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자리를 옮기시죠.”
복도에서 하기엔 지나치게 사적인 대화니 조용한 곳으로 가자는 현규 형의 제안에도 큰형은 꼼짝하지 않았다.
“일단 걔는 보내고.”
“본인이 안 가겠다는데요.”
“그러니까 보내라고.”
“그건 수현이가 선택할 일이죠. 이제 동생한테서 졸업 좀 하세요.”
“나 졸업시키려고 혼인 신고부터 했냐?”
“네.”
너무 빠른 현규의 답에 진원이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딱 다문다.
“그 집 가족들은 관심을 다른 데로 좀 돌릴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다른 취미나 애인이 없으니 만만한 막내한테 과한 관심을 쏟는 거거든요. 그렇게 기운이 남아도시면 개라도 키우시든가요.”
꽤나 신랄한 그 지적에 진원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는다. 이 새끼 봐라, 라는 얼굴로.
“……내가 할 일이 없어서 수현이 따라다닌다고?”
“넘쳐나는 기운을 풀 데가 없어서 이렇게 만만한 막내만 쫓아다니시는 거잖아요.”
종일 뛰어놀아도 지치지 않아 새벽까지 놀자고 보채는 강아지처럼, 이라는 말에 수현이 바로 뒤에서 맞장구친다.
“맞아. 형, 그래.”
그간 나도 그 말 하고 싶었다고 수현이 한 마디를 보태자 진원이 노성을 내지른다.
“야!”
“사실이잖아.”
“이것들이 은근히 말 돌려서 사람 헷갈리게 하네? 어른들하고 상의도 없이 혼인 신고부터 하고 접수증 사진 보낸 놈들이 뭐?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게 누군데, 누구를 브라더 콤플렉스로 몰아?”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해 보이냐는 진원의 말에 현규가 고개를 돌려 뒤에 숨은 수현에게 묻는다.
“너나 지수랑 달리 잘 안 넘어오시네?”
“네. 큰형은 꽤 이성적이에요.”
우리처럼 쉽게 휩쓸리지 않는다고, 수현이 속삭이자 현규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다른 방법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B안이 이미 준비된 건 아닌 듯 조금 망설이는 사이 큰형이 먼저 공격을 가했다.
“야, 이수현 너 일단 나와. 그리고 현규 너도 이리 와. 너희 둘은 오늘 밤새워 혼날 각오해. 이것들이 어딜 겁도 없이!”
나뿐 아니라 온 가족들과 대표님도 줄 서서 기다리고 있다고 진원이 선언한 순간 현규가 작게 중얼거린다.
“귀찮게…….”
농담 안 하고 저 사람들 다 상대하려면 이번 주말은 통으로 날리게 생긴 터라 현규가 진심으로 귀찮다는 얼굴을 하자 수현이 그것 보라고 현규를 부채질한다.
“제가 도망친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니까요.”
특히 큰형은 화났을 때 걸리면 잠도 안 재우고 잔소리한다고 수현이 현규에게 새로운 정보를 업데이트해 주자 현규가 진짜 싫다는 얼굴로 혀를 찬다. 그러곤 슬쩍 진원의 눈치를 살피는 얼굴에 진원이 헛웃음을 흘린다.
“너희 잔머리 굴리는 소리 여기까지 들리니 또 헛소리로 현혹하고 튈 생각 말고 조용히 이리 와. 아니, 아예 짐 싸서 와. 너흰 진짜 크게 혼나 봐야 돼. 혼인 신고가 애들 장난이야?”
“그럴 리가요.”
생에 3대 신고가 출생 신고, 사망 신고, 혼인 신고 아니냐고 현규가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수현도 고개를 끄덕하자 동의를 표한다. 무조건 현규 말에 동조하는 수현을 보던 진원은 둘이 진짜 가지가지 한다는 얼굴로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걸 아는 놈들이 어른들하고 아무 상의도 없이 혼인 신고를 해?”
“저도 성인, 이 녀석도 성인인데 문제 될 거 있나요?”
한쪽이 미성년자도 아니고 둘 다 성인에 이미 경제력을 갖추고 자립하고 있는데, 뭐가 문제냐는 현규의 반문에 진원이 버럭 고함을 내지른다.
“이 세상에는 규율과 약속과 예의라는 게 있고 모든 일에는 합당한 절차와 순서라는 게 있어! 아무리 너희가 성인이라고 해도 결혼 같은 중대사를 결정할 때는 제대로 상의하고 허락을 받고 진행해야지! 이 세상에 너희 둘만 살아? 가족 없어? 너희는 특히 집안에서 혜택을 많이 본 녀석들이야. 혜택을 받았으면 그만한 책임도 져야지! 그게 싫으면 증여받은 주식 다 뱉어!”
부유한 환경에서 어마어마한 혜택과 대우를 받았으면 그만큼 돌려줘야 하는 게 세상의 이치라고 진원은 냉혹한 현실을 알려 줬지만 현규의 생각은 좀 달랐다.
“우선, 제 주식은 할아버지께 증여받았고 그 조건은 모두 지켰으니 뱉을 이유가 없고 굳이 그 절차를 모두 건너뛴 이유는 형도 잘 아실 텐데요? 제가, 시간 낭비하는 걸 질색해서요.”
우리가 결혼하겠다고 하면 퍽이나 허락했겠다, 라는 빈정거림이었다, 그건. 그걸 수현도 알아챘고 진원도 알아챘다.
그래서 반박할 수 없었다. 둘의 혼인 신고 선언 후, 양가 어른들이 휴대폰으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하다 하다 휴대폰이 뜨거워서 전화를 못 하겠다며 이젠 아예 스피커폰으로 싸워 대는 통에 애꿎은 비서들만 귀에서 피를 쏟고 있는 중이었다.
“어른들이 쉽게 허락을 안 해도 일단 허락받는 척하는 성의라도 보여야 할 거 아냐?”
“성의 보여 봐야 절대 고집 꺾을 분들 아닌 건 형도 알고 저도 알잖아요. 괜히 어른들 자존심 싸움에 시간만 버리다, 몰래 혼인 신고하는 결과는 똑같았을 텐데 시간 낭비 할 필요 있나요? 거기다 마냥 기다리다 몰래 혼인 신고 당할 수도 있을 텐데…….
애매하게 말을 흐린 뒤 현규는 지그시 진원을 바라봤다.
바로 오늘 당신도 몰래 수현과 해준 형 혼인 신고하게 할 생각 아니었냐, 라고 책망하는 그 눈빛에 진원이 움찔한다.
수현을 닮아 과하게 솔직한 그 반응에 현규는 역시나란 얼굴로 싱긋 웃었다.
“역시나였네요.”
혹시나 했는데 예상에서 벗어남이 없다며 현규가 비웃는 모습에 진원은 발끈했다.
“야, 그건 주영이네가…….”
먼저 선공을 가하니까 우리는 방어한 것뿐이다, 라고 말하려는 순간 진원의 뒤에서 뜻밖의 인물이 엘리베이터 밖으로 내려서는 게 보였다.
“삼촌!”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반가운 존재의 등장에 수현이 막 그쪽으로 튀어 나가려는 순간 현규가 재빨리 수현의 목덜미를 잡아 제지한다.
그 힘에 수현이 멈칫하며 “켁.” 하는 소리를 내뱉자 진원이 너 지금 이거 가정 폭력이라는 얼굴로 현규를 바라본다.
“야, 너 지금 우리 막내 잡았냐?”
진원이 지적한 순간에야 비로소 본인이 수현의 목덜미를 잡았다는 걸 자각한 현규가 도리어 당황한 얼굴로 수현의 목덜미를 놓는다.
“……그랬네요.”
“뭘 ‘그랬네요’야? 야, 이수현 너 이리 와. 빨리 안 와?”
해준이 등장하자 지원군을 얻은 듯 기세등등해진 진원이 수현을 부르는 소리에 바로 진원의 뒤로 다가선 해준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진원을 바라본다.
“이진원, 좀 조용히 해. 남의 회사에서 뭐 하는 짓이야?”
“저 자식이 연락도 안 받으니 뺀질뺀질 피해 다니니 데리러 왔지. 삼촌도 쟤 끌고 가려고 온 거 아냐?”
“난 너 끌고 가려고 왔어. 너 5시에 미팅 있다며?”
아무리 회사가 가까워도 이제 20분 남았는데, 라는 해준의 지적에 진원이 시선을 피한다.
너무 화가 나서 미팅을 앞두고 달려 나오면서 취소하겠다는 소리도 안 한 모양이었다.
우리 형이지만 참 대책 없다고 수현이 책망하듯 진원을 바라보자 그 시선을 알아챈 진원이 욱한 얼굴로 수현을 바라본다.
너 형한테 그 불손한 시선은 뭐냐고 화를 내는 진원의 눈빛에 해준이 진원을 다시 부른다.
“진원아…….”
짧지만, 너 언제 정신 차릴래, 라는 말을 축약한 호명이었다. 진원 역시 그걸 정확히 알아들었는지 주저리주저리 변명을 시작한다.
“가려고 했어. 가까우니까. 차로 5분 거리잖아.”
“차 빼고 넣고 엘리베이터 기다리고 올라가는 시간은?”
“……그거 맞춰서 20분 잡고 가면 되잖아.”
“그래, 빡빡하게 잡아도 20분이지. 그러니, 이제 가야겠지?”
너 말 잘했다고 해준이 어서 가라고 고갯짓하자 진원의 눈이 빠르게 움직인다.
“아니, 가는 건 가는 건데 지금 저 자식이 말도 없이 혼인 신고를…….”
그렇게 들으니 가긴 가야 하는데 내가 다 이유가 있어서 여기 왔다는 진원의 호소를 해준은 단박에 잘라 냈다.
“수현이 혼인 신고 한 걸 네가 왜 여기저기 소문내고 다녀?”
“소문을 내? 내가? 언제?”
“너 때문에 이 층에 있는 사람들 다 알았겠어.”
네 성량이면, 이라고 말을 더한 해준이 어떻게 정현 형이랑 하는 짓이 똑같냐고 타박하듯 진원을 응시했다.
본인들이 전화나 대화로 사방팔방에 다 떠들어 대고는 나중에 소문나면 누가 누설했냐고 화내는 게 부전자전이다.
다행히 일은 그렇게 안 하지만 가족 일이라면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것도 똑같다.
“넌 이만 돌아가서 미팅이나 들어가. 그리고, 현규야.”
“네.”
“소란 피워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어차피 발표할 거 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하죠.”
어떻게 소문을 낼까 고민 중이었는데 진원이 와서 해결해 줬다고 현규는 싱긋 웃어 보였다. 말로는 자리를 옮기자고 하더니 이상하게 복도에서 대화를 오래한다 했더니 혼인 신고한 걸 사방팔방에 소문내는 게 목적이었던 모양이다.
팀장님한테 비밀이라고 했는데, 라고 수현이 잠시 윤 팀장을 걱정하는 사이 해준이 서둘러 자리를 정리한다.
“진원이는 내가 데리고 갈 테니 둘 다 일해. 수현이도.”
해준이 진원의 어깨를 툭 치며 가볍게 등을 밀자 비서가 인계하듯 진원의 등을 가볍게 터치한다. 다른 데 갈 생각 말라는 그 손길에 진원은 “좀 놔!”라고 작게 항의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진원이 얌전해지자 순식간에 평화를 되찾은 복도에서 현규는 그냥 예의상으로 하는 말이라는 분위기를 폴폴 풍기며 해준에게 말을 건넸다.
“모처럼 오셨으니 잠깐 차 한잔하고 가시죠.”
“그러고 싶지만 나도 다음 스케줄이 있어서. 그리고 너도 이미 원하는 건 다 얻었잖아.”
네 목적 달성했으니 된 거 아니냐고 해준이 웃자 현규가 허를 찔린 얼굴로 해준을 바라본다.
유학 시절 꽤 알고 지낸 사람이긴 하지만 유하고 순한 성품에 마냥 상냥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예리하다.
해준의 의외의 면에 현규가 해준을 관찰하듯 바라보는 사이 해준이 다시 시계로 시각을 확인하며 진원을 다그친다.
“넌 빨리 돌아가. 현우 씨, 회사에 연락해서 미팅 10분 정도 늦어질 거라고 미리 알려 주세요.”
진원의 비서를 향한 해준의 지시에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미리 연락해 뒀습니다. 20분 정도 미뤘으니 늦지 않을 겁니다.”
“수고했어요. 넌 다른 데로 새지 말고 곧장 회의실로 가.”
“아, 간다고. 그런데 갈 때 가더라도 쟤는 일단 끌고 가야겠어. 수현이, 너 이리 와.”
삼촌도 왔는데 안 올 거냐고 진원이 개를 부르듯 손가락을 까닥인 순간, 수현은 당황한 얼굴로 해준과 현규를 번갈아 봤다.
이런 표현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마치 기분이, 태어났을 때부터 키워 준 전 주인과 지금 밥 주는 새 주인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여기서, 전 주인은 삼촌이고 새 주인은 현규 형인데…….
오랜 시간 날 씻기고 먹이고 재우고 입혀서 키운 삼촌과 지금 막 등장해 순식간에 혼인 신고까지 해 버린 현규 형.
익숙하고 편안한 건 삼촌이지만 법적으로 현재 자신의 보호자는 현규 형이다.
그래서,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게 힘들었다.
둘 중 누굴 따라가야 하나 혼란스러워하며 눈을 굴리는 해준을, 현규와 해준 역시 흥미진진하는 얼굴로 응시했다. 그리고 동시에 누굴 따라갈 건지 빨리 정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은근한 압박을 가하는 그 시선에 수현은 움찔하며 눈치를 살피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두 가지 중 하나를 고르기 힘들다면 가장 중요한 한 가지 기준을 놓고 두 가지 대상을 단순하게 샘플링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