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 처음 들어 보는 ‘혼후 계약서’라는 말에 수현은 그런 게 실제로 존재하냐는 듯 앞에 앉은 지긋한 나이의 변호사를 바라봤다.
자신의 아버지뻘 되어 보이는 나이에 유독 유들유들한 인상을 한 그에게, 수현은 좀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그가 빠르게 수현이 원하는 답을 내 준다.
“물론, 혼후 계약서도 있어. 흔히 이혼 계약서라고 하지. Postnups(Postnuptial Agreements).”
요즘 많이 대중화되었다는 변호사의 설명에 수현은 기함했다.
“그런 게 진짜 있다고요?”
“응. ‘세상에 이런 게 있어?’라고 생각하면 세계 어딘가에는 있다고 보면 돼.”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다 거기서 거기니까, 라는 변호사의 설명에 수현은 자신의 손에 들린 서류를 내려다봤다.
분명 서류의 가장 상단에는 ‘혼전 계약서’라고 명시돼 있지만 이건 곧 ‘혼후 계약서’로 바뀔 참이었다.
그러니까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현규 형이 절대 그렇게 두지 않을 기세였다.
“……다 읽어야 돼요?”
“응.”
“너무 많은데요…….”
A4용지에 10포인트 글자로 대충 30페이지는 되어 보이는 분량에 갑자기 눈에 급격한 피로가 몰려왔다.
겨우 텍스트에서 해방됐다고 좋아했더니 내용도 알기 어려운 게 추가됐다. 솔직히 말하자면 법적 용어들은 너무 추상적이고 범위가 넓은 데다 알아듣기도 힘들어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지 않아도 몇 달 전쯤 법무팀 쪽에 왜 쉬운 단어 두고 이렇게 복잡하게 계약서나 공문을 보내냐고 따졌더니, 그래야 사람들이 못 알아듣고 대충 계약해서 그런 거라고 했다. 그리고 덤으로 나중에 뒤집어씌우기도 좋다고.
그래서 그때 깨달았다. 이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인간들이 변호사들이라는 걸.
동시에 이 인간들이 하는 일 대부분은 번역과 별다르지 않다는 것 역시 깨달았다.
“갑자기 너무 피곤한데요…….”
이 많은 글자를 보기에는 눈도 아프고 졸립다고 수현이 엄살을 부리자 현규가 아기를 달래듯 토닥거린다.
“그거 다 읽으면 고기 사 줄게.”
“무슨 고기요?”
“뭐 먹고 싶은데?”
“……삼겹살이요.”
“사 줄게.”
돼지 농가를 통으로 사 줄 수도 있으니 빨리 읽기나 하라는 현규의 압박에 결국 수현은 첫 페이지를 넘겨 종이 위를 빼곡이 채운 글자들을 하나씩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계약서에 쓰인 용어나 단어들은 그렇게 복잡하거나 추상적이지 않았다.
한자어나 법적 용어들을 남발하지 않고 간단명료하게 직관적인 표현과 단어들로 작성된 계약서는 공대생들이 보기에도 무리 없이, 굉장히 잘 쓰인 계약서였다.
그래, 문장은 잘 썼다.
그 내용이 문제일 뿐.
* * *
“저, 이거…… 계약서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1시간에 걸쳐 겨우 계약서를 다 읽었을 때 수현의 머릿속에 남은 건 물음표뿐이었다.
계약서가, 굉장히 이상했다.
“어디가?”
“이 계약서의 대전제가 이혼 소송인데 이혼 소송을 먼저 제기하는 사람이 특유 재산을 포함한 전 재산을 넘긴다는 조항은 좀 이상하잖아요. 거기다, 합의 이혼은 없다는 것도…….”
이런 계약서는 보통 원만하게 합의 이혼을 진행하기 위해 작성하는 건데 합의 이혼은 불가하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어린 시절 조기 교육의 영향으로 쓸데없는 법적 지식은 많은 수현의 상식적인 지적에 현규가 깔끔하게 그 조항을 설명해 준다.
“이혼을 하고 싶다면 이혼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하니까.”
“아니, 그런데 또 바람을 피운 배우자가 재산의 50%를 넘긴다는 조항이 있잖아요. 보통은 바람을 피우면 그 배우자가 소를 제기하는데 소를 제기한 배우자는 본인 재산을 100% 내놓고 상대의 재산 50%를 가져간다니 이상하잖아요.”
“어떻든, 네가 손해 볼 건 없어 보이는데?”
바람을 피워도 내가 피우지, 네가 피우겠냐? 그리고 재산이 많아도 내가 많지, 네가 많겠냐?
딱 그런 태도였다, 현규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어 놓았으면서 태도는 또 너무 당당해 어이가 없었지만 또 너무 맞는 말이긴 해 반박할 수 없었다.
자신의 자산이라고는 오피스텔 보증금과 할아버지께서 증여한 주식뿐이고 현규 형은 이 회사 최대 주주임과 동시에 이미 증여받은 건물과 현금도 상당하다.
그러니까 현규 형의 말대로 이건 자신에게 완벽하게 유리한 계약서였다.
예를 들어 형이 바람을 피워 자신이 이혼 소송을 제기하더라도 자신의 전 재산을 형에게 넘기는 대신 몇백억에 달하는 형의 주식을 50% 가져올 수 있다. 그 반대의 경우라 해도 현규 형의 재산 100%를 가져올 수 있다. 자신의 재산은 50%로 나누고.
그렇게 보면 너무 남는 장사인데…… 그게 찜찜하다.
삼촌하고 큰형이 항상 한쪽에게 과하게 유리한 계약은 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일방적으로 한쪽에 유리한 계약은 반드시 어딘가에 함정이 있는 거고, 당장은 내게 유리한 조항이 나중에 내 발목을 잡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기, 이건 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어째서?”
“아버지가 아무 서류에나 사인하지 말라고 했어요.”
말도 안 되는 그 변명에 현규 형이 싱긋 웃는다. 점심시간에 혼인 신고서에 아무 저항 없이 사인한 손목은 누구 손모가진데, 하고 묻는 것 같은 현규 형의 얼굴에 곧장 말을 돌렸다.
“그건 제가 형을 너무 믿어서 그런 거고요.”
“그래, 부부는 서로 믿어야지. 그러니까 믿고 사인해.”
“지금은 안 믿어요.”
하루에 두 번 당할 정도로 학습 능력이 없지는 않다고 딱 잘라 전하자 현규가 탄사를 흘린다.
“그래, 그 정도 머리는 있어야지.”
뭔가 눈앞에서 욕을 먹은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일단은 칭찬 같아 넘어갔다.
“일단 제 고문 변호사한테도 확인받아 볼게요.”
“그래, 변호사 검수는 받아야지.”
그래야 나중에 잡음이 없으니 마음껏 하라는 태도였다. 과할 정도로 여유롭고 너그러운 현규의 태도에 수현은 불안한 듯 현규를 바라봤다.
계약 내용은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게 맞지만 현규 형이 작성한 계약서가 자신에게 너무 유리한 것도 이상한데 현규 형이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나오는 건 더더욱 이상했다.
블러핑인가 하려고 해도, 그런 느낌이 아니다. 진짜 이 계약서를 거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바로 그런 게 불안한 거다.
사람을 잘 의심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제부터 현규 형에게 하도 휘둘리다 보니 이젠 현규 형이 뭔가를 하려 하면 의심부터 하게 된다. 방금도 이 사무실까지 오는데 이번엔 진짜 대출받으러 가는 건가, 하고 두근두근했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어쩐지 자신을 연대 보증인으로 세울 것 같았다. 당연히 형에게는 연대 보증인도 필요 없겠지만 그냥 그런 예감이 들었다.
돈이 통장에 몇백억이 쌓여 있어도 이 형이라면 날 사금융으로 끌고 가 강제로 대출받게 하고 본인이 연대 보증을 서거나, 혹은 본인이 받고 날 연대 보증 세울 것 같다.
이상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건 어떤 증거가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의 육감이나 눈치 같은 거였다.
“그럼 네 고문 변호사와 상의한 뒤 수정할 부분 있으면 알려 줘. 더 추가할 부분도.”
“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볼일 다 봤다는 듯 현규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자 그간 앞에 앉아 느긋하게 두 사람을 관찰하던 변호사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흘린다.
“어차피 야근 중이니 늦게 찾아오는 건 상관없는데, 사고를 쳐도 좀 적당히 치지 그랬어? 너희 아버지는 점심시간부터 계속 전화해서 혼인 취소 어떻게 하냐, 왜 못 하냐, 그럼 혼인 무효 소송 걸어라 난리고 이정현은 너희 아버지 엿 먹였다고 신나서 여기저기 전화 돌리는 중이던데…… 진짜 괜찮겠냐, 너희?”
걱정을 하는 건지 재밌어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목소리로 갑자기 아버지 이름을 거론한 변호사를, 수현은 놀라 바라봤다.
“저희 아버지도 아세요?”
“우리 다 고등학교 동창이야. 넌 아주 아기 때 한 번 봤는데 나 기억 못 하나 보네?”
“……제가요?”
“응. 2살 때쯤이던가?”
그때 되게 작았다며 26년 전을 추억하는 남자의 아련한 얼굴에서 이 사람은 아버지의 친구가 확실하다고 판단 내렸다.
2살 때 보고 자기를 기억하냐고 묻는, 자의식 과잉이 딱 아버지 친구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세 영감탱이의 친구가 확실하다.
“그 고집불통 영감들 때문에 너희가 고생하네. 어쩌다 그 집 아들들로 태어나서는……. 그러고 보면 그 녀석들도 대단하긴 해. 40년 동안 한결같이 사이 안 좋은 것도 대단한데 이젠 자식들 결혼 갖고 저 난리니.”
철들려면 멀었어, 라고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 변호사님은 문제의 세 영감탱이를 진짜 잘 아는 듯 아주 친숙하게 부르고 있었다. 이분은 진짜 아버지와 그 친구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본 적도 없고 존재하는지도 확신할 수 없던 유니콘과 같은 아버지 친구의 등장에 재빨리 그간 가장 궁금했던 바를 물었다.
“혹시, 그 세 분이 왜 그렇게 사이가 안 좋은 건지 아세요?”
뭐 고등학교 시절 치정 싸움이나 학교 폭력, 혹은 성적 라이벌과 같은 사연이라도 있었던 거냐고 진심을 다해 묻자 변호사님이 그딴 게 있겠냐, 라는 얼굴로 웃는다.
“그냥 성격 문제야. 어떻게 보면 자기혐오 같은 것일 수도 있고. 셋 다 자아가 비대하고 어딜 가든 본인들이 대장 노릇을 해야 하는 타입인데, 다른 놈이 있으면 그걸 못 하잖아.”
거기다 스타일은 또 달라 항상 의견이 충돌했으니 사이가 좋을 수가 없다는 변호사님의 설명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서 국장님하고 강 대표님도 사이 안 좋으신 거예요?”
“응. 안 좋아. 걔네도 서로 싫어해.”
서민재가 욕심이 많아서 그간 강민혁하고도 많이 부딪쳤으니까, 라며 또 한번 변호사님은 그 셋은 절대 한 공간에서 공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수현도 그 사실에는 절대 동의하는 바였다.
떨어트려 놔도 전화로 그 난리를 치는데 한 공간에 둔다면 그건 다른 사람들에게 못 할 짓이다.
“그런데 왜 현규 형하고 주영이 결혼은 진행하려고 하는 건데요?”
자신이 얼결에 유부남이 되어 버린 비극적 상황의 시발점에 대해 수현은 순수한 의문을 던졌다.
아버지와 대표님, 그리고 아버지와 서 국장님이 사이가 안 좋은 건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으니 전혀 이상하지 않았고 그래서 삼촌과 주영이 결혼이 파투 난 것에도 별 의문을 갖지 않았는데 갑자기 현규 형과 주영이의 결혼을 진행한 건 이상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건만 보거나 서 국장님과 대표님 사이에 어떤 거래가 있어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방금 변호사님의 증언에 따르면 그건 절대 아닐 듯했다.
그건 자신이 어른들을 과대평가한 거였다.
변호사님의 표현대로 세 영감탱이들이 서로를 싫어하는 게 비대한 자아를 가진 스스로에 대한 자기혐오 같은 거라면 셋은 같은 유형의 인간이다.
그렇다면 부친을 포함한 저 세 명의 영감탱이들은 인생을 본인 기분과 감정으로만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목표가 같다 해도 쉽게 손을 잡지 않는다. 변호사님의 표현대로 그들의 비대한 자아가 상대와의 거래와 협력을 방해한다. 저런 타입들은 잘되면 혼자만 잘돼야 하고 망하면 다 같이 망해야 하는 타입이다.
28년간 아버지를 관찰해 얻은 객관적인 결론이었다, 그건.
그렇다면 서 국장님과 강 대표님 역시 손을 잡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그들의 단 하나뿐인 친구분에게 이유를 묻자 변호사님이 싱긋 웃는다.
“그게 궁금했어?”
“네.”
“세 사람 성격을 잘 안다면 금방 눈치챘을 텐데…….”
모르는 걸 보니 눈치는 좀 없구나, 라는 말은 차마 초면에 가까운 구면이라 내뱉지 못한 채, 변호사가 잠시 후 시원하게 답을 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