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160)

술도 먹는 음식 중 하나라 그에 어울리는 음식이 있을 때 마시는 거라는 게 수현의 지론이었다. 그러니 굳이 술만 마시지는 않는다. 이틀 전처럼 아예 정신이 집 나가지 않는 이상.

“얘기하다 보니 궁금해진 건데, 형은 좋아하는 사람 없었어요? 그러니까, 그냥 연애 상대 말고 진짜 이 사람하고는 결혼해도 좋다, 할 정도로 좋아한 사람이요.”

조금 진지해진 질문과 함께 잘 익은 고기를 보곤 재빨리 쌈을 싸기 시작했다. 맛있게 잘 구워진 고기의 상태에 감탄하며 정성껏 쌈을 싸는 사이 형이 조용히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있었어. 그때는 몰랐지만.”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눈을 쌈을 입에 문 채 눈을 껌뻑이자 형이 다시 나지막하게 말을 이어 간다.

“아주 나중에 알았거든. 아, 내가 얘를 좋아했구나, 하고.”

씁쓸하게 웃으며 고기를 집는 현규를 보며 겨우 쌈을 넘긴 수현이 되묻는다.

“어떻게 그걸 몰라요?”

“그때는 괜히 거슬리고 신경 쓰여서 싫었거든.”

거기다 진짜 더럽게 말을 안 듣게 생겨서, 라는 말은 뺀 채 현규 역시 빠르게 손을 움직이자 수현은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 신경 쓰인 순간 끝난 건데…….”

그 말에 현규가 웃는다.

“네가 그런 것도 알아?”

“삼촌이 그랬어요. 처음 봤을 때부터 주영이가 신경 쓰였다고.”

“……그래?”

“네. 그러면서 신경 쓰이면 끝이니 신경 쓰이는 사람 생기면 꼭 잡으라고 했어요.”

“그런 사람이 있었어?”

혹시나 하며 묻는 말에 수현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갸웃하다 마늘을 집으며 고개를 내젓는다.

“하도 많아서…….”

그냥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이 신경 쓰이고 귀찮다는 그 답에 현규가 이번엔 그냥 웃고 만다.

“그래서 넌 글러 먹었다는 거야.”

“이미 결혼했는데요, 뭐.”

본의는 아니지만 어쨌든 혼인 신고까지 했으니 글러 먹었어도 알 게 뭐냐고 쿨하게 넘기고 다시 쌈을 싸기 시작했다.

뇌기 이진법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단순한 그 모습에 현규는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잔을 비웠다.

“그래서, 그 스토커는 어떻게 됐어?”

“아…… 그 집에서는 단념했는데 그 사람은 포기를 못 하고 갑자기 나타나서 절 공격하길래 일부러 당해 주다 경찰 불러서 미성년자 폭행으로 입건시켰어요.”

“폭행?”

“많이 다친 건 아닌데 제가 미성년자인 데다 그 사람이 칼 같은 걸 들고 있어서 특수 폭행에 살인 미수까지 적용됐어요. 우리 집 바로 앞이라 CCTV 다 찍히고 목격자도 많아서 곧장 입건됐는데 합의해 주는 조건으로 정신과 치료받고, 다시는 삼촌한테 접근하지 않는다고 각서 받았어요.”

지금에야 웃으면서 말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건 꽤 큰일이었다. 경찰과 구급차까지 출동했으니까.

그건 현규의 생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렇게 큰일을 왜 내가 몰랐지?”

어쨌든 지수랑 내가 친구였는데, 라는 현규의 의문에 수현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려 준다.

“그 사건이 겨울 방학 중에 터져서 소문이 많이 안 돌았을 거예요. 사실, 듣기 좋은 사건도 아니라 쉬쉬하기도 했고요.”

겨울 방학 때라면 막 대학 입학 준비로 한창 바쁠 때였으니 그랬을 수도 있었겠다고 현규도 납득했다. 그 시기에는 친구들도 각자 대학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고 여기저기 여행이니 면허 시험이니 바빠 오히려 더 만날 시간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형…….”

“왜?”

“소주 한 잔 주시면 안 돼요?”

“응, 안 돼.”

“한 잔만요.”

“꿈도 꾸지 마. 운전이나 해.”

“대리 부르면 되잖아요.”

“대리를 부를 필요 없지, 네가 있으니까. 이 대리.”

그러니 잔머리 굴리지 말라며 싱긋 웃은 현규는 바로 수현의 눈앞에서 깔끔하게 잔을 비웠다.

그게 참 얄밉기는 했지만 바로 이틀 전 밤 기억을 전부 날린 중죄를 지었기에 수현은 이번만은 조용히 현규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대신 조용히 고기를 구웠다.

어쩐지 오늘따라 유독 기분이 좋은 현규가 무려 소주 일곱 병을 비울 때까지.

* * *

“와, 대박…….”

테이블 위에 놓인 병을 하나씩 세던 수현은 몇 번을 세도 일곱 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곤 진심으로 현규를 존경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이러니 싱글 몰트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거다.

“형, 주당이시네요.”

전국 소주 판매량 1위를 자랑하는 대학의, 그것도 그 안에서도 저 인간들이 헌혈하면 피에서 소주 냄새가 날 거라는 말이 돌 정도로 주당으로 유명한 공대 출신의 수현도 이 정도로 마시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가끔 운동부 누가 안주도 없이 일곱 병을 마셨다더란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눈앞에서 그런 사람을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형 위스키랑 와인만 마시는 줄 알았는데 소주도 잘 드시네요.”

“위스키 마시는데 소주를 못 마실까…….”

“……그렇긴 하네요.”

사람의 체질에 따라 안 받는 종류의 술이 있긴 하지만 체질도 도수는 못 이긴다.

“그런데 그렇게 마셨는데도 멀쩡하네요.”

난 소주 세 병이면 기절하는데, 라고 중얼거리던 수현은 이내 아주 멀쩡해 보이는 꼴을 한 현규가 전혀 멀쩡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전히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발음도 명확했지만 형은 계속 웃고 있었다.

그것도 항상 짓는 그 비웃음이 아니라 진짜 녹아들듯 다정한 얼굴로.

둘째 형이 말하는 멜로 눈깔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사랑에 빠진 남자처럼 너무 예쁘게 웃고 있다.

“형, 취했네요.”

“아니.”

“취했어요.”

“이 정도로는 안 취해.”

말은 그렇게 하지만 다정하게 턱까지 괴고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완전히 이성이 사라져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눈이 풀렸다.

혀는 아직 안 풀렸지만 눈은 확실히 풀렸다.

그래서 눈빛이 저렇게 된 것 같다.

“이제 집에 가요.”

슬슬 라스트 오더도 마감된 터라 자리를 정리하자고 하자, 취한 채로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얼굴로 재킷을 들고 일어선 형이 꼿꼿한 자세로 걸어가 계산까지 마치는 모습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형, 괜찮으세요?”

“멀쩡해. 키.”

멀쩡하다는 말과 달리 날아오는 키는 공중에서 맥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형 대신 휘청거리며 날아오는 키를 간신히 받아 든 순간 어느새 조수석 문 앞에 선 형이 차 상판을 두드린다. 어서 열라는 뜻이다.

“빨리 가죠.”

막걸리는 글른 것 같은 상황에 재빨리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형은 평소와 같이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조수석에 타 안전띠를 맸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아무 문제 없었다.

“출발할게요.”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좁은 주차장에서 차를 빼 도로로 진입하는 데 너무 불편하다.

그러니까, 차가 불편하거나 운전 자체가 불편한 게 아니라 옆에 앉은 현규 형의 눈빛이 불편해 죽을 것 같았다.

“저기, 형.”

“응?”

“……지금 좀 부담스러운데요…….”

바로 옆에 앉아 계속해서 이쪽을 바라보는 형의 눈빛은 너무 끈적했다.

사랑스러워하는 것을 넘어 끈끈하기까지 한 그 시선이 너무 불편하고 부담스러웠다.

운전을 방해하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강렬한 시선이었다.

“형, 주사가 되게 특이하시네요.”

토하고 자고 싸우고 울고,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주사는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런 주사는 또 처음이다.

새삼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할아버지의 말을 실감했다. 세상을 넓고 사람은 많고, 그 사람은 모두 각양각색이다. 주사 역시.

하지만 그들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긴 했다.

“주사? 난 주사 없는데?”

바로, 이거…….

“다들 말은 그렇게 하죠.”

“진짜 없는데?”

차 시트에 완전히 기대앉으며 녹아 들어갈 듯한 미소와 함께 어리광 섞인 음성으로 칭얼대는 형을 본 순간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요근래 본 장면 중 제일 무서운 장면이었다.

형의 미소가 너무 달달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렇게 쳐다보는 게 형 주사예요.”

형 이런 사람 아니잖아요, 라고 작게 웅얼거리며 차의 속도를 올렸다. 빨리 형을 집에서 재워야겠다는 일념으로 엑셀을 세게 밟는데 형은 여전히 네가 지금 왜 그러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자꾸 말을 걸었다.

“쳐다보는 게 왜?”

“……형 눈 풀렸어요.”

“눈이?”

“네.”

풀리다 못해 녹아 흐르고 있었다.

평소에는 차갑고 딱딱해 보이는 눈동자가 지금은 나른하게 풀어져 흐른다. 진짜 꿀이 떨어지듯이. 뚝뚝.

솔직히 이런 면에서는 우리 삼촌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술 취한 형은 그 격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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