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서 혼후 계약서 받아 오긴 했어.”
- ……혼후 계약서?
“응.”
- 그런데 현규 형하고 네가 왜 그걸 써?
“응?”
- 어차피 각자 결혼 피하려고 만나다 혼인 신고까지 한 거고 그래서 이혼을 해야 한다면, 그냥 합의 이혼 하면 되잖아. 당연히 계약서도 필요 없고.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렇다.
이 결혼 자체가 눈속임 용이니 합의하에 무난하게 헤어질 수 있는데 왜 굳이 이런 분란의 씨앗을 만들까? 그리고 굳이 쓸 거라면 그냥 간단하게 서로의 필요에 의해 한 결혼이니 필요가 없어졌을 때 서로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이혼에 동의한다, 라는 항목만 있으면 되는데 뭐가 그렇게 구구절절 많은 걸까?
특히나 친권과 양육권 조항이 그렇게 긴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주영이 던져 준 아주 단순한 진실 앞에서 수현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탄식했다.
그제부터 현규 형에게 끌려다니며 이리저리 휘둘리느라 너무 시야가 좁아졌다.
이 세상에서 이혼 계약서가 절대 필요 없는 유일한 부부를 말하라면 그건 현규 형과 자신이다.
주영의 지적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옆을 돌아보자 현규 형이 그 시선을 의식했는지 이쪽을 힐끔거린다.
그리고 잠시 후 아주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묻는다.
“그 건방진 눈빛은 뭐지?”
“……형하고 저는 합의 이혼하면 된다는데요.”
“누가 그래?”
“주영이가요.”
순간 형이 침묵하더니, 잠시 후 작게 중얼거린다.
“……서주영 똑똑하네.”
놀리는 게 분명한 그 말투에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고 원망스레 형을 바라보자 형이 웃으며 말을 돌린다.
“농담이야. 계약서라는 건 원래 살다 보면 사람 마음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 서로의 조건을 명시하고 그 조건을 지킬 걸 약속하는 문서야. 우리야말로 완벽한 비즈니스 관계니만큼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법적 장치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 당장은 자기가 급하니 혼인 신고서에 사인했다 다음 주쯤에는 이혼하고 싶다고 할 수도 있으니까.”
“우리는 이혼을 해야 하는 입장인데요.”
아니, 이혼 전에 애초에 혼인 신고를 하지 말았어야 하는 관계라고 그 부분을 지적하자 현규 형이 재빨리 말을 바꾼다.
“……그러니까 이혼해야 하는데 이혼하기 싫다고 버틸 수도 있다는 거지.”
그 말은 꽤 그럴듯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한 가지 모순점이 발생한다.
“이 혼후 계약서 내용은 이혼을 못 하게 하는 내용 같은데요…….”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만약을 위한 안전장치를 다 넣어 네가 그렇게 느끼는 것뿐이야. 통상적인 이혼 계약서의 포맷을 따른 거니까.”
그러니까 결국 네 기분 탓이야, 라는 형의 말에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변호사에게 작성하게 했으니 당연히 우리가 사기를 치는 중이라고는 말하기 힘들었을 테고, 표준 계약서를 기본으로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이혼 계약서에도 표준 계약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저희 변호사님께 확인해 볼게요.”
“얼마든지.”
“그렇대.”
현규 형에게서 설명을 들은 직후 주영에게 들었냐고 묻자 주영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 작게 속삭인다.
- 현규 형 같이 있었어?
“응.”
빠른 수긍에 주영이 원망하는 듯한 말을 내뱉는다. 낭패라는 투였다.
- 그럼 말을 하지. 끊어.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왜? 할 말 있으면 해.”
우리 차 안이야, 라고 주영을 안심시켜 주려 했지만 그 말에 주영이 더 질색한다.
- 아냐! 됐어! 물어볼 게 있었는데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뭔데?”
- 나중에. 그럼, 끊을게.
무서운 거라도 본 듯 재빨리 끊긴 전화가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원래도 주영이 현규 형을 무서워한다는 걸 알았던 탓에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어쩌면 현규 형 욕을 하려던 걸 수도 있으니까.
나중에 시간 되면 보자고 주영이에게 메시지를 보낸 뒤 알림창을 확인하는데 그새 창이 꽉 차 있다.
내려도 내려도 끝이 없다.
역시나, 그놈들이다.
다들 중·고등학교 동창들이라 현규 형을 알고 있다 보니 이 상황에 경악하는 동시에 그 과정이 궁금해 미치려고 하고 있었다.
그 녀석들의 떨림과 흥분이 영상도 소리도 아닌 텍스트를 통해 생생히 전해지고 있었다.
징그럽다.
“애들 신났네요. 형하고 어떻게 사귄 건지 썰 풀래요.”
말과 동시에 지금 막 급조된 동창방에서 온 초대에 수락 버튼을 누르자 대략 자신을 포함해 스물세 명가량이 모여 있는 채팅방이 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채팅창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이 들어오길 기다렸다는 듯 터진 봇물처럼 쏟아지는 질문에 멀미가 날 것 같았다.
형하고 어떻게 사귀게 된 거냐? 이게 말이 되냐? 대체 현규 형은 너한테 무슨 약점을 잡혔길래 너랑 혼인 신고를 한 거냐? 현규 형 미국에서 머리에 총 맞고 왔냐? 혹시 현규 형 실연당해 막 살려고 하는 거냐? 등등.
이 자식들 말만 많은 줄 알았는데 문자 치는 속도도 더럽게 빠르다.
차 안에서 봐서인지 진짜 멀미할 것 같았다.
“진짜, 정신없어…….”
한 번에 하나씩, 어차피 중복되는 질문도 많으니 한 사람이 정리해서 올려 주면 좋을 텐데 다들 성질도 급해서 남의 글은 보지도 않고 의식의 흐름대로 떠들어 대고 있었다.
글자만 보이는 건데도 마치 그 녀석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떠들어 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도저히 무슨 글부터 봐야 하는지 알 수 없어 그냥 퇴장해 버릴까, 고민했지만 이 녀석들 성격에 퇴장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시 초대해 그 방에 넣을 거다. 그렇다고 알림을 해제하면 전화를 할 거고 착신 거부를 하면 번호를 바꿔 가며 연락할 게 뻔했다.
차라리 아예 휴대폰을 꺼 버리면 되는데 그럼 오늘 오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길게 한숨을 내쉬자 형이 묻는다.
“왜?”
“애들이 너무 시끄러워서요.”
“그럼, 휴대폰 꺼.”
“새 프로그램 오픈할 거라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요.”
월요일까지는 괜찮을 것 같지만 긴급 연락이 올 수도 있으니 휴대폰을 끌 수는 없다.
“그럼 어쩔 수 없네.”
감당할 수밖에, 라는 말에 빠르게 수긍했다.
“그렇죠.”
쉽게 포기할 만한 녀석들도 아니고 일단 머릿수로 밀리는 탓에 정신없이 올라가는 채팅창을 무시한 채 딱 필요한 내용만 적어 넣었다.
[오늘 혼인 신고 완료. 식은 예정 없음. 썰은 다음 모임 때. 이상 보고 끝.]
나중에 다 얘기할 테니 더 묻지 말라는 메시지에 다시 채팅방이 난리가 난다.
역시 내용은 위와 마찬가지였다.
대체 현규 형의 무슨 약점을 잡은 거냐는.
다시 정신없이 올라가는 글들을 대충 읽으며 분위기만 파악하고 있는데 문득 그 분위기와 안 어울리는 심각한 글이 하나 올라온다.
[그런데 너 삼촌하고는? 파혼한 거야?]
와글와글하던 채팅방이 그 한 줄로 초토화됐다.
찬물을 끼얹은 것 같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그 분위기에 솔직히 자신도 굉장히 놀랐다.
아직도 그걸 믿는 녀석이 있을 줄 몰랐다.
“와…… 아직도 삼촌하고 저랑 결혼할 거라고 믿는 애들이 있었네요.”
“네가 지긋지긋할 정도로 떠들고 다녔으니까.”
“……그렇게 떠들고 다녔나요, 제가?”
“전교생이 다 알 정도로.”
사실 그걸 의도하고 일부러 그랬으니까 이상할 건 없다.
“뭐, 목적은 이뤘으니 됐네요.”
“……목적?”
“아, 그게…….”
이걸 형에게 말해도 되나, 하고 잠시 고민하긴 했지만…… 워낙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또 형은 알아도 될 것 같았다.
“그게 사실은…….”
그렇게 된 과정을 설명하려던 중 단골집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형, 저기예요.”
건물 안쪽에 주차장이 있다고 하자 천천히 그쪽으로 차를 몬 형이 구석 자리에 차를 멈춘다. 그리고 시동을 끈 순간 차 문을 열자 맛있는 삼겹살 냄새가 진하게 퍼져 왔다.
그러지 않아도 배가 고팠는데 정신을 아찔하게 하는 그 냄새에 서둘러 차에서 내려선 수현은 야외 테이블 쪽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그러곤 자리를 잡자마자 메뉴판을 손에 들었다.
“삼겹살 4인분하고 김치찌개랑…… 소주도 마셔도 돼요?”
“안 돼.”
“결혼기념일이잖아요.”
주말이라고 하면 안 먹힐 것 같아서 말을 바꾸자 현규 형이 조금 마음이 흔들린 듯 메뉴판을 슬쩍 내려다본다.
하지만…….
“……차 가져와서 안 돼.”
“저만 마시면 되죠.”
운전은 형이 하시고, 라고 방긋 웃자 형도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하지만 그 미소의 의미는 제 미소의 의미와는 전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