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160)

“아뇨, 형 주사 있어요.”

“없어.”

“있어요. 형 술 취하면 먼저 눈이 풀리고 눈이 풀리면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면서 계속 웃으면서 사람 홀려요. 술 취한 형은 그냥 인간 포도당 수준이었어요.”

“……내가?”

“네. 지나가던 개도 홀리겠더라고요. 아니, 우리가 타고 온 차도 홀렸을지 몰라요.”

진짜 그 정도로 예쁘고 섹시했다고 수현은 솔직히 인정했다.

평소의 현규는 무섭고 불편하지만 술에 취한 현규는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그 나른함이 섹시하기까지 했다.

자꾸 찌르고 귀찮게 구는 거나 밤중에 비밀번호 바꾸라고 한 건 좀 그랬지만 웃을 때는 너무 예뻤다.

설레 미칠 정도로.

“말 나온 김에 얘기하자면…… 형 어지간하면 나가서 술 마시지 말아요. 특히 남자들하고는요.”

“왜?”

“남자들은 다 늑대예요.”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말에는 현규도 동의하는 바였다.

물론, 화자가 수현이라는 점에서 전혀 신뢰가 가지는 않았지만.

“……네가 그런 말을 하니 조금의 설득력도 없지만 하여간 그건 그렇다 치고…… 난 주사 없어.”

“아니요. 형, 주사 심해요. 제가 별의별 주사를 다 봤지만 형처럼 주사 부리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난 어젯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운 것까지 전부 명확히 기억하고 있어.”

“그럼 정확히 기억하시겠네요. 형이 저 꼬신 거.”

“……뭐?”

“사람 환장하게 쳐다봤다고요. 막 눈 완전히 풀려서 꿀 뚝뚝 떨어지게 쳐다보는데 저도 설레 죽을 뻔했다고요. 무슨 귀신한테 홀린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리고 뛰어서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그래서 잠을 설친 거라고?”

“네. 그러니까 나가서 절대 술 마시지 마세요.”

어쨌든 어제 형하고 혼인 신고 한 입장에서 괜한 불륜설이 돌까 걱정된다고 수현은 살짝 삐죽거렸다. 그러곤 다시 고개를 숙여 본인이 한 낙지찜을 먹는 모습에 현규는 일부러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곤 입가를 가렸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불행히도 난 그런 주사 없어. 그냥 네가 나한테 반한 거겠지.”

“그건 아니에요. 우리 삼촌이 유명한 멜로 눈깔이라 제가 어지간해서는 그런 데 안 넘어가는데 어제는 진짜 착각할 뻔했어요.”

“그럼, 바로 그 삼촌한테 물어보면 되겠네.”

그 사람하고 꽤 자주 술을 마셨으니까, 라는 현규의 말에 수현이 정색한다.

“우리 삼촌도 꼬셨어요?”

이미 수현의 머릿속에서는 술을 마시면 유혹한다, 라는 문장이 절대 명제로 성립됐는지 계속해서 꼬셨냐고 묻는 수현에게 슬슬 현규도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어제부터 자꾸 해준과 자신을 엮고 있었다, 수현이.

“이수현…….”

내가 왜 그 사람을 꼬셨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그에 합당한 이유를 파워포인트 20장 내로 정리해 10분간 스피치하라는 말을 단 세 글자로 줄여 말하자 수현이 그 말의 뉘앙스를 눈치챘는지 재빨리 고개를 숙인다.

“그럼 왜 술을 같이 마셔요?”

“유학생들 모임에서 마신 거야. 내가 주사 없는 건 해준 형이 제일 잘 알아. 아니면 지수한테 물어보든가.”

“지금 둘째 형하고는 통화 못 해요. 어제 종일 씹어서 지금 전화하면 저 죽이러 올 거예요.”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네가 죽는 건 네 사정이니 당장 전화해서 확인하라는 현규의 위협에 수현은 모르는 척 숟가락을 움직였다.

“……일단 밥부터 먹고요.”

“아니, 전화부터 해.”

이렇게 억울한 소리 듣고는 밥도 못 먹겠다며 아예 본인이 침실로 가 휴대폰을 들고나온 현규는 연락처란에서 ‘이지수’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곤 곧 스피커폰으로 전환한 채 테이블 위에 휴대폰을 내려 뒀다.

“저 둘째 형하고 통화하기 싫은데요.”

“받아.”

어젯밤의 현규가 스윗 버전이라면 오늘의 현규는 스파이시 버전이었다. ‘NO’라는 말은 절대 듣지 않는 현규의 완강한 태도에 수현은 그렇지 않아도 터질 것 같은 식탁 한구석을 차지한 채 반짝이는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역시나, 통화가 금세 연결되지 않는다.

“형, 이 시간에는 아직 잘 거예요.”

아직 8시도 안 된 시간이라, 수현이 “지수 형은 휴일에는 정오에 일어나요.”라고 현규를 말렸지만 현규는 지수에게도 가차 없었다.

“그건 그쪽 사정이고.”

감히 내 전화를 안 받을 거냐, 라는 말투였다. 친구든 친구 동생이든 친구의 삼촌이든,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싸가지 없고 이기적인 현규의 태도에 수현은 존경하는 듯한 시선으로 현규를 바라봤다.

저 정도로 일관적이고 공평하게 모두를 막 대하는 걸 보고 있자니, 차라리 그게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누구야? 이 시간에?

아주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통화가 연결되자 막 잠에서 깬 듯 까칠한 음성이 울려왔다.

잔뜩 짜증이 밴 목소리에 현규 형이 곧바로 반응한다.

“누굴 것 같아?”

이젠 휴대폰 화면에 뜬 짧은 한글도 못 읽냐는 현규 형의 빈정거림에 지수 형이 말을 멈췄다.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대화 상대를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 강현규?

“그렇겠지?”

- 어…… 아…… 네가, 이 시간에 왜?

“네 동생이 너한테 물어볼 게 있대.”

- 응? 내 동생? 내 동생이 왜……. 아…… 아!

아직 잠에서 덜 깨 어제 업데이트된 내용을 아직 로딩하지 못한 채 버벅거리던 형이 이내 부팅을 끝내곤 버럭 고함을 내지른다.

- 이수현! 이 반편이 새끼! 야, 이수현 바꿔! 너 큰형이랑 내 전화도 안 받고 어제 형 앞에서 현규랑 손잡고 도망쳤다며?

손잡고 도망친 게 아니라 옷자락만 잡은 것뿐이고, 도망친 것도 아니고 그냥 옆에 서 있던 것뿐이지만 이런 억측은 원래 둘째 형의 지병 같은 거라 수현은 관대하게 넘어가 주기로 했다.

하지만 현규는 그다지 관대하지 못했다.

“누구더러 반편이래?”

예의 밥 말아 먹었냐는 현규 형의 노성에 지수 형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 넌 빠져! 내 동생이야!

“아니, 이젠 네가 빠져야지. 네 동생이 아니라 내 파트너야.”

그것도 바로 어제 혼인 신고 한, 이라고 강조하는 말에 헉 하며 숨을 멈춘 지수가 잠시 후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곤 비명을 내지른다.

- 으악! 내 동생이 너랑 뭐 했는지 알고 싶지 않아! 알고 싶지 않다고! 너, 이수현 겁도 없이 허락도 안 받고 혼인 신고를 해? 네가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지? 막내라고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세상이 우습냐? 뭐든지 맘대로 하고 살려고 해, 이게?

“너야말로 요즘 세상 살 만한가 보네? 내 파트너한테 이거저거 하는 거 보니.”

다시 살기 싫게 만들어 줄까, 라는 뉘앙스의 말이었다, 그건. 그걸 지수 형도 잘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휴대폰이 조용해진 걸 보니.

- 그게 아니라, 저 새끼가 하도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니까 이러지.

“너 다른 친구 파트너한테도 이 새끼, 저 새끼, 반편이라고 해?”

너 그 정도로 후레자식이냐는 물음에 지수가 팔짝 뛴다.

- 야! 내가 아무리 다혈질에 좀 막말을 한다고 한들 설마 친구 파트너한테까지 그러겠냐?

“그럼 수현이한테는 왜 이러는데?”

- 그 새끼는 내 동생이잖아.

혈육 퍼스트 모르냐고 지수가 우겨 대는 말에 현규가 재빨리 그 말을 정정해 준다.

“법적으로 이제 수현이 보호자는 나야.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 법률적, 사회적 우위를 갖는 건 가족이 아니라 배우자고.”

이 녀석이 갑자기 맹장이 터져 긴급 수술을 해야 한다 해도 사인은 내가 해야 한다고 현규가 정확히 각자의 포지션을 잡아 주자 지수가 입을 꾹 다문다.

어이가 없어서인지 진짜 할 말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니 예의를 갖춰야겠지?”

- 아니, 무슨 동생한테 예의를…….

갖추냐는 말이 채 다 나오기도 전에 현규는 마치 경고하듯 지수의 말을 끊어 냈다.

“예의를?”

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지껄여 보라고 현규가 기다리고 있자 지수가 뚝 하니 입을 다문다.

그리고 그렇게 잠시 침묵했다.

형답지 않은 그 태도에 수현은 흥미진진하게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근성 없고 불성실한 주제에 귀는 얇고 쓸데없이 자존심만 센 둘째 형이 어떻게 반응할지.

그리고 다행히도 지수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 ……갖춰야지. 친구 파트너인데…….

학습 능력과 눈치는 없지만 다행히 생존 본능은 있는 모양이었다.

셋 중에 하나라도 있으면 됐다.

- 그런데, 뭘 물어보려는 건데?

이 새벽에 전화했는데 별거 아니면 가만 안 두겠다는 지수의 심통 뒤로, 현규가 수현에게 턱짓한다.

어서 물어보라고.

“형, 현규 형 주사 있지?”

언뜻 의문문처럼 들리지만 확신이 담겨 평서문과 유사한 억양으로 질문하자 지수가 무슨 소리냐고 바로 되묻는다.

- 뭔 소리야? 웬 주사?

“현규 형 술버릇 안 좋잖아.”

- …….

“내가 본 중에 술버릇 제일 더럽…….”

울고불고 토하고 소리치고 시비를 거는 건 아니지만 어떤 의미로는 제일 질 나쁜 술버릇이라 ‘더럽다.’라고 하려던 수현은 앞에서 날아오는 눈빛에 거기서 말을 끊었다.

자신은 생존 능력과 학습 능력 둘 다 갖고 있었다. 눈치는 없지만.

- 야, 너 설마 그거 물어보려고 토요일 아침에 전화해서 날 깨운 거냐? 나 오늘 새벽 5시에 잤는데?

“오락하다 잔 거잖아.”

누가 그 시간에 자라 했냐, 라고 받아치자 형도 그건 부정 못 한다.

- 그건 그런데…….

“그건 됐고, 하여간 현규 형 주사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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