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네?”
“그거 말고 다른 거 있잖아.”
“아니에요. 그것뿐이에요.”
“아니. 너, 주사 더 있어.”
“……제가요?”
“응.”
“저 주사 그것뿐이에요. 아, 가끔 기억 사라지거나 토할 때도 있긴 한데…… 그건 저만 그런 거 아니라 많이 마시면 다 그러잖아요.”
“그거 말고.”
“어떤 거요?”
“……잘 기억해 내 봐.”
“저 진짜 술버릇 얌전한 걸로 유명해요. 물론, 가끔 화장실에 갔다 거기서 잠들거나, 길바닥에서 잠든 적은 있지만…….”
그래도 늘 형이나 삼촌이 데리러 와서 안전하게 귀가했다는 수현의 주장에 현규가 놀라 목소리를 높인다.
“길가에서 잠든 적이 있다고?”
네가 제정신이냐는 의미를 포함한 그 질문에 수현은 서둘러 시선을 내렸다.
이 부분에 대해선 이미 삼촌에게서도 하도 잔소리를 많이 들어 할 말이 없어서였다.
“대학 때 두 번 정도였어요…….”
많지는 않다고 구차한 변명을 내뱉자 곧장 칼날 같은 반응이 돌아온다.
“그러면서 아직도 술을 마신다고?”
“…….”
“너, 당장 술 끊어.”
“……그럼, 같이 금주해요.”
“좋아. 얼마든지.”
내가 못 할 것 같냐는 현규의 오기에 수현은 자기도 할 수 있다는 듯 동의했다.
하지만 그 결심이 무색하게 바로 4시간 뒤 그 결심은 두 사람의 뇌리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 * *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사이 옆에 쌓인 박스를 슬쩍 발로 밀자 쨍강하는 소리가 울려왔다.
글렌터너와 맥캘란, 그 외에 토닉워터와 맥주 한 박스가 있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플라스틱병과 캔에 담겨 있거나 상자에 개별 포장돼 있어 그런 소리를 낼 일이 없었다.
그런 소리가 나는 이유는 오로지 그 옆에 쌓인 작은 박스 하나 때문이었다.
“소주를 너무 많이 산 것 같은데.”
쇼핑 초반에는 분명 현규의 목표대로 모든 게 진행됐다.
수현의 가을맞이 니트와 코트, 그리고 그 외에 잠옷과 실내복뿐 아니라 다음 주부터 입어야 할 드레스셔츠에 본가에서 못 들고나온 가을 정장과 구두, 그리고 해준이 보낸 ‘이수현 사용 설명서’에서 강조한 ‘밍크 담요’까지.
그 덕에 배달 서비스를 이용해야 할 정도로 쇼핑백이 많아지긴 했지만, 거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나간 김에 점심 식사까지 한 뒤 식품 코너에 들러 과일을 구매하던 중 갑자기 만두를 하겠다고 나선 수현이 카트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발생했다.
갑자기 카트가 부족해질 정도로 야채와 두부, 고기를 넣던 수현은 어느 순간 주류 코너에 가서 술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규 역시 위스키를 잔뜩 사 정신을 차려 보니 카트를 두 개 끌고 있었다.
그리고 계산을 하면서야 비로소 두 사람이 몇 시간 전 금주 선언을 했다는 걸 기억해 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 다 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언급하는 쪽이 진다는 걸 알기에 그냥 모른 척했다.
“한 번에 많이 사면 싸잖아요.”
그렇긴 하다. 그렇지만…….
“박스로?”
소주를 박스로 구매하는 사람이 흔할까?
짐에 밀려 엘리베이터 구석에 선 현규가 넌 어떻게 생각하냐는 듯 수현을 바라보자 수현이 작게 중얼거린다.
“……한 박스에 스무 병밖에 안 들었어요.”
“스무 병‘이나’지.”
“형도 위스키 세 병 샀잖아요.”
“그건, 세 병이지.”
가격은 그 위스키 한 병이 소주 한 박스의 몇 배에 달하지만 병 수로 대화를 하니 반박할 수 없다.
그래도 세 병이면 위스키를 더 오래 마실 텐데, 라고 수현이 중얼거리는 사이 엘리베이터 안의 박스들을 본 현규가 문득 묻는다.
“너 손 크지?”
“……네.”
“그럴 것 같았어…….”
아침부터 12첩 반상을 하는 걸 봤을 때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갑자기 만두를 하겠다며 사 대는 재료의 양으로 봐서는 단순히 손이 큰 정도가 아니었다.
오락이나 도박은 안 하지만 스트레스 풀이로 요리를 하면서 돈을 더 쓸 수도 있다는 말을 무시하고 넘겼는데 수현 정도로 손이 크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 왔어요.”
어느새 17층에 도착해 수현이 바리바리 짐을 싸 들고 내리는 모습에 현규 역시 무거운 박스들을 안아 들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집 빨리 알아봐야겠네.”
“어…… 여기 편한데요.”
“복도식이잖아.”
엘리베이터에서 집이 멀다고 현규는 클레임을 걸었지만 수현은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편리함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래도 여기 가까워서 진짜 좋아요. 아침에 러시아워 경험 없이 걸어서 10분이면 출근 가능하고 가끔 집에 와서 점심 먹고 가도 되고요. 형이랑 저랑 둘이 살기에는 좀 좁기는 한데…….”
그렇게 말한 수현이 집 앞에 도착해 현규를 위아래로 스캔하듯 바라본다. 형이 너무 큰 게 문제라는 의미의 시선이었다.
“그래도 너무 편해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현규도 동의했다.
아침 출퇴근 시간이 파격적으로 줄어든 덕에 삶에 여유가 생겼다. 고작 40분 정도지만 24시간 중 40분은 크다. 그리고 수현의 말대로 점심시간에 집을 오갈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었다.
“여기 다른 평수는 없어?”
“방 세 개짜리가 있긴 한데…… 전 혼자 살 거라 작은 데로 왔죠.”
그럼 그쪽을 알아볼까, 라고 하며 집으로 들어온 현규는 일단 짐을 주방 쪽으로 옮겨 놓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이 편리함을 포기하는 건 아깝다. 그렇다면 차라리 큰 평수로 옮기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다소 불편하긴 하지만 넓어 봐야 좋을 건 없으니까…….
“채소는 안 넣으셔도 돼요. 곧장 할 거라.”
바로 만두를 시작할 거라며 수현이 과일만 먼저 냉장고에 넣자 막 술병을 식탁 위로 올려 둔 현규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곤 만두 재료들을 꺼내는 모습에 냉장고를 닫던 수현이 작게 중얼거린다.
“사내 부부가 이럴까요?”
아니, 굳이 사내 부부가 아니라도 일반적인 맞벌이 부부의 생활이 이런 걸까, 라고 수현은 신기해했다.
주말에 나가서 쇼핑을 해 와 정리하는 게 딱 그런 느낌이었다.
“일반적인 부부들은 술을 이렇게 많이 사진 않을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술 넣을 데가 없네요.”
냉장고가 꽉 찼다고 수현이 어떻게 해야 하냐고 현규를 바라보자 현규가 술을 쭈욱 돌아보곤 고개를 끄덕인다.
“맥주랑 그때그때 마실 소주만 냉동실에 넣어 두고 먹어. 굳이 냉장 보관 안 해도 되지.”
“그럴까요?”
“그래도 냉장고가 하나는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김치냉장고랑 냉동고도, 라는 말에 수현도 심각한 얼굴로 이사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럼 일단…… 집을 알아보는 걸로…….”
이전에 집을 구해 준 부동산 사장님께 연락해 두겠다며 재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도와줄까?”
“아뇨. 괜찮아요. 어차피 피는 사 왔으니까.”
말과 동시에 수현이 작은 아일랜드 식탁 위에 늘어놓는 채소들을 본 현규는 정색했다.
살 때도 느꼈지만 쌓아 두니 더 어마어마한 양으로 보였다.
“너, 몇 개를 만들려는 거야?”
“200개요.”
“만두 200개? 집에서?”
“네. 전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만두를 싸거든요.”
단순노동이 최고라는 말에 부추를 씻기 시작한 수현의 옆에서 현규가 수납장에 기대선 채 묻는다.
“……스트레스가 심해?”
“네.”
“혼인 신고 때문에?”
“아뇨. 그건 이미 벌어진 일이니까 괜찮아요.”
지나간 일에는 신경 안 쓰다며 수현은 빠르게 부추를 씻었다. 그 손을 보니 수현이 아침에 12첩 반상을 차릴 수 있는 이유를 알 만했다.
손이 빠르다.
“그럼 왜?”
“……그런 게 있어요.”
“그런 게 뭔데?”
“……내일 얘기해 드릴게요.”
“내일?”
“네. 내일 아침에요.”
수현이 시간까지 콕 찍어 말한 순간 현규가 눈을 가늘게 뜨며 기묘한 웃음을 입가에 띠었다.
이것 봐라, 라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