌린다.

- 아니다. 그건 내가 알아볼게. 너 아직 회사야?

“응. 회사긴 한데…….”

- 아까 소리 좀 울리던데…….

“화장실에 숨어 있었거든.”

지금은 얼어 죽을 것 같은 서버실, 이라고 답한 순간 삼촌이 언제나처럼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준다.

- ……수현아…….

숨어 있다는 것도 어이없는데 그것도 왜 하필 화장실에, 라는 긴 문장을 축약한 ‘수현아’였다.

그걸 잘 알아들었기에 서둘러 현재 상황을 알렸다.

“대표님한테서 도망 다니는 중이야. 지금 사무실로 계속 연락 중이신가 봐. 나한테도 전화 오는데 무시하는 중이야.”

- 대표님…… 아…….

대충 알겠다고 삼촌이 한숨을 내쉰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 라는 한심함이 반, 안쓰럽다는 동정이 반 담긴 한숨이었다.

- 이게, 피해 다닌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그건 아는데, 지금은 귀찮아.”

며칠 시간 끌면 1시간 들을 잔소리를 지금 들으면 5시간 들어야 해서 귀찮다는 게 본심이었다. 이미 연말 식단까지 다 짜 놔서 더는 짤 것도 없다.

그리고 혼인 신고만으로 오늘 빨릴 기는 다 빨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바로 지금 다 때려치우고 집에 가서 만두나 하고 싶다. 만두 한 100개쯤 싸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다.

- 그래, 너도 지금은 정신없을 테니까……. 일단 도망다녀 봐.

“응.”

- 그럼 끊을게.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통화를 마무리한 뒤 다시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자 그사이 온 알람이 수십 개다.

대표님 비서팀과 큰형이 명승부를 펼치고 있었다. 속도 면에서는 비서팀이 앞서지만 독기와 스킬 면에서는 큰형이 아직 한 수 위다.

비서팀은 전화만 하고 있지만 큰형은 전화 사이사이 독한 메시지까지 보내고 있다.

“지치지도 않아…….”

일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하지?

새삼 형의 체력과 끈기에 감탄하며 알림난을 확인하는데 그사이 온 연락은 비서팀과 큰형뿐이다. 근성 없는 둘째 형은 벌써 포기했다.

둘째 형은 이래서 안 되는 거라고 혀를 차며 슬슬 몸을 일으켰다.

기계가 많은 탓에 서버실 안의 온도가 너무 낮았다. 살짝 몸이 떨릴 정도라 후드를 뒤집어쓴 채 조심조심 문을 연 뒤 복도를 살폈다.

예상대로 복도 안은 고요했다. 드문드문 오가는 사람들은 보이지만 많지는 않다.

이 상태면 사무실로 복귀해도 괜찮을까? 아니면 또 화장실로 도망칠까 고민하고 있는데 사무실 쪽에서 익숙한 얼굴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윤 팀장님이다.

반가운 얼굴의 등장에 윤 팀장님에게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하자 이쪽을 발견한 윤 팀장이 너 왜 그러고 있냐는 얼굴로 빠르게 다가선다.

“이 대리, 여기서 뭐 해? 비서실에서 계속 찾던데.”

점심 시간에 일어난 비극적 사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윤 팀장의 발언에 수현이 서둘러 가까이 다가온 윤 팀장의 팔을 잡아끌고는 다시 서버실로 들어선다. 그러곤 다급히 말을 건넨다.

“아직도 비서실에서 저 찾아요?”

“어? 응. 왜? 사고 쳤어?”

또 무슨 일인가 하며 흥미진진해하는 팀장님의 눈빛에 순간 팀장님이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제의를 했다.

“팀장님, 저 좀 도와주세요.”

“응?”

“대신 소스 드릴게요.”

“무슨 소스?”

“내기할 때 무조건 이기는 소스.”

“……그게 뭔데?”

“도와주실 거예요?”

일단 그것부터 말하라고 수현이 채근하자 윤 팀장이 잠깐 의심스러워하는 눈빛으로 수현을 바라보다 다시 묻는다.

“……진짜 무조건 이기는 소스야?”

“네. 이거 아는 사람 지금 우리 가족들밖에 없어요. 못 새 나가게 다들 쉬쉬하는 중이라.”

그러니까 아주 판돈 크게 거셔야 할 거라고 수현이 스스로의 사생활을 내기판에 던지며 도박꾼을 부채질하자 역시나 윤 팀장이 곧장 걸려든다.

“좋아. 뭔데?”

빠른 답에 수현도 빠르게 답했다.

“저희 혼인 신고 했어요.”

“……응?”

“현규 형하고 저 혼인 신고 했어요, 점심시간에. 그래서 양가가 뒤집혀서 지금 도망 다니는 중이에요.”

특히 대표님이 제일 화났을 거라는 수현의 자백에 잠시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 미간을 찌푸린 채 고뇌에 잠겨 있던 윤 팀장이 빽 하니 고함을 내지른다.

“혼인 신고?”

“쉿!”

아무리 서버실이라도 문 앞이라 소리 새 나간다고 수현이 입을 틀어막자 윤 팀장이 기가 막혀 하는 얼굴로 수현을 바라본다.

“그러니까, 점심시간에 나가서 혼인 신고를 하고 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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