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160)

“뭐가 좋아?”

대체 그 세 보이는 기준이 뭐냐고 따지려는 찰나, 윤 팀장을 앞에 방패로 내세운 수현이 복도로 나가 문을 닫는다. 그러곤 곧 윤 팀장의 뒤에 숨은 채 천천히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모습에 윤 팀장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웃고 말았다.

가지가지 한다.

“아무도 안 쫓아와.”

“쫓아올 수도 있어요. 그 정도로 지금 상황이 심각해요.”

“그래서 앞으로 출근은 어떻게 하게?”

“휴가 내야죠.”

“아…….”

그제야 휴가 내도 되지, 라고 떠올리던 윤 팀장은 이내 다음 주부터 문의 지옥이 시작된다는 걸 깨닫고는 ‘놉!’을 외쳤다.

“안 돼. 이 대리 없으면 내가 죽어.”

앞으로 일주일간 온갖 진상들의 비상식적인 문의가 쏟아질 텐데 나 혼자 그걸 어떻게 감당하라고 하는 거냐고 윤 팀장이 화를 내자 조심조심 엘리베이터로 다가선 수현이 하향 버튼을 누르며 말을 돌린다.

“그러니까 대표님 일정 알아내 달라고요.”

“……반드시 알아낼게.”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본 수현이 ‘수고’라며 손을 들어 보이자 윤 팀장이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나만 믿으라며 윤 팀장이 엄지를 척 올린 순간 수현은 후다닥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곤 바로 엘리베이터 벽으로 붙어 몸을 숨긴 채 재빨리 닫힘 버튼을 누르는데 기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젠 안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너 뭐 하냐?’라고 묻는, 굉장히 자신을 한심해하는 그 시선에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자 엘리베이터 안쪽에 서 있던 현규가 수현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본다.

어이없어 하다못해 본인의 눈을 의심하는 얼굴이었다.

“어…….”

“…….”

“대표님한테서 숨어 다니느라고요…….”

“아버지한테서 왜?”

“계속 찾으셔서요.”

“……그럼 그냥 뵙지?”

“형이 숨어 있으라면서요?”

“이 정도로 본격적으로 숨으라는 뜻은 아니었어.”

그냥 피할 수 있으면 피하라고 한 거지 후드 뒤집어쓰고 첩자처럼 엘리베이터 벽에 붙으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아버지 피하려다 경호팀에 끌려가게 생긴 수현을 현규는 긴 한숨과 함께 바라봤다.

좋게 말해 집중력이 좋은 거고 나쁘게 말하자면 시야가 너무 좁다.

“후드나 벗어.”

경비 부르기 전에, 라는 말에 수현이 후드 끈을 꼬물꼬물 푸는 모습에 현규가 답답한 듯 후드를 훌렁 벗겨 낸다. 그러곤 엉망이 된 머리를 쓸어내려 주자 수현이 아프다고 인상을 쓴다.

“벗으려고 했어요. 심부름 갈 거라.”

“어디?”

“팀장님이 쿠키 사러 가서 그 가게에서 놀고 있으라고 하셨어요.”

대표님 나가시면 알려 준대요, 라는 말에 현규가 의외라는 얼굴을 한다.

“……윤 팀장님이?”

“네.”

“……의외네.”

그렇게 사람 좋은 느낌은 아니었는데, 라는 현규의 예리한 감에 수현이 그 감은 맞았다는 걸 확인해 줬다.

“당연히 이유 없이 협조적이진 않죠. 우리 정보 팔았어요.”

“응?”

“혼인 신고 했다고 까고 당분간 협조 좀 해 달라고 했어요.”

아마 이번에 한 번 크게 딸 거라고 수현이 배 위로 엄지 검지를 모아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자 현규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돈 문제라면 그럴 수 있다고 납득한 현규가 잠시 후 심각한 얼굴로 다시 묻는다.

“혹시, 윤 팀장님 도박 중독증 같은 건 있는 건 아니지?”

“경마나 카지노 같은 본격적인 도박은 안 하세요. 그런데 주식 좀 하시고 내기 좋아하는 편이에요. 오락은 과금은 많이 하는데 카지노 게임 쪽은 전혀 안 하시고요.”

“……너는?”

“네?”

“도박이나 투자.”

“아뇨. 전 스트레스를 요리로 풀어서 굳이…….”

사실 돈은 더 들어가는 것 같지만, 이라고 중얼거리던 수현이 차라리 그럼 도박이 나은가, 라고 고민하는 모습에 현규가 이마를 툭 친다.

“잘하고 있으니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주식은 있는데, 제가 직접 운용은 안 해서 몰라요.”

그냥 할아버지가 주신 주식뿐이고 딱히 그걸 사고 팔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수현이 본인의 재산 현황을 밝히자 현규가 그건 잘했다고 수현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앞으로도 그 태도 유지하도록. 1층에서 내려?”

“네. 형은요?”

“난, 마케팅팀에 볼일.”

마케팅팀이면 3층이다, 하려는데 바로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어느새 3층이다.

“먼저 내리세요.”

“그래. 쿠키 너무 많이 사 먹지 마.”

“법카에요.”

그러니 마음껏 과소비하겠다고 수현이 배시시 웃자 현규가 다시 수현의 뺨을 툭 두드리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선다.

순간 심장이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어 수현은 현규의 손이 닿은 뺨을 꾹꾹 문질렀다.

사내 연애를 하면 이렇게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만나 단둘뿐이면 꽁냥대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아…….”

그제야 윤 팀장이 연애를 하면 티가 안 날 수 없다는 말을 실감했다. 나갈 일만 생기면 본인이 나가겠다고 한다더니, 이런 걸 위해서였던 모양이다.

아니, 연애도 아니다. 이미 혼인 신고까지 했으니, 이건 사내 부부생활을 대리 체험하는 거라고 봐야 하는데, 그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기분 좋았다.

이러다 나도 수시로 심부름 간다고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웃거리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기분 좋은 우연이었다.

* * *

[대표님 오늘 오후에 해외 출장. 포럼 있다고 하네. 10분 후 출발하실 거야. 그리고 돌아오시는 건 월요일 오후. 자세한 일정은 스캐줄 표로 만들어서 보내 줄게.]

블랑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느긋하게 홍차와 쿠키를 먹고 있던 수현은 윤 팀장의 메시지를 확인한 뒤 굉장히 당황했다.

그 짧은 사이 대표님 일정을 알아낸 윤 팀장님의 능력도 대단하지만 그보다 굳이 그걸 엑셀로 표로 만들어주겠다는 윤 팀장님의 열정에 놀라서였다.

윤 팀장님은 확실하게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자신이 보기에도 재미있는 상황이라 거기에는 뭐라 하지 못한 채 ‘그럼 지금 들어갈게요.’라고 메시지를 보낸 수현은 잔을 든 채 테이블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미리 포장해 둔 쿠키를 잔뜩 손에 들고는 오늘따라 유독 따가운 햇살 아래를 걸어 다시 회사로 향했다.

다행히 큰형도 중요한 일이 있는지 10분 전쯤부터 메시지 보내는 걸 멈췄고, 대표님 쪽도 다음 일정 탓인지 더는 자신을 찾지 않고 있었다. 배터리는 아슬아슬하지만 드디어 휴대폰이 안식을 찾았다.

곧 과로사할 것 같은 휴대폰을 꼭 쥔 채 한 정거장 거리에 있는 회사를 향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볕은 따뜻하고 바람은 적당히 건조하면서 서늘했고 거리는 한산했다.

그러고 보니 이 시간에 나와 걸어다니는 것도 근 두 달 만의 일이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낮에 걸었을 때는 습도에 질식해 버릴 것 같은 날씨였는데 일 끝내고 정신 차리니 가을이 와 있다.

그것도 초가을이 아니라 본격적인 가을이었다.

날씨는 더없이 좋지만 이 시기는 짧다. 슬슬 겨울 준비를 해야 할 시기라 겨울옷과 이불을 꺼내야지, 하는데…….

“아…….”

그게 이젠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는 사실을 수현은 그제야 눈치챘다. 바로 오늘 혼인 신고를 했고 현규가 당당하게 자신의 오피스텔에 처박혀 있는 이상 침구 쪽은 마음대로 고를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어쩐지 이제 모든 게 현규 형의 마음대로일 거 같다는 예감이 강렬하게 들었다.

사실 그럼 편하긴 하다. 형이 다 알아서 하면 난 요리만 하고 이것저것 신경 쓸 거 없으니까 좋다.

오래 본 건 아니지만 의외로 형이 꼼꼼하게 집안일도 꽤 하는 것 같으니까…….

아니, 그러고 보니 이틀 새 나 너무 형한테 익숙해진 거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원래부터 알던 사이라 해도 솔직히 대화도 거의 해 본 적 없는 데면데면한 사이인데 겨우 이틀 사이에 완전히 형한테 적응한 느낌이었다. 물론, 자신이 쓸데없이 적응력이 좋은 건 사실이지만 이런 상황이면 좀 어색하고 불편해해야 하지 않나…….

그러고 보니 형이 옆에 있어도 너무 잘 자는 것도 신기하다. 너무 피곤해서 그런 탓도 있지만 평소에도 둔감한 편이라고는 해도 혼자 자던 사람들은 옆에 누가 있으면 예민해져서 적응하기 힘들다는데 자신은 너무 잘 잤다.

그리고 형도…….

본인이 동거는 해 본 적 없다고 했는데 의외로 무던한 타입인 모양이었다.

그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무던하다 보니 이왕이면 상대도 좀 무딘 편이 좋다.

여전히 잔소리는 심하지만 현규 형만 잔소리가 심한 건 아니니까. 내가 잔소리하고 싶게 생긴 얼굴인지 어딜 가든 잔소리가 심하니까 그 정도는 괜찮다.

그렇게 자신을 달래며 수현은 이 상황의 장점에 대해 떠올렸다.

혼인 신고의 충격은 여전하지만 어쨌든 그건 이미 벌어진 일이고 어떤 이유로든 자신 역시 암묵적으로 동의한 일이니 지금은 그 뒷일을 생각해야 할 때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에도 굉장히 낚인 기분이긴 하지만…… 이미 낚인 건 어쩔 수 없고…….

느긋하게 산책하든 걷다 보니 어느새 회사 앞이었다.

“시래기 감자탕…….”

오늘은 감자탕을 하고 싶은데 현규 형이 외식을 하자고 했으니까 해야지, 그럼 내일 시래기 감자탕을 해야 하니 등뼈를 어디서 살까, 날씨가 추우니 시래기가 땡기네, 라고 아주 쓸데없는 생각을 연이어 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우선 휴대폰을 확인했다.

팀장님한테 다른 연락이 와 있을지 몰라 일단 경계하며 휴대폰의 알림을 확인하자 팀장님의 연락은 없다.

삼촌의 메시지만 도착했을 뿐이다. 아니, 메시지뿐이 아니다. 전화도 몇 통 왔다.

무음으로 해 놔서 몰랐을 뿐.

“뭐지?”

빈 종이컵을 건물 앞 쓰레기통에 넣고는 가벼운 걸음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서며 메시지 창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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