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꿀게요, 바꿀게요. 그런데 바꾸려면 설명서 찾아야 돼요.”
“찾아.”
그 말에 후다닥 현관의 신발장을 열고 안쪽 서랍에 넣어 둔 도어록 설명서를 찾아 꺼냈다.
세팅은 의외로 단순해, 안쪽에서 뚜껑을 연 뒤 조작 버튼 몇 개를 누르자 곧장 비밀번호 리셋 모드로 들어갔다.
“형 생일 언제예요?”
“10월 25일.”
“아…….”
어떻게 삼촌 생일을 기억했나 했는데 삼촌 생일이 10월 23일이라 기억했던 모양이다. 유학 시절 삼촌과 생일 축하 인사 정도는 해 줬을 법한 사이였으니, 이틀 차이면 기억할 만하다.
“1025. 됐어요.”
막 확인 버튼을 누른 뒤 이제 만족하냐고 물으며 바라보자 형이 손을 내민다.
“그리고 내 지문 등록도.”
“……하세요.”
어차피 뚜껑은 열었고 설명서도 찾았다. 마침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니 형 하고 싶은 거 다 하시라고 이 김에 아예 지문까지 등록해 주자 세팅이 끝난 직후 형이 만족한 듯 웃는다.
너무나 해사하고 예쁘게.
괜히, 설레게.
“다 했으니까 이제 들어가요. 제발 들어가서 자요, 형.”
나 좀 그만 설레게 하라고 형의 등을 떠밀어 겨우 현관으로 들어서 침실로 가려 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샤워하고 나올게.”
겨우 방 안으로 몰아넣었더니 시계와 커프스, 그리고 넥타이를 풀어 드레스룸 진열장에 곱게 넣어 놓더니 곧장 욕실로 향한다. 그것도 배스 가운 하나 들고.
“형, 이 상태로 샤워하면 안 돼요.”
이미 술기운이 어깨 아래로 내려왔다. 아무리 멀쩡해 보여도 이 사람 절대 제정신 아니다.
그러니까 이 상태로 샤워는 절대로 안 된다고 뜯어 말렸지만 말을 안 듣는다.
“난 샤워 안 하면 못 자.”
“그러다 영원히 자는 수가 있어요.”
“커피나 내려.”
“아니, 형 그게…….”
지금 샤워하다 쓰러지면 나더러 어떻게 옮기라고요, 체급 차이를 생각해야지, 라는 말을 다 할 틈도 없이 야박하게 닫힌 욕실 문 앞에서 가방을 두 개나 든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환장하겠네.”
그와 동시에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술에 취하면 친구랑 형들이 현관에 처박아 놓고 가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들은 아주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 * *
“미치겠네.”
싸늘한 공기에 서둘러 보일러를 켜고 집 안의 온도를 올려 둔 뒤 곧장 뜨거운 물에 꿀을 탔다. 그러곤 혹시 몰라 쟁반을 든 채 화장실 앞에 앉아 신경을 곤두세웠다.
샤워하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라 대충 옷만 갈아입은 뒤 바로 욕실 문 앞에서 형을 기다리는데 다행히 물소리만 요란할 뿐 둔탁한 종류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가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로 봐서는 씻기도 제대로 씻는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라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고 문에 귀를 대고 있는데 한참 후 물소리가 그쳤다.
그리고 인기척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곧 욕실을 나올 듯한 기색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 쟁반을 든 채 기다리자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밖으로 나오려던 형이 놀라 멈춰 선다.
“여기요, 꿀물 드세요.”
손에 든 쟁반을 내밀며 어서 마시고 처자라고 컵을 내밀자 어색한 얼굴로 잔을 받아 든 형이 쑥스러운 듯 웃는다.
“……고마워.”
살짝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형의 눈은 여전히 풀려 있었다. 그 눈깔을 한 채 수줍은 듯 흐드러지게 웃는 형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새삼 빨리 재워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일었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
형이 아니라, 내가.
“형, 빨리 들어가서 자요. 오늘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전화받느라 피곤했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 이제 그만 처자라고 다 마시지도 않은 잔을 뺏고는 형을 끌고 침대로 가 눕히자 얌전히 침대에 누운 형이 야릇한 미소를 띤다.
“너무 적극적인데.”
“……주무세요, 제발.”
“아직 이른데?”
“이르든 늦든 형은 주무셔야 돼요.”
머리카락이 아직 젖어 있든 말든 일단 형을 강제로 침대에 눕힌 뒤 이불을 꼭꼭 덮어 주고 있는데 형이 다시 묻는다.
“왜?”
“제가 사고칠 것 같으니까요.”
“무슨 사고?”
반복되는 질문에 평소 형이 날 대할 때 기분이 이랬을까 떠올리며 자기반성과 성찰을 시작했다.
형이 날 보면 말이 안 통해 속 터질 것 같다고 했던 게 이런 느낌이었나 보다.
“형을 위해서예요. 어서 주무세요. 그리고 얘기는 내일 해요.”
내가 다시는 이 사람하고 술을 마시나 봐라…….
앞으로 다시는, 절대 현규 형이 취했을 때 옆에 있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며 아예 불까지 꺼 주려는데 형이 문득 손목을 잡아 온다.
“왜요? 속 안 좋아요?”
“…….”
“토할 거면 부디 화장실로 가서 토해 주시면 감사할 것 같은데요…….”
여기서 토하시면 형도 저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하룻밤을 보내게 될 거라고 경고하는데 형이 잡고 있던 손목을 세게 당긴다. 그 힘에 얼결에 끌려 형의 위로 쓰러져내리자 형이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 작게 묻는다.
“그때 왜 안 왔어?”
“……네?”
“그때, 주영이랑 만나기로 하고 안 왔잖아.”
생뚱맞은 그 물음에 그게 무슨 소리인가 갸웃했다.
애초에 주영과는 원래 이름만 아는 동창 관계였고, 그나마 연락을 시작한 건 4년 전쯤 삼촌과 주영이 사귀기 시작한 후였다. 그리고 3년 전 주영이 귀국한 뒤 가끔 연락은 했지만 그때부터는 자신이 바빠져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주영이를 바람맞힌 일은 없다. 아니,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걸 왜 형이 물어보는 걸까?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비약적인 질문에 가만히 형에게 안긴 채 기억을 더듬던 사이 형이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온다고 했잖아.”
크리스마스가 뭐, 냐고 하려는데 불현듯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크리스마스이브와 주영이와의 약속이라면 딱 떠오르는 바가 하나뿐이다.
5년 전 겨울의 이야기다.
“아…… 그날…….”
5년 전 미국에 갔을 때, 주영을 만나기로 했다 바람맞힌 그 일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주영이 아니라 현규 형을 바람맞혔다는 게 맞을 거다. 주영이랑 만나려고 했는데 주영이 마지막 시험이 오후 늦게 끝나는 바람에 현규 형이 대신 대학 안내를 해 주기로 하고 약속을 잡았는데 자신이 나가지 않았다.
“왜 안 왔어?”
등을 쓸어 내려 주며 나른하게 속삭이는 형의 목소리에 뭐라고 얘기할까 망설이다 가장 무난한 답을 내뱉었다.
“……안 간 건 아니고…….”
“……아니고?”
“갔는데…… 몸이 좀 안 좋아서 중간에 돌아갔어요.”
“어디가?”
“……몸살이요.”
“네가?”
너도 아프냐는 말투에 고개를 끄덕였다.
“삼촌이 바쁘다고 해서 혼자 신나게 돌아다녔거든요. 차 렌트해서 여기저기 다 쑤시고 다니고 밤에는 삼촌 픽업까지 하러 다녔으니까요.”
그러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앓아누웠다는 고백에 형이 작게 웃는다.
“그래?”
“네.”
“내가 아는 오메가 중에 네가 제일 튼튼한데?”
“다른 데는 튼튼한데 감기에 잘 걸리는 편이에요. 아까도 그래서 삼촌이 걱정한 거예요. 기관지가 약해서 삼촌이 겨울에는 늘 목도리 챙겨 줬거든요.”
“손 더럽게 많이 가네.”
귀찮게, 라는 말에 비해 목소리는 살살 녹고 있었다.
이 남자 미치겠다.
심장이 뛰어 죽을 것 같다.
“이제 좀 자요.”
“…….”
“다시는 형하고 술 안 먹을 거예요. 우리 같이 금주해요.”
소주든 막걸리든 맥주든 위스키든, 진짜 다시는 절대, 입에 대지도 않겠다고 수현이 다짐한 순간 귓가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그것도 좋네…….”
나른하고 부드럽게 늘어지는 음성 뒤로 곤한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잠이 든 듯 부드러워진 숨결에 두근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시끄러워 형의 옆에서 빠져나오려는데 꿈쩍도 안 한다.
분명 잠이 든 것 같은데, 팔에서 힘이 안 빠진다.
두 손으로 형의 팔을 잡고 밀어내려 낑낑대 봐도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억세게 몸을 휘감아 올 뿐이다.
“저기요, 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