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160)

예전에 밥 주던 사람이냐? 지금 밥 주는 사람이냐?

그렇게 떠올린 순간 의외로 답은 쉽게 나왔다.

예상외로 빠르게 마음의 결정을 내린 수현은 슬그머니 현규의 옆으로 다가가 옷자락을 잡았다. 그러곤 다시 현규의 뒤에 찰싹 붙어 손을 흔들어 보였다.

“형, 가. 삼촌도.”

난 아직 퇴근 시간 안 됐으니까, 라고 수현이 해맑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에 현규가 놀란 얼굴로 수현을 내려다봤다.

수현의 빠른 결정에 당황하면서도 또 자신을 선택한 게 너무 기뻐 자꾸만 풀리려는 입매를 주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나름대로 숨기려고는 하지만 도저히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현규를 바라보던 해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그간 계속 마음에 걸리던 부분이 있었는데 그 부분이 한순간에 해소되었다.

그것만으로도 해준에게는 아주 만족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진원은 아니었다.

“야! 이수현?”

고요해진 복도를 다시 떠들썩하게 울리는 그 소리에 해준이 재빨리 진원을 나무란다.

“소리 그만 질러.”

“아니, 삼촌 저 자식 좀 봐! 저거, 저게…… 지금 우리 앞에서 할 짓이야?”

“못 할 건 뭐야? 이미 혼인 신고까지 했는데.”

“아니, 그 혼인 신고 자체가 말이 안 되잖아!”

“둘 다 성인이야. 절차도 방법도 엉망이지만 책임질 자신 있으니까 했겠지.”

정석적인 해준의 답변에 수현이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그런 자신은 전혀 없다. 아니, 그 전에 그런 책임을 져야 하는 건지도 몰랐다.

난 그냥 형이 하라고 해서 한 건데, 라고 수현이 눈만 껌뻑거리는 사이 해준이 너랑 더 말 섞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진원을 세게 만다.

“넌 빨리 가. 아, 현규야.”

“네.”

“수현이 추위 많이 타니까 겨울옷 잘 입혀. 그리고 잘 때 이불을 자주 걷어차니까 무거운 담요 덮게 하고. 이불은 구스 다운은 촉감하고 소리 싫어하니 가능하면 극세사 차렵으로 해. 그리고 옛날 밍크담요 좋아하니까 준비해 주고.”

지금 쓰는 건 오래됐을 거야, 라는 당부에 수현의 머리를 쓰다듬던 현규는 정색했다.

말 안 해도 내가 알아서 할 텐데 왜 굳이?

조금 불쾌한 기분이었지만 날이 추워지고 있는 건 사실이고 수현에 대한 정보는 미리 알아 두면 좋으니까, 라고 납득했다.

“네…… 따로 준비하죠.”

그다지 내키지 않아 하는 듯한 현규의 답에 해준이 슬쩍 말을 더한다.

“그리고 겨울에 감기 잘 걸리니 귤은 수시로 먹이고. 유자차랑 생강차도 준비해 놔. 자기 전에 먹여야 돼.”

마치 애 엄마가 애 맡길 때 목록을 작성하듯 세세한 주문에 현규의 표정이 좀 안 좋아진다.

“……애 맡기시나요?”

“응. 내가 28년 동안 키운 애니까 네가 더 잘 키워야겠지?”

내가 어떻게 키운 앤데, 라며 해준이 웃는데 그 눈빛이 묘하게 살벌하다. 온화한 광기가 묻어 있는 그 시선에 현규는 이번만은 순순히 대꾸했다.

“……잘 챙기겠습니다. 불편한 거 없이.”

“그래. 그래야 할 거야. 그리고 더 얘기할 게 있는데…… 그건 명단 만들어서 보내 줄게.”

“……명단이요?”

“수현이가 손을 안 대면 전혀 안 가는데 손을 대기 시작하면 진짜 손이 많이 가는 애라 알아야 할 게 많아. 엑셀로 정리해서 보내 줄게.”

뭘 엑셀까지, 라고 하려던 현규는 ‘안 받을 건 아니지?’라는 해준의 눈빛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얘기하자. 할 얘기가 아주 많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띤 채 돌아선 해준은 진원의 등을 세게 밀어 엘리베이터로 몰아갔다. 마치 말 안 듣는 강아지의 목줄을 잡아끄는 보호자 같은 그 모습에 수현은 겨우 안도했다.

“다시 안 오겠죠?”

“이 난리를 쳤는데 다신 안 오겠지.”

그렇게 말하며 슬슬 수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현규의 손길에 수현이 고개를 들어 현규를 바라본다.

기쁜 듯한 그 눈빛에 수현을 빤히 내려다보던 현규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진다. 다정하던 눈빛 역시 기묘하게 일렁이며 깊어지는 느낌에 수현은 흠칫하며 다시 현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또다시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하는 현규의 눈빛에 수현은 은근슬쩍 현규의 옷자락을 놓았다. 그러곤 슬금슬금 옆으로 피하려 하자 재빨리 수현의 목덜미를 잡아끈 현규가 빠르게 복도 안쪽의 공간으로 수현을 끌고 간다.

“어? 왜요?”

“……잠깐이면 돼.”

“그러니까 왜요?”

잠깐 뭘 하려고 하는데, 라는 수현의 질문을 무시한 채 재빨리 복도 가장 끝의 안쪽에 위치한 오픈 휴게실로 들어선 현규는 그대로 수현은 가볍게 안아 싱크대 위에 앉혔다.

얼결에 높은 곳의 공기를 맡게 된 수현이 얼떨떨한 채 현규를 내려다본 순간 입술이 겹쳤다.

천천히 입술을 벌리며 입 안으로 들어온 현규의 혀에 수현은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한 채 현규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곤 그 어깨를 세게 쥔 채 입술을 살짝 틀며 입 안을 헤집어 대는 혀의 감촉에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 어설프게 숨을 몰아쉬며 혀를 얽었다 풀었다 하던 수현은 잠시 후 떨어져 나간 입술에 길게 숨을 내뱉으며 현규를 내려다봤다. 그러자 다시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수현을 바라본 현규가 가볍게 입술을 겹친다.

가벼운 인사 같은 키스 후에 다시 입술이 떨어지자 수현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현규를 내려다본다. 그러길 잠시,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려던 수현이 슬쩍 주변을 돌아보더니 현규에게 작게 묻는다.

“이것도 소문내려고 하는 거예요?”

뜬금없는 그 질문에 현규가 그건 또 무슨 소리냐고 인상을 쓴 순간 수현이 눈짓으로 현규의 뒤를 가리킨다. 그 손짓에 천천히 뒤를 돌아본 현규는 순간 후다닥 하고 복도로 사라지는 그림자를 보곤 작게 “아.”라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렇다는 건지, 아니면 조금 짜증을 내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당황한 건지 전혀 알 수 없는 담담한 그 소리에 수현이 “네?”라고 반문한 순간 현규가 표정을 다시 가다듬고 더듬더듬 대꾸한다.

“……맞아. 다 내가 노린 거야…….”

“혼인 신고 한 것도 소문 다 나겠네요.”

“그렇겠지.”

그건 의도한 게 분명하기에 현규가 새초롬하게 답한 순간 싱크대 위에 있던 수현이 훌쩍 그 위에서 뛰어내린다. 그러곤 오른손에 든 쿠키 박스를 확인한다.

“팀장님 기다리실 테니 전 올라갈게요.”

“같이 가.”

“미팅 끝났어요?”

“대충…….”

안 끝났어도 이 분위기에 다시 미팅하겠냐 하며 현규가 수현의 뒤통수를 가볍게 툭 치자 수현이 머리를 긁적이며 현규와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해 간다.

그러다 문득 수현을 내려다본 현규는 웃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알 수 없는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현이 자신을 선택한 게 기쁜 반면, 여전히 눈치 없는 수현을 보니 슬슬 짜증이 일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기분은 좋은 모순적인 기분에 얼굴에는 이상한 표정이 흐르고 있었다.

솔직히 해준 형이 뭔가를 알아 버린 눈치라 그쪽도 신경을 써야 하는데 지금은 옆에 있는 녀석이 신경 쓰여 미칠 것 같았다.

번거롭고 귀찮고 신경 쓰이고 진짜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모든 게 너무 어린 시절 그대로였다.

* * *

수현을 처음 본 순간 현규의 감상은 간단했다.

얘는 무조건 육아 난도 최고 레벨이다.

그리고 그 첫인상은 틀리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의 이수현은 겉보기에는 세상에서 제일 얌전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눈에는 특유의 고집이 가득했다.

중3과 중1이라, 재학 중 몇 번 보지는 못했지만 말이 통할 듯 안 통해 사람 속 터지게 하는 수현을 보며 이런 동생이 없어서 진짜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그러면서 그 전까지는 데면데면했지만 말은 통하는 동복동생을 나름 아끼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만난 고3 시절, 두 번째의 첫인상은 좀 더 복잡했다.

여전히 이수현은 말을 안 들을 관상이었고 역시나 말을 안 들었다. 그러니까, 아예 귀를 닫고 남의 말을 듣지 않았다.

어린 시절 그대로 자란 것도 충격적인데 수현은 그보다 더 충격적인 두 가지 인상을 남겼다.

첫 번째는 이 지구상에 파파보이도 아닌 엉클보이가 존재한다는 것으로, 그리고 두 번째는 현규를 피해 다닌다는 것으로.

첫 번째는 사생활이니 알 바 아니지만 두 번째는 꽤 충격이 컸다. 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도망가고, 멀리서라도 눈이 마주치면 그대로 숨고, 가끔 지수의 집에 가 보면 삼촌 방에 들어가 칩거하고.

그쯤 되니 너무 약이 올라 무슨 일이 있어도 날 보게 만들겠다고 쫓아다니기 시작했는데, 그때 수현의 표정이 딱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한테 왜 이러시나요, 라고.

바로, 지금처럼.

* * *

“이게 뭔가요?”

바로 눈앞에 가득 쌓인 서류를 본 수현은 그게 뭔지 알았지만 문맹인 척하기로 했다.

삼촌이 이런 건 함부로 보는 게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아예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바로 옆에 앉아 있던 형이 웃으며 자신의 앞으로 서류를 끌어다 놨다.

어서 보라는 듯이.

하지만 수현은 시한폭탄이라도 된다는 듯 그 서류를 손으로 밀어냈다.

이런 건 지지다.

“읽어.”

“제가 갑자기 난독증이 생겨서요…….”

지난 두 달 내내 알파벳만 본 터라 한글을 까먹었다며 수현이 끝까지 서류에서 시선을 돌리자 다시 서류를 끌어온 현규가 수현의 손에 서류를 쥐여 준다.

“꼭 필요한 서류니 봐 둬.”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씀은 그렇지만 이건 지금 전혀 쓸모없을 것 같은데요.”

그러니 어서 폐기하라고 수현은 극구 서류 읽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현규는 끈질겼다.

“아니, 꼭 필요한 거야.”

“아니, 이건 혼전 계약서잖아요. 혼전 계약서는 혼인 신고 하기 전에 공증받아야 하는데 이미 늦었잖아요.”

퇴근 후에 꼭 갈 곳이 있다며 형이 끌고 온 곳이 로펌이 있는 건물일 때부터 조금 의심스럽기는 했다. 하지만 이 건물에는 로펌만 있는 게 아니고 유명한 프랜차이즈 식당과 디저트 카페도 있어서 설마 했다.

하지만 언제나 사람을 잡는 건 설마였다.

설마 혼인 신고 직후 로펌으로 끌고 와 혼전 계약서를 눈앞에 들이밀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여러모로 형은 의외성이 강한 인간이었다.

볼수록 신박하다.

“일이 좀 꼬이는 바람에 순서가 바뀌긴 했네. 그럼 혼후 계약서로 해 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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