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그 혼인 신고?”
“네. 바로 그 혼인 신고요.”
“허…….”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이냐, 하는 얼굴로 놀라워하는 윤 팀장님의 반응을 백분 이해했다. 사실, 윤 팀장님과 같이 일한 게 벌써 5년째인데 오늘만큼 윤 팀장님께 공감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봐도 미친 것 같다.
“그래…… 뭐 알겠어. 그럴 수도 있지……. 다들 그러니까…….”
보통은 월차를 내지만, 이라고 말하던 윤 팀장은 거기까지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지금 혼인 신고 해 놓고 대표님 피해 도망 다니는 거라고?”
“네.”
“……왜?”
어차피 정략혼인데 왜 도망 다니냐는 윤 팀장의 물음에 수현이 손을 내젓는다.
“사실은 집안끼리 좀 복잡하고 오래된 서사가 있어요. 일종의 로미오와 줄리엣 같다고나 할까요?”
그 서사가 너무 유치하고 어이없어 차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대충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얼버무리자 윤 팀장님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높아진다.
“정략이 아니었다고?”
“전혀요. 100% 저희 의지입니다. 부모님들은 서로 사돈 못 맺는다고 싸우는 중이에요.”
지금쯤 전화통에 불나고 있을 겁니다, 라고 수현이 덧붙인 순간 윤 팀장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진다.
“와, 대박. 난 강 팀장하고 이 대리 빼박 정략이라고 생각했는데.”
“왜요?”
“그게, 사람이 원래 연애를 하면 티가 나거든? 특히! 사내연애는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어떻게든 미묘하게 티가 나게 돼 있어. 갑자기 스타일을 되게 보기 좋게 바꾼다거나, 아메리카노만 마시던 사람이 라떼를 마신다거나, 디저트 카페나 여행지에 관심을 갖는다거나, 점심시간에 따로 혼자 나가 먹는다거나, 사무실 나갈 일만 생기면 신나서 자진해서 나간다든가, 그것도 아니면 종일 휴대폰만 보고 있다거나. 물론, 주식 하는 놈들도 그렇기는 하지만…… 하여간, 그런데 이 대리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고.”
특히나 휴대폰에 관한 이야기 부분에서 윤 팀장은 넌 절대 연애를 할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현규가 한국에 들어온 지 이제 겨우 열흘인데, 그 열흘 사이 수현은 가족들한테 나 안 죽을 거고, 혹시 죽더라도 팀원들이 알아서 처리할 테니 연락하지 말라고 하곤 전원을 아예 꺼 책상 위에 던져 놓았다. 그리고 그 후로 한 번도 전원을 켜지 않은 걸 윤 팀장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아니, 전원은커녕 휴대폰을 책상 위에 그대로 방치해 먼지가 쌓인 휴대폰이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바빠도 하는 놈은 다 하는 게 연애라지만 그것도 하루에 1시간은 개인 시간이 있는 사람의 경우다. 지난 열흘간 시스템 개발팀은 그냥 한 몸이었다. 개인은 없고 팀만 존재하는 열흘간이었다.
그런데 연애를 했다니, 그건 언어도단이다. 그러려면 수현이 분신술이라도 썼어야 한다.
그러니까 절대 두 사람은 정략이고, 연애하는 척하는 건 화제성을 위해 전략기획팀에서 짜낸 일종의 프로모션 같은 거라고 윤 팀장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상황이 아주 많이 당황스러웠다.
지금 윤 팀장은 지구 평평설을 들었을 때와 유사한 수준으로 황당해했다.
“아니, 뭐…… 그래…… 연애 결혼이라니…… 축하해.”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대단한 집안이라고 다들 정략결혼만 하는 건 아니니까. 아니, 애초에 수현은 대단한 집안 아들 같지도 않지만 하여간 그렇다니까 그러려니 하며 윤 팀장은 뇌가 거부하는 정보를 강제로 주입했다.
이해가 안 가면 외우면 된다.
그럼, 언젠가는 이해가 가더라.
“좋아. 그건 접수. 알겠어. 그런데 왜 갑자기 혼인 신고를 한 건데?”
“양쪽 집에서 다른 집하고 정략결혼 시키려고 해서요.”
순서대로 가면 오래 걸리니 일단 사고부터 쳤다는 말이었다, 그건. 수현은 그럴 수 있지만 현규가 그랬다는 사실에 윤 팀장은 오늘 세 번째로 경악했다. 하지만 그 충격도 잠시, 아주 현실적인 의문이 윤 팀장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이 대리, 이 상황에서 이런 질문 미안한데…….”
“하세요.”
이제 와 서로 미안해할 게 뭐 있겠냐 싶어 수현이 너그럽게 대꾸하자 윤 팀장이 조심스레 묻는다.
“……나, 주식 팔아야 돼?”
지극히 세속적인 그 질문에 수현이 손을 내젓는다.
“아뇨. 더 사세요. 호재예요. 우리 집안도 괜찮아요.”
“……금수저는 아니라며?”
“금수저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나쁘지 않아요. 그래서 선자리 꽤 들어와요.”
나 말고 형들한테, 라는 말을 생략하고 말하자 윤 팀장이 수현을 만난 이래 처음으로 수현의 집안에 흥미를 보인다.
“이 대리 집이 뭐, 아니 어딘데?”
“한성이요.”
툭 하니 그룹명이 던져진 순간 윤 팀장은 빠르게 그의 머릿속에 있는 주식 정보를 굴렸다. 그러다 혹시나 하며 물었다.
“……한성이면 한성건설하고 HS케미컬하고, 한성조선하고, 한성모직하고, 푸른드림식품 있는, 그 한성?”
“한성제지랑 바른증권도 있어요.”
수현이 윤 팀장이 모르던 자회사를 두 개 추가해주자 잠시 말을 멈췄던 윤 팀장이 진지하게 묻는다.
“이 대리, 왜 나 따라온 거야?”
아니, 그 전에 왜 취직을 한 거냐는 윤 팀장의 물음에 수현이 귀찮다는 듯 대충 대꾸한다.
“집 나오려고요. 하여간 그런 사정이니 도와주세요.”
“……이 대리, 혹시 집안에서…… 그…… 차별받거나 괴롭힘당하는 거야?”
오메가인데, 그나마 제대로 된 오메가도 아니라서, 학대받은 거냐고 윤 팀장은 걱정스러워하는 눈빛으로 수현을 바라봤다.
물론, 수현은 절대 그래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 속은 모르는 거라 혼자 머릿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윤 팀장에게 수현이 재빨리 잘못된 정보를 정정해 준다.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형들이 귀찮아서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저 좀 도와주세요.”
이번 요청에 윤 팀장은 조금 전과 달리 빠르게 반응했다.
“내가 뭘 도와주면 될까?”
“비서팀 팀장님하고 친하시죠?”
“어…… 아주 친하지는 않은데, 연락은 하지. 왜?”
“대표님 앞으로 일정 좀 알아봐 주세요.”
그쪽에서 눈치 못 채게, 라고 능구렁이 같은 팀장님에게 요청하자 팀장님이 상큼하게 미소 짓는다.
“오케이, 내가 그런 건 또 잘하지. 오늘 일정만 알아보면 돼?”
“가능하면 일주일 정도요.”
“좋아. 알아볼게. 그런데, 이 대리는 계속 여기 숨어 있을 거야?”
“여긴 추워서 안 되겠고 화장실에 있으려고요.”
서버실에서 벌벌 떨다 보니 화장실이 그리웠다. 일단 거긴 따뜻하고 물도 나오고 쾌적하다.
나중에, 혹시라도 아주 큰 일이 생겨 노숙자가 된다면 화장실에서 자야지, 라고 결심하는 사이 윤 팀장님이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묻는다.
“왜 그런 데 숨어 있어?”
“갈 데가 없어서요.”
어딜 가든 걸릴 수 있다고 하면서 후드 끈을 당긴 수현이 춥다며 몸을 움츠리자 윤 팀장이 혀를 찬다.
“그럼, 차라리 나가서 심부름을 해.”
“무슨 심부름이요?”
“한 정거장쯤 걸어가면 새로 생긴 쿠키 가게 있어. 거기서 쿠키 좀 사 와.”
“쿠키 가게? 블랑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알아?”
“거기 플레인이 제일 맛있어요.”
이미 한 바퀴 돈 듯한 느낌에 윤 팀장은 곧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건넸다.
“……알아서 사 와.”
“제 마음대로 사도 돼요?”
“응. 이 팀장한테 대표님 스케줄 물어보고 연락할 테니까 거기 가서 놀고 있어.”
“네.”
“그리고, 후드 좀 벗고.”
그렇지 않아도 정장 군단뿐인 건물 내에서 캐주얼 소수파라 눈에 띄는데, 거기다 후드까지 뒤집어쓰니 너무 눈에 띈다고 윤 팀장이 어서 벗으라고 손짓했지만 수현은 고집스레 고개를 내저었다.
절대 안 벗겠다는 제스처였다.
“도망 다닌다면서 들키고 싶어?”
이러면 대표님이 아니라 경호팀으로 신고 들어간다고 윤 팀장은 강제로 수현의 후드를 벗기려 했지만 수현은 두 손으로 후드를 사수했다.
“이래야 카메라에 안 잡히죠.”
“얼굴만 안 잡히면 뭐 해? 누가 봐도 이 대린데?”
이렇게나 튀는데, 라는 말에 수현에 손을 까닥인다.
“우리 팀 절반이 후드티 입고 와서 괜찮아요.”
거기다 전부 검은색이라, 얼굴이 안 보이면 나로 특정할 수 없다는 말에 그러고 보니 오늘 유독 사무실이 어둡더라, 라고 떠올린 윤 팀장이 탄식한다.
그래, 그랬던 것 같다. 일이 끝나 다들 퇴근도 하고 시간도 많은데 이상하게 다들 머리도 안 자르고 옷도 그대로 입고 다닌다.
그나마 날 추워져서 슬리퍼 안 신고 다니는 게 얼마냐…….
“아, 진짜 꼴 보기 싫어, 우리 팀.”
“왜요?”
“일 끝났으면 옷 좀 제대로 입고 다녀. 정장은 아니라도 좀 깔끔하게 세미 정장 비슷하게라도.”
아무리 자율 복장이라도 그게 정도가 있지 너흰 해도 너무하지 않냐는 윤 팀장의 잔소리에 후드 끈을 세게 매던 수현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듯 눈을 반짝였다.
검은 티셔츠가 사내에서 튄다면 정장을 입으면 된다.
“다음 주부터 정장 출근할게요…….”
그럼 다른 사람하고 구분 못 하겠지. 이 김에 머리도 자르고 구두도 신고 어떻게 해도 눈에 안 띄는 불특정 다수 중 하나가 되겠다고 결심을 굳힌 순간 윤 팀장이 혀를 찬다.
“팀원들한테도 한번 얘기해야지. 다른 팀 팀장들한테 자꾸 클레임 들어와. 직원들이 자기들도 자율 복장 하게 해 달라고 한대.”
“저런, 그럼 시발팀에 오면 될 텐데…….”
그렇게 말하며 슬쩍 문을 밀어 연 수현은 다시 복도를 살폈다. 하지만 방금과 마찬가지다.
복도는 평화롭고 안락해 보였다. 하지만 윤 팀장은 평화롭지 못했다.
“시발팀 퍼트린 거 이 대리지?”
“이미 다들 암묵적으로 그렇게 부르고 있었잖아요.”
“공식적으로 퍼트린 건 이 대리잖아. 아니, 시발팀이 뭐냐, 시발팀이?”
어감도 어감인데 뭔가 느낌이 발기 부전 같다며 윤 팀장은 질색했다. 하지만 그건 수현과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세 보이니 좋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