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160)

사실 마트에서 소주를 박스로 살 때부터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본인도 위스키를 사야 해서 모르는 척해 준 건데 그걸 모르고 야무지게 야망을 불태우고 있다.

“그래, 그럼 내일 알 수 있겠지.”

넌 오늘 잘 걸렸다고 웃으며 현규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곧장 실내복으로 갈아입고는 수현의 옆으로 다가섰다.

“내가 해 둘 테니 들어가서 옷 갈아입고 나와.”

회사에도 가끔 트레이닝복을 입고 출근한다는 걸로 봐선 수현의 외출복과 실내복을 잘 구분하기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 외출복에 물 묻히지 말고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오라고 현규가 방문을 가리켰다. 그러자 수현도 그제야 외출복 그대로인 걸 눈치채곤 싱크대에서 물러선다.

“금방 갈아입고 올게요.”

부추, 숙주, 당면, 배추, 버섯과 새우, 두부에 돼지고기, 그리고 새우와 포기김치까지.

솔직히 말하자면 이걸 언제 다 손질하냐 싶을 정도로 심란한 양에 수현이 씻어 둔 부추를 옆으로 밀어 놓고 숙주를 꺼내 씻기 시작했다.

다섯 봉이나.

“할아버지가 좋아하시겠네…….”

뭐든 많이 크게, 라는 게 삶의 신조이신 할아버지와 딱 맞는 성격이었다, 수현은. 일단 소주를 박스로 산 것에서부터 될성부른 떡잎이다. 할아버지와 둘이 두면 석 달 안에 집안 재산을 말아먹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물에 두 번 정도 헹궈 깨끗해진 숙주를 체에 걸러 물을 빼놓은 뒤 이번엔 쪽파를 돌아봤다. 그사이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수현이 침실에서 나와 이쪽으로 다가서는 모습에 현규는 역시나, 라고 떠올렸다.

검은 티에 편안한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은 수현은 열흘 전쯤 처음 보고 기겁했던 그 복장 그대로였다. 아니, 정확히는 다르긴 했다. 검은 티셔츠의 사이즈나 트레이닝복 바지의 기장이 좀 달랐다.

문제는 저런 옷들이 너무 많아 구분이 안 간다는 사실이었다. 스티브 잡스도 아니고…….

아니, 차라리 스티브 잡스는 옷이 다 똑같기라도 했지. 일부러 갖다 버리려고 옷걸이에서 빼놨는데 어느새 다 곱게 접어 서랍장에 넣어 놨다.

저 옷들을 언젠가 다 쓰레기통에 처박고 말리라.

“……왜요?”

자신을 바라보는 현규의 흉흉한 시선을 눈치챘는지 싱크대로 온 수현이 겁먹은 눈빛으로 현규를 바라보자 현규는 서둘러 표정을 풀고 웃었다.

지금은 수현의 경계심을 낮춰야 할 때였다.

“파도 넣나 해서.”

“전 넣어요. 라드유도 들어가요.”

“……그래.”

“새우 좋아하세요?”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새우를 박스로 사 온 걸로 봐서는 좋아한다고 해야 할 것 같아 현규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새우만두까지 다 따로 하는 건가?”

“네.”

“그런데 이거 만두피 200개로 돼?”

넘을 것 같은데, 라는 현규의 말투에 수현이 막 쪽파를 손에 들다 움찔한다. 그 움직임에 현규가 혹시나 해 묻는다.

“너, 생각 안 하고 그냥 막 샀지?”

“…….”

“만두피 더 필요한 거 아냐?”

“……그럴지도요…….”

일단 하다 보면 알 것 같다는 대책 없는 수현의 답에 현규는 혀를 찼다.

요리 안 하는 자신이 보기에도 이건 200개 넘게 나올 분량이다. 일단 두부와 당면, 그리고 고기 양이 어마어마하다.

“만두피 얼마나 더 필요해?”

재료가 부족해 일하다 중간에 멈추는 걸 제일 질색하는 성격이라 지금 근처 마트라도 가서 사 오겠다고 하자 수현이 작게 중얼거린다.

“100개 정도……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

“여기서 제일 가까운 마트가 지난번 거기지?”

“네.”

오피스촌에 위치한 오피스텔이다 보니 마트가 먼 게 피곤하다고 수현이 파를 씻기 시작하자 자리를 피해 준 현규가 한숨을 내쉬며 차 키를 찾는다.

“그것만 사 오면 돼?”

“네.”

“다른 건?”

“없어요.”

하긴 이렇게 많이 샀는데 뭐가 더 필요할까 해 현규는 차 키와 휴대폰을 손에 들고 나섰다.

“마트 찾을 수 있으세요?”

“몰라도 내비게이션 치면 나오겠지.”

“……그렇긴 해요. 그럼, 형 오실 때 커피 좀 사다 주시면 안 돼요?”

“커피?”

“네, 뜨거운 라테로요. 우유만 오트밀 우유로만 바꿔 주시면 돼요.”

여기 1층의 라테 맛있어요, 라는 수현의 말에 현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또 다른 건?”

“……아, 그럼…… 레몬이랑 얼음도요. 이따 하이볼 만들어 마시려고요.”

아까 거긴 너무 멀어서 얼음을 사 올 수 없었다며 수현이 부탁하자 현규가 곧 집을 빠져나간다.

낮에는 아직 더워 반소매 티셔츠에 편안한 면바지를 걸치고, 로퍼를 신고 나온 현규는 그제야 슬리퍼를 안 갖고 왔다는 걸 깨닫고는 마트에서 장 볼 목록에 추가했다.

그러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문득 입매가 풀리며 입꼬리가 올라간다.

순간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갔다.

“진짜 신혼 같네…….”

라고.

* * *

그 순간의 기분을 서술하라고 하면 컨베이어벨트의 어떤 부속품이 된 기분이었다.

싸도 싸도 줄지 않는 만두 속과 똑같은 모양으로 찍어 낸 듯 나오는 만두, 그리고 쉴 새 없이 김을 뿜어내는 찜기와 12분 단위로 울려 대는 알람.

그러니까 이곳은…….

“만두 공장이네.”

눈앞에 놓인 찐만두 스무 개, 생만두 마흔 개를 보며 현규는 탄식했다.

좋게 말해 공장이고 나쁘게 말하면 만두 지옥이다.

“원래 이래요, 만두가. 힘들면 그만하셔도 돼요.”

힘들다. 그러니까 움직이지 않고 손만 움직이는 게, 진짜 힘들었다. 게다가 만두 싸는 것 자체도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와주겠다고 본인이 말하곤 힘들다고 먼저 일어서는 건 볼품이 없다. 그래서 참았다.

“괜찮아. 안 힘들어?”

“전 원래 단순노동을 좋아해요. 그런데 또 너무 단순한 작업은 안 되고 적당히 프로세스가 있어야 해서, 요리를 하는 거거든요. 머리 복잡해지거나 스트레스받을 때 재료 손질이나 요리를 하면 머릿속이 되게 개운해져요.”

오락이나 도박 같은 건 너무 자극적이라 오히려 뇌가 흥분하고 피곤해져서 싫거든요, 라고 말하며 빠르게 만두를 빚는 수현은 만두 공장 공장장 같았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손은 흔들림 없이 만두를 정확한 크기와 모양으로 싸는 모습에 얘 혹시 뇌하고 입하고 손이 따로 노는 거 아닌가 잠깐 무서워졌을 정도였다.

“잘 만드네.”

“네.”

“집에서 만두만 싸고 있었던 건 아니지?”

“설마요. 원래 손으로 하는 건 다 잘해요.”

“용접도?”

“네. 뜨개질이랑 바느질도 잘해요. 전투적으로 해서 그렇지.”

“못하는 것보다는 잘하는 게 낫지. 양 조절만 제대로 하면.”

지옥 같았던 새우만두를 지나 만리장성 같던 만두를 넘기고 마지막으로 김치만두를 싸고 있던 현규의 한마디에 수현이 뜨끔한 듯 눈을 피한다.

이미 싸 놓은 만두가 300개였다. 하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수현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만두피 300개로 모자라 다시 마트에 가서 다급히 만두피를 사 와 싸며 현규는 요리는 잘하지만 양을 가늠 못 하는 수현을 지그시 바라봤다.

아침마다 12첩 반상을 차릴 때 알아봤어야 했다.

그때는 그냥 손이 크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단순히 양 조절을 못 한 거였다. 더 문제는 본인도 그걸 아는데 별로 고칠 생각이 없다는 거였고.

“용케 간은 잘 맞추네.”

보통 간을 볼 때는 레시피에 따라 비율로 계산하는데 수현의 경우는 오로지 감으로 간을 했다. 그런데도 기가 막히게 맛있긴 했다. 양이 많은 게 문제지.

“조금만 더 싸면 끝나니까 군만두에 하이볼 마실까요?”

오후 3시부터 시작된 만두 공장은 오후 10시가 다 된 지금까지 절찬리 작업 중이었다.

그사이 찐만두는 원 없이 먹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먹어 물릴 정도였지만 현규는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군만두는 또 다르기도 하고 맛있었다, 만두가.

그만 쌀 수도 없게.

그래서 더 짜증 났다.

어제는 이 솜씨로 요식업을 하지, 라고 했지만 하루 만에 절대 요식업을 해서는 안 되는 인간으로 낙인찍힌 채였다, 수현은.

손 크고 양 조절 못 하는 게, 요식업하다 말아먹는 사람의 전형이다.

“이거면 한 일주일은 먹을 거예요.”

“겨우 일주일?”

“보통 그래요. 제가 200개 싸면 한 번에 열 개씩 아침, 저녁으로 해치우거든요.”

주말에는 종일 만두만 먹고요, 라면서 수현이 접시에서 찐만두를 손에 들어 현규의 입에 넣어 주자 현규가 잘 받아먹는다.

“군만두에는 맥주가 나을 것 같은데.”

“그럼, 소맥 말까요?”

하이볼도 좋지만 소맥이 진리, 라며 눈을 반짝이는 수현은 현규 역시 웃으며 응시했다.

왜 저러는지 다 알기에 그냥 우스울 뿐이었다. 수현 본인이 위스키에 약하니 가능하면 자기가 잘 마시는 소주로 승부를 보려는 거다.

아까 해준 형이 보내 준 ‘이수현 사용 설명서’에 수현의 주량이 소맥으로는 소주병 기준 한 병, 소주만 마실 때는 두세 병, 맥주는 500ml캔 여섯 개라고 쓰여 있었는데 사랑하는 삼촌이 본인의 약점을 다 알려 줬다는 걸 수현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더불어 자신의 주량이 소맥 말기 전을 기준으로 소주병 일곱 병이라는 것도 모르는 듯했다. 그리고 소주만 마시면 열 병이다.

어제는 너무 기분이 좋아 빨리 정신을 놓은 것뿐이다.

수현은 어제 그게 주사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어젠 진짜 기분이 좋아서 그랬던 거다.

물론, 그걸 알려 주진 않겠지만.

“그럼 소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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