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둘이 갑자기 사돈을 맺기로 한 이유는 아주 간단해. 강민혁은 서재민보다 이정현을 더 싫어하고 서재민은 강민혁보다 이정현을 더 싫어하니까, 야.”
그러니까 결국 서 국장님과 강 대표님은 두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아버지를 엿 먹이기 위해 아들들 결혼을 진행했다는 의미였다.
말 그대로 오월동주다.
그 미스터리가 풀리는 순간 수현은 탄식했다.
진짜 가지가지 한다.
“자, 그럼 이제 가 봐야지? 서류 확인하고 수정할 거 있으면 연락해.”
“네…….”
변호사님의 인사에 자리에서 일어서며 인사를 건네자, 곧 변호사님이 명함을 하나 건넨다.
“이건 내 명함. 이젠 내가 네 일도 같이 봐야 하니까 일 생기면 언제든 연락해. 그리고 어쨌든, 결혼 축하한다.”
“아…….”
그 말에 그제야 수현은 ‘나 오늘 결혼했지.’라고 떠올렸다. 오후에 하도 많은 일이 있어, 혼전 계약서니 혼후 계약서니 이혼이니, 대화를 하면서도 현실감이 없어 까먹고 있었는데 결혼을 하긴 했다.
“식 올릴 때 연락해. 결혼 선물 크게 해 줄 테니.”
그 전에 이혼부터 해야 하는데요, 그런데 그 이혼을 못 할 것 같아요, 라는 모순적인 말을 곱씹으며 수현은 손에 든 봉투를 내려다봤다.
어쩐지 이 혼후 계약서 내용으로 봐서는 결혼은 쉬웠어도 이혼은 쉽지 않을 느낌이었다.
어쩐지 또 현규에게 낚인 기분에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무실을 나온 수현은 한가한 복도를 지나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퇴근 시간도 훌쩍 지나 조용한 주차장 안에서 차에 올라타던 수현은 서류를 한 번 내려다보다, 다시 고개를 들어 현규를 바라봤다.
그러곤 물었다.
“낮에 다 해결 방법이 있다고 한 게 이거였어요?”
점심시간에 얼결에 혼인 신고를 하곤 이거 장난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고 했을 때, 형이 다 방법이 있다고 한 게 떠올라 묻자 막 차에 타던 현규 형이 무뚝뚝하게 대꾸한다.
“아니.”
“그럼요?”
“그건 다른 방법이 있어. 혼전, 아니 혼후 계약서는 다른 의미로 필요한 거고.”
보통 혼후 계약서는 이혼 시 감정적으로나 법적으로 서로 복잡해지는 상황을 막기 위해 필요한 건데…… 과연 이 계약서가 분쟁을 막아 줄 수 있을까, 라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라고 답할 자신이 있었다.
그냥 대충 읽어 본 것만으로도 이 계약서엔 너무 터무니없는 조항들이 많아 이게 이혼을 원활하게 하려는 건지 전쟁터로 만들려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형과는 당연히 곧 이혼 절차를 거치게 될 거라 그걸 대비해서라도 혼전 계약서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 계약서를 보니 이혼할 생각이 싹 사라져 버렸다.
불륜이나 여러 가지 경우에 대한 세부 사항들이 있긴 하지만 일단 이혼 소송을 하는 쪽이 전 재산을 내놓아야 한다는 게 너무 큰 독소 조항이었다.
아니, 사실 그것만 이상한 게 아니다. 친권과 양육권 문제에 대해서 이런저런 조건이나 조항들이 엄청 많이 있었는데 솔직히 그걸 보고 있자니 소름이 끼쳤다.
애도 없고, 또 애가 생길 일도 없겠지만 그에 관한 조항들이 너무 구체적이고 또 말도 안 되는 것들이 많아 이 짓을 하느니 그냥 참고 산다, 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혼율을 줄이려는 게 목적이라면 성공한 계약서다.
하지만 이혼 과정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한 계약서라면 0점짜리다.
대체 이 혼후 계약서의 목적은 뭘까, 라고 진지하게 고민하던 사이 느긋하게 차를 몰던 형이 가볍게 말을 던진다.
“고기 사 줄게. 오늘 힘들었을 테니 고기 먹고 집에 가서 쉬어.”
“네.”
“내일은 쇼핑하자. 네 옷도 사고 나간 김에 담요도 사고.”
내심 아까 해준의 말이 신경 쓰였는지 현규가 갑자기 쇼핑 타령을 하자 수현이 좀 귀찮다는 얼굴을 한다.
“삼촌이 쓸데없이 걱정이 많은 거예요.”
“그래도 이불은 바꿔야지. 너 이불 자주 걷어차는 건 사실이야.”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아직 그렇게 춥지는 않아서 괜찮아요.”
“추워서 내가 안고 잔 거야.”
“……그래서 형이 누르기를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제, 오늘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자신을 내리누르고 있어 불편했는데 혹시 그 이유가 자신이 자꾸 이불을 걷어차서 그런 거냐고 묻자 현규가 그럼 뭐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한다.
“아…….”
잠버릇이 얌전한 편은 아니라 아침에는 이불이 사라져 있기 일쑤인데 어쩐지 이틀 내내 이불이 곱게 덮여 있다 했다.
정확히는 내가 덮은 게 아니라 형이 덮어 준 거겠지만.
“이불 골라 보고 정 안 되면 싸개 이불이라도 사야지. ……다행히, 잘 어울리겠네.”
애벌레 같아 웃기긴 하겠지만, 이라며 수현을 한번 쭉 훑어본 현규가 그 모습을 상상한 듯 웃는다. 하지만 수현은 그건 안 될 거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거 못 써요. 제가 답답해서 못 자요.”
“써 봤어?”
“삼촌이 벌써 사 줬었죠. 침낭 같은 이불.”
그러고 보니 자신의 안 좋은 버릇 고치려고 삼촌이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긴 했다. 그중에 효과를 본 게 별로 없어서 그렇지.
“네 인생에 해준 형이 없는 부분이 없네.”
“삼촌이 절 키웠으니까요.”
“그래도 보통은 이 정도가 아닐 텐데?”
“삼촌한테 제가 특별하긴 해요. 굳이 말하자면 첫아이 같은?”
삼촌이 가장 외롭고 힘들 때 자신이 태어나 겨우 마음을 추슬렀고 자신은 태어난 순간부터 삼촌이 키운 거나 마찬가지라 자신과 삼촌의 관계는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결혼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쨌든 삼촌과 자신 사이에 쉽게 끊어 낼 수 없는 깊은 유대감이 있는 건 사실이다. 주영의 표현대로 어떨 때는 모자간 같기도 하고 어떨 때는 보호자와 반려견 같기도 한.
보호자라고 한다면 확실히 삼촌도 극성이긴 하다고 문득 과거의 기억들을 더듬어 보는데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울려왔다.
더 무음으로 해 뒀다간 진짜 받아야 할 연락을 못 받을 것 같아, 볼륨을 줄여 놓은 휴대폰을 꺼내 확인하자, 고등학교 친구인 태형이다.
[너 현규 형이랑 혼인 신고 했다며?]
대뜸 나온 그 질문에 저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
“……소문 진짜 빠르네요.”
“왜?”
“우리 혼인 신고 한 거 소문 다 났나 봐요.”
아버지가 여기저기 떠들어 댔으니 금세 퍼질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너무 빠르다.
아마 지금도 여기저기 퍼져 나가고 있을 텐데…… 진짜 귀찮게 됐다. 그냥 착신 거부를 해야 하나 고민하며 태형이에게 보낼 문자를 적는데 그사이 또 다른 문자가 도착했다.
[너 진짜 혼인 신고 했어?]
앞의 문장에 부사만 하나 더 붙은 메시지의 발신인은 주영이었다.
삼촌에게 이제야 소식을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일단 태형이에게 혼인 신고 한 건 맞지만 너희랑은 상관없는 일이니 술 마시자고 부르지 말라고 메시지를 보낸 뒤 곧 주영이에게도 메시지를 발송했다.
[응.]
이라고.
짤막하지만 수많은 의미를 압축한 그 메시지를 발송한 직후 여지없이 벨 소리가 울려 대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현규 형이 이쪽을 힐끔 돌아본다. 누구냐고 묻는 그 시선에 사실대로 답했다.
“주영이요.”
“받아.”
어차피 주영이와도 한 번 제대로 대화를 하긴 해야 해 곧장 통화 버튼을 누르자 아니나 다를까 다급한 음성이 터져 나온다.
- 너, 진짜 혼인 신고 한 거야?
보통 사람이 너무 당황해 현실 부정을 하고 싶을 때 했던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게 되는데, 지금 주영이 딱 그런 상태였다.
제발 아니라고 해 달라는 듯 방금 보낸 메시지 그대로를 말로 반복하는 주영에게 수현 역시 방금 보낸 답을 그대로 말로 해 주었다.
“응.”
- 그래도 되는 거야?
주영을 안 뒤로 처음으로 듣는 주영의 고함에 될 리가 있겠냐, 라고 답해 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주영이가 기절할 것 같아 태연하게 어쩔 수 없다는 듯 반응했다.
“안 되지만 이미 접수했으니까 어쩔 수 없지.”
- 아니, 그래도 어쩌다…….
“그러게,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 해준 형한테 대충 상황은 전해 들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혼인 신고는 아니지.
이쪽 사정 다 아는 주영도 도저히 혼인 신고까지는 납득이 가지 않는지 계속해서 흥분상태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이해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하여간 이미 사고는 쳤으니까 이젠 뒷일을 도모해야지.”
지난 일을 반성하고 분석해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하는 것엔 분명 의미가 있지만, 그렇다고 이미 끝난 일에 매달려 내가 왜 그랬을까, 만 반복하는 것처럼 영양가 없는 짓도 없다.
일단 일을 벌였으면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잊고, 그 일을 수습하는 게 우선이니 그건 이제 잊으라고 했지만 주영은 그럴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 현규 형은 뭐라고 해?
“……응?”
- 혼인 취소할 수 있대?
“어…… 못 할……걸……?”
최소한 자신이 알기로는 혼인 취소는 아주 복잡한 소송을 통하지 않는 한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안 되지 않을까, 라고 자신 없게 대꾸하자 주영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진다.
- 그럼 어쩌게?
“그러게.”
- 혼인 취소가 안 되면 이제 이혼밖에 방법이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