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뭔 소리야? 그 새끼 주사 없어. 나랑 10시간 동안 대작한다고 버번으로 레이스 달린 적 있는데, 그때 놉하고 우드포드였나? 하여간 거기에 언더그라운드까지 세 병 깠는데도 멀쩡했어.
그 새끼는 절대 취하지 않는 구멍 난 술 단지라는 형의 증언에 현규 형이 이거 보라며 턱을 치켜올린다.
“아니, 취해서 막 횡설수설하고 쓰러지고 토하는 거 말고. 그 멜로 눈깔!”
- 너야말로 술 덜 깼냐? 멜로 눈깔은 또 뭐야?
주사는 네가 부리는 것 같다는 지수의 짜증 어린 반론에 수현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친다.
“아니라니까.”
- 그딴 거 없어. 걔 취한 거 본 적도 없지만 맛 가도 멀쩡해. 오히려 살짝 눈 풀리면 더 거만해지고 독설만 늘어서 애들이 술 마시면 더 안 건드렸을걸.
술 안 취하면 독사, 술 취하면 칠점사라는 지수 형의 비유에 앞에 앉은 형을 바라보자 현규 형이 싱긋 웃는다.
자신이 잘 아는, 그 웃음이다.
너희가 지금 간이 배 밖으로 나왔지, 하는…….
저런 거 보면 술 안 취해도 칠점사 같다.
알파라고 딱히 편견을 갖고 싶지 않지만 이기주의와 거만함의 끝판왕인 알파의 특성이 극대화되어 인간으로 태어나면, 그게 현규 형이었다.
- 그런데 대체 아침에 전화해서 그런 건 왜 묻는 거야?
“끊어.”
볼일 다 봤으니 됐다면서 현규는 가차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지수의 답은 듣지도 않은 채 강제로 통화를 종료한 뒤 휴대폰을 손에 든 현규는 더 할 말 있냐는 듯 휴대폰을 흔들어 보였다.
“들었지?”
“…….”
“이 논쟁은 여기서 끝내기로 하고, 밥이나 먹어.”
더 말할 것도 없는 상황에서 승리의 깃발을 손에 든 현규는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수현도 그 정도면 확실히 알았을 거라고 믿고 다시는 그에 대해 거론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수현은 근성이 있었다.
* * *
- 갑자기 전화했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설거지와 정리까지 끝낸 직후, 어제 말한 대로 두 사람은 즉시 외출을 감행했다.
본격적인 가을로 들어서며 싸늘해진 날씨에 새 옷과 담요 등 필요한 물건들이 많아져 쇼핑을 하러 가는 차 안에서, 수현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해준에게 SOS를 청했다.
차 안에 앉아, 스피커폰으로.
“현규 형 주사 있다니까.”
내가 봤다고, 수현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해준의 반응도 지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 내가 알기로는 없어. 나나 현규나 과음하는 타입은 아니라 많이 마셔 본 적은 없지만……. 일단 내가 알기로는 없어.
“과음하는 타입이 아니라고?”
수현이 알기로 해준도 어지간한 주당이었던 터라 과음하지 않는다는 말에 의아함을 표하자 해준이 느긋하게 대꾸한다.
- 우리 둘이 마시면 보통 몰트 위스키 한 병 정도밖에 안 마셔서.
“그것도 많이 마신 거야.”
- 레이스 뛰려면 각자 두 병 정도는 마셔야지.
“그렇게 마시면 죽는 거고.”
- 하여간 내가 알기로는 없어.
딱 잘라 해준이 ‘강현규는 주사가 없다.’라고 정의를 내린 순간 신호 앞에서 차를 멈춘 현규가 수현을 돌아보며 고갯짓을 한다.
이래도 우길 거냐고.
- 그런데 갑자기 주사는 왜? 결혼한 다음 날부터 그런 거 갖고 싸우는 거야?
“싸우는 건 아니고…….”
- 원래 신혼 3개월 동안은 미친 듯이 싸운다니까 잘해 봐. 너희는 연애 기간도 없이 곧장 동거에서 결혼으로 넘어갔으니 더 많이 싸울 수도 있어.
수현의 성격이 기본적으로 순하고 합리적인 편이라 싸움은 잘 하지 않는 편이지만 대신 또 한 번 고집을 부리면 끝이 없는 편이라, 알아서들 성격 맞춰 보라고 충고하던 해준이 문득 말을 멈춘다.
- 어…….
“왜?”
- 아…… 맞다. 현규 주사가 있긴 한데…….
“있지? 거봐, 있지?”
내가 그럴 줄 알았다며 수현이 현규를 쳐다보자 당황한 듯 현규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설마, 하는 그 얼굴에 해준이 서둘러 말을 잇는다.
- 심한 건 아닌데 현규가 술 마시면 되게 솔직해지는 편이야. 특히 취해서 눈 풀리기 시작하면 진짜, 과하게 솔직해져서 마음의 소리를 그대로 다 뱉어 내거든.
뜻밖의 그 말에 이번엔 현규가 되묻는다.
“제가요?”
- 응. 그런데 넌 평소에도 할 말 다 하는 편이라 심한 건 아닌데 평소에는 보기 싫으면 ‘꺼져.’라고 한다면 술 취하면 ‘네 얼굴 보면 20년 전에 먹은 분유가 넘어올 정도로 역하니까 내 시야 안에 존재를 하지 마, 상어가 씹다 뱉은 오징어 같은 새끼야.’가 되는 정도?
“……그건 폭언…….”
인성에 문제 있는 거 아니냐고 수현이 놀라 현규를 돌아보자 현규가 뜨끔한 얼굴로 재빨리 변명한다.
“그 자식은 하도 여기저기 약 들고 다니면서 사고 치니까 그런 거죠.”
- 뭐, 나도 그 뒤에 그 녀석 얼굴 안 봐서 좋았으니까 그건 인정. 하지만 안 취했으면 네가 그 정도로까지는 말 안 했을 건 사실이잖아.
확실히 평소 현규 형은 말수 자체가 적은 편이기도 하고 막말을 해도 짧고 간결하게 하는 편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너한테는 말하는 시간과 에너지도 아깝다는 느낌이었다. 대신 상대를 버러지나 음식물 쓰레기 취급하는 눈빛을 보내는 선에서 모든 걸 해결하는데 저 정도로 길게 말했다는 건…….
“취하면 인성에 하자 생기는 거예요, 형?”
“……그때는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한 것뿐이야. 그리고 그 자식은 그렇게 당해도 쌌어.”
절대 내가 심했던 게 아니라는 현규의 변명에 해준이 도움 수비를 해 준다.
- 그건 맞아. 데이트 강간 약 들고 다니던 녀석이라 유학생들 사이에서 상종하지 말라고 리스트가 돌던 녀석이었는데 갓 유학 온 어린애들은 사정 모르고 잘해 주니 따라다녔거든.
그래도 현규 덕분에 그 지역에서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대학 근처에는 얼씬도 못 해 다행이었다고 후일담을 덧붙여준 해준은 잠시 후 그게 뭔가 알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 아, 그러고 보니 취하면 살짝 이성이 무너지는 정도네.
그게 가장 일반적이고도 전형적인 주사니까 이상할 거 없다는, 해준의 가설은 상당히 신빙성이 높았다.
아까 지수 형은 현규 형이 취하면 독설이 심해진다고 했는데 삼촌이 말한 이성이 무너져 과하게 솔직해진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니까 평소 지수 형과 있을 때 현규 형은 더 심한 말을 하고 싶었다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게 바로 현규 형의 주사가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둘째 형은 본인도 막말을 하지만 누구든 심한 말을 하고 싶게 하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니까.
“들었지?”
난 그렇게 주사 있고 그런 사람 아니라고 현규가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올리자 수현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반박한다.
“어쨌든 주사는 있잖아요.”
“네가 말한 거랑은 완전히 다르잖아.”
“……그건, 그렇죠.”
빠른 수현의 인정 뒤로 해준이 그 대화를 끊는다.
-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둘이서 할 말 있으면 전화 끊고 해.
“응.”
막 끊겠다고 하려는데 바로 뒤의 차가 요란하게 경적을 울려왔다. 그 시끄러운 소리에 해준이 묻는다.
- 클랙슨 소리 들리는데 차 안이야?
“응.”
- 어디 나가는 거야?
“쇼핑하러.”
- 그래,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으니 쇼핑해야지. 마침 잘됐네. 현규야, 내가 필요한 거 적어서 메시지로 보냈으니까 확인해. 출력해서 걸어 놓고 보면 도움 될 거야.
바로 어제 해준이 스쳐 가듯 말했던 ‘이수현 사용 설명서’의 실제 등장에 현규가 거북해하는 얼굴로 인상을 찌푸린다.
“전 결혼을 한 거지, 입양을 한 게 아닙니다만…….”
- 그건 네 생각이고. 내 입장에서는 너한테 내 애 입양 보낸 셈이니 내가 시키는 대로 잘해야겠지?
해준의 나긋나긋하지만 어쩐지 거절은 거절하겠다는 강한 말투에 현규가 결국 쓰게 웃으며 얌전히 수긍한다.
“좀 이따 확인하겠습니다.”
- 그래야지.
평소에는 더없이 순하고 얌전해 만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수현과 관련된 일이면 은근히 눈에 광기가 도는 게 절대 쉽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해준도.
혼인 신고 전에 그 난리를 치던 수현의 부모나 형들은 막상 혼인 신고를 하고 나니 별 관심 없어 보여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뜻밖의 다크호스가 등장했다.
어쩌면 해준이 자신의 부친만큼이나 강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현규는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해준과 수현을 완전히 분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보호자는 한 명이면 된다. 보호자가 둘이면 속만 시끄러워진다.
그리고 그냥 싫다. 해준 형은.
- 그럼 끊을게. 데이트 잘하고.
“삼촌도 주말인데 주영이랑 데이트나 해.”
- 그러지 않아도 점심때 만날 거야.
“그래. 끊어.”
그렇게 통화를 마무리한 직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차 안에서 수현은 시트에 기대앉으며 억울해하는 얼굴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이제 더 확인할 필요 없지?”
“내 동창들한테 단체 문자라도 돌릴래?” 하는 현규의 도발에 수현은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두 사람의 증언이 확실하고 일치하는 부분이 있으니까 됐어요.”
“그럼 됐네.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주사 있는 건 너야.”
그것도 아주 주사 더럽다는 이야기에 수현이 시원하게 인정한다.
“알아요.”
“안다고?”
순간 막 좌회전을 하던 현규가 기막혀하는 얼굴로 수현을 힐끔거린다.
그걸 알면서도 술을 처마시냐는 얼굴이었다.
“술 취하면 아무 데서나 자는 게 문제인데…… 보통 친구들이나 동료들하고 마시니까 많이 마시면 집까지는 데려다줘요.”
택배처럼 현관에 집어 던지고 가서 그렇지, 라는 말에 현규가 다시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