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160)

[왜 전화 안 받아? 방금 진원이가 너 잡으러 갔어. 피해.]

“응?”

느긋한 햇살과 시원한 공기, 그리고 나른한 가을 오후의 분위기 탓에 신경이 느슨해져 방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 반응 속도가 느렸다.

큰형이 왜 날 잡으러 오지, 라고.

그러다 정확히 3초 후쯤 형이 왜 자신을 잡으러 오는지 깨닫고는 짤막한 비명을 내질렀다.

“아…… 아!”

큰일 났다, 라는 말을 ‘아!’라는 한 글자 비명으로 대체한 뒤 출입구에 서서 다시 나가야 하나, 사무실로 들어가 숨어야 하나 고민하던 사이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수현!”

큰형이다.

안 돌아봐도 알겠다.

지난 28년, 형들의 구박과 핍박과 잔소리 속에서 자라났기에 얼굴을 볼 필요도 없이, 목소리와 말투만 들어도 형의 현재 상태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이 목소리는 잔소리를 내쏘기 직전에 장전하는 소리다.

아랫배에 우렁차게.

“너, 이리 안 와?”

그 큰 사고를 쳐 놓고 전화도 안 받냐며, 언제나 형 따라다니느라 고생하는 비서를 달고 빠른 걸음으로 이쪽으로 다가서는 진원은 악귀라도 들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장 퇴마사를 부르고 싶게 만드는 흉흉한 형의 기세에, 수현은 고민할 틈도 없이 사원증을 찍고 그대로 비상구로 달려가 미친 듯한 속도로 계단을 올라섰다.

그사이 저 멀리서 “너, 거기 안 서?”, “쟤가 내 동생이라고요!”, “아니, 나 한성건설 이진원 이사라고!” 하는 고함이 들려왔지만 그를 무시한 채 재빨리 3층으로 올라가 비상구를 빠져나온 수현은 그대로 또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러곤 이번에도 변기 위에 올라 앉아 재빨리 현규 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사려쥬네소.]

급한 마음에 빠르게 쳐서 발송한 메시지는 암호가 되어 있었다. 자신도 알아볼 수 없는 단어에 다시 메시지를 보내려는데 빠르게 답장이 도착했다.

[무슨 소리야?]

말로 한 게 아니라도 환청처럼 들려오는 ‘이제 한글도 까먹었냐?’라는 형의 목소리에 다급히 다시 문자를 보냈다.

[살려 주세요.]

그리고 보내는 김에 이모티콘 중 가장 큰 이모티콘을 골라 ‘HELP ME’를 대문짝만하게 날리자 화면이 까맣게 변하며 ‘전기팀 강현규 팀장님’이라는 긴 이름이 빛난다.

전자파를 타고 내려온 한 줄기 동앗줄 같은 그 이름에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누르곤 작게 전화를 받았다.

“네.”

- 살려달라니?

“……큰형이 왔어요.”

- 뭐?

“큰형이 저 잡으러 왔어요.”

- ……어디에?

“로비에서 부딪쳐서 도망왔어요. 그런데 곧 찾으러 올 것 같아요.”

우리 형이라면 CCTV를 다 뒤져서라도 찾아내고 말 거라고 작게 중얼거리다 현규 형이 길게 한숨을 내쉰다.

- 진원 형을 내가 우습게 봤네.

설마 회사까지 찾아올 줄이야, 라는 말투에 그 원인을 형에게 알려 줬다.

“제가 전화를 안 받았거든요.”

- 받지 그랬어…….

죄지은 것도 없는데 왜, 라는 말이었다, 그건.

하지만 내내 말하지만…….

“잔소리 듣기 귀찮아요.”

솔직히 큰형이나 대표님이 무서운 건 아니다. 잡혀서 잔소리를 듣는다 해도 넋 놓고 있다 보면 잔소리는 언젠가는 끝난다. 하루 이틀, 한두 해 일도 아니라 잔소리 듣는 것도 사실 별거 아니지만…… 귀찮다.

진짜 더럽게 귀찮다.

어떻게 보면 도망 다닐 체력으로 잔소리 빨리 듣고 끝내는 게 좋지 않겠냐고 할 수도 있지만 어제오늘 연이은 잔소리는 좀 싫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는데, 빨리 맞는 매가 제일 아프다. 어차피 열 대 맞아야 하는 거면 나중에 맞는 게 덜 아픈 건 진리다.

- 그래, 뭐 이왕 일은 터졌으니 어쩔 수 없지. 그래서 지금 어딘데?

“3층 화장실이요.”

- 또, 화장실?

“화장실이 소리가 잘 울려서 누가 들어오면 알기 쉬워요.”

- ……그래……. 도망은 잘 다닌다니 안심돼서 좋네.

숨기도 잘하고 연락도 잘하니 어디 끌려가서 혼자 억울하게 당하거나 하지는 않겠다고 현규는 최대한 이 상황을 좋게 해석하기로 했다. 저 현실 도피 성향이나 일단 귀찮아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지만 어쨌든 장점도 있다.

- 나 지금 마케팅팀에서 나갈 테니 너도 그만 숨어 있고 나와.

“큰형한테 잡히면요?”

- 잡히면 뭐?

“오늘은 진짜 잔소리 많이 들을걸요.”

다른 것도 아니라 혼인 신고를 했는데, 라는 수현의 찡얼거림에 현규가 혀를 찬다.

- 이제 네 보호자는 나야. 내 보호자도 너고.

그런데 큰형이 이제 와 뭘 어쩔 거냐, 라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렇다.

“……그렇게 보면…… 그렇네요.”

진짜 부부는 아니지만, 일단 법적으로는 부부니까, 지금 내 보호자는 현규 형이고 그렇게 따지만 큰 문제들은 현규 형과 의논하는 게 맞으니까, 라는 수현의 빠른 수긍에 현규가 잠시 말을 끊었다 잇는다.

-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너 옥장판 산 적 있지?

“아니에요. 산 적 없어요.”

- 진짜?

“다단계에 많이 끌려가긴 했는데 산 적은 없어요. 전 귀찮아서 그런 것도 잘 안 사요.”

솔직히 끌려가서 설명 듣는 것도 귀찮아서 계속 다른 생각만 했던 탓에 낚일 일 자체가 없었다.

그리고 현규 형이 자꾸 자신이 잘 낚인다고 생각하는데 현규 형이 너무 잘 낚는 거다. 자신이 잘 낚이는 게 아니다.

- 그다지 믿기지는 않지만 본인이 그렇다니 그렇다고 해 두고…… 일단 거기서 나와.

“어디로요?”

- 나 마케팅팀 회의실이니 곧장 나갈 거야. 화장실에서 나와서 이쪽으로 와.

“그래도, 괜찮을까요?”

큰형 화 많이 났는데, 라는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전화가 뚝 끊겼다. 더 듣기도 싫다는 의미라고 해석됐다.

이젠 현규 형에 대해서는 독심술을 하는 수준에 이르러 말로 하지도, 얼굴이나 눈빛을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혼인 신고를 해서 그런가, 라는 생각을 하며 슬쩍 변기에서 내려가 문을 열고 밖을 살폈다. 다행히 화장실은 텅 빈 채였다. 그에 안도하며 멀리서 사 들고 온 쿠키 박스를 들고 화장실을 나가 마케팅팀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혹시 몰라 계속해서 주변을 살피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한성건설의 이사니 어쨌든 입구는 금방 통과했을 거다.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일단 비상계단을 확인했겠지만 이미 자신이 사라진 후라 곧장 19층으로 갔을 거다.

하지만 자신은 자리를 비운 지 오래니 형 성격상 또 바로 23층으로 가서 현규 형을 찾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다행히 현규 형도 3층에 있으니까…….

거기까지 떠올린 순간 마침 엘리베이터의 옆을 지나가는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공포 영화에서 연쇄 살인마와 초반에 살해당하는 주인공 친구 1이 마주칠 때의 배경 음악 같은 게 들리는 기분에 저도 모르게 그쪽을 돌아본 순간 바로 눈이 마주쳤다.

엘리베이터 안에 선 연쇄 살인마 같은 큰형과.

“이수현, 너 거기 안 서?”

넓고 고요한 복도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그 소리에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빠른 전력 질주를 시작한 순간 잘 아는 비서 형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이사님, 목소리 낮추세요. 여기 남의 회삽니다.”

“그럼 저 자식을 잡아!”

“진정하세요. 가 봐야, 회사 안이죠.”

쟤가 가 봐야 어딜 가겠냐고 큰형을 안심시킨 비서 형의 음성에 일단 미친 듯이 달려 마케팅팀으로 향하는데 마침 그 안에서 나오던 현규 형이 보였다.

“형!”

형을 보곤 멈추려 했지만 이미 가속도가 너무 붙어 그대로 속도를 늦추지 못한 채 형에게 달려들자 살짝 몸을 튼 형이 재빨리 허리를 안아 몸을 받아 준다.

“……이렇게 열렬할 필요는 없는데…….”

“형, 형. 큰형이요…….”

바로 뒤에 전기톱 든 형이 있다고 뒤를 가리키자 그쪽을 본 현규 형이 “아.”라고 별 감흥 없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미 알고 있어서인지 그다지 놀랄 것 없다는 느낌이었다.

“요즘 자주 뵙네요, 형.”

“그러게, 꼴 보기 싫은데 이상하게 자주 보게 되네. 너희가 자꾸 사고를 쳐서.”

따로 부르기도 귀찮았는데 너희 마침 잘 걸렸다는 듯 큰형이 이쪽으로 터벅터벅 다가오는 모습에 재빨리 현규 형의 뒤에 숨어 옷자락을 잡았다. 그러곤 고개만 빼곰 빼서 큰형을 바라보자 그가 오른손을 들어 검지만 까닥인다.

거기 숨는다고 안 보이냐? 빨리 기어 나와라, 진짜 혼나기 전에, 라는 손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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