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160)

“네. 다 했다.”

드디어 400개 가까이 되는 만두를 다 싼 수현이 어깨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현규 역시 빈 그릇들을 들고 일어선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넌 나머지 만두를 쪄서 정리해서 냉동실에 넣으라며 싱크대로 다가서자 현규의 옆을 쪼르르 따라와 인덕션 앞에 선 수현이 신기해하는 얼굴로 현규를 올려다본다.

“의외로 다정하시네요.”

“……응?”

“형 집안일은 전부 사람 쓰고 청소나 정리 같은 건 손도 안 댈 것 같았거든요. 설거지도 그렇고.”

욕실 청소하는 거 보고 솔직히 많이 놀랐다는 수현의 칭찬에 현규 역시 솔직하게 답한다.

“보통은 그렇지.”

“지금은요?”

“지금은 특수 상황이니까.”

이 좁은 집에 도우미를 부를 수도 없으니까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현규에게는.

하지만 의외로 해 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집이 작으니 청소도 그다지 힘들 게 없고 단둘뿐이니 붙어서 이것저것 같이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간이침대는커녕 놓을 수 있는 소파조차도 너무 작아 선택의 여지 없이 한 침대를 써야 한다는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드레스룸과 주방 때문에 일단 집을 알아볼 생각은 하긴 했지만 방 하나 정도가 더 있으면 거길 드레스룸으로 쓰고 주방만 좀 더 넓히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욕조도 있는 쪽이 좋다.

가능하면 둘이 들어갈 수 있는 큰 욕조가…….

아주 잠깐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데 만두를 찌던 수현이 소주병을 냉동실에 넣어 둔다. 그러곤 순식간에 거실 청소까지 끝낸 뒤 이번엔 만두를 굽기 시작했다.

“거실에서 드실래요? 아니면 식탁?”

“거실.”

“그럼 영화 볼래요?”

“좋아. 뭐?”

“아무거나요. 아, 열자마자 제일 먼저 위에 보이는 걸로요.”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겠다 싶어 설거지를 정리한 뒤 먼저 거실로 가 텔레비전을 켜곤 OTT 화면을 연 순간 가장 먼저 보이는 영화를 틀었다.

“다 됐어요.”

순식간에 군만두 한 접시를 만들어 낸 수현이 커다란 트레이 위에 만두 접시와 냉동실의 소주, 그리고 냉장실의 맥주와 커다란 컵을 두 잔 올려 거실로 돌아왔다.

거실이라고 해 봐야 걸어서 다섯 걸음이라, 금세 현규의 옆으로 다가와 쟁반을 내려둔 수현은 야무지게 소맥을 말기 시작했다.

그런 수현을 현규는 흐뭇하게 바라봤다. 위스키에 약하길래 자신이 직접 하이볼을 말아 한 방에 보내 버리려고 했는데 자신이 손쓸 필요도 없이 스스로 무덤을 파 주는 수현이 고맙고 귀여웠다.

거기다 소맥도 잘 말았다. 마시고 빨리 갈 수 있게, 물론 본인이.

“소맥 잘 마네.”

네 인생도 잘 말고…….

“대학에서 배운 것 중 제일 잘하는 게 이거예요.”

“응. 그런 것 같아.”

“드세요.”

수현이 긴 티스푼으로 커다란 유리잔의 소맥을 휘휘 저은 뒤 건네주는 잔을 받아 든 현규는 자연스럽게 수현이 잔을 들기를 기다렸다. 그걸 눈치챈 듯 수현 역시 소맥을 가득 채운 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쨍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세 번째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 * *

소주가 다섯 병째 빈 순간, 완전히 정신을 놓은 수현은 현규의 바로 옆에 찰싹 달라붙어 팔을 꼭 쥔 채 폭 하니 기대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휘감겨 있었다, 거머리처럼.

그러곤 작게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졸려요…….”

“그래.”

“잘래요.”

“그래.”

“어디 가지 마세요.”

“……그래.”

어딜 갈 수 있게 해 줘야 가지, 바로 옆에 붙어 거머리처럼 감겨 있는데 어딜 갈 수 있을 리 없다.

자신의 오른팔을 꼭 끌어안은 채 뺨을 어깨에 대고 비벼 대는 수현을 현규는 지그시 내려다봤다.

수현은 감히 상상도 못 하고 있는 모양인데 이게 수현의 주사였다.

수현이 술 마시면 잠드는 건 사실이다. ‘이수현 사용 설명서’에도 그 주사는 있었다. 얘가 주량 이상 마시면 아무 데서나 막 잠드니 밖에서 술 마실 때는 수시로 전화해서 체크하고 같이 마시는 사람들도 체크하라고.

하지만 그건 중간 과정이다. 너무 피곤한 상태에서 마시거나, 속도 조절을 못 하고 주량을 빠르게 넘겨 그 이상을 마시게 되면 이렇게 달라붙는 게 수현의 주사였다.

사흘 전 밤, 바로 이걸 경험하곤 기함했다.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상태에서 급하게 위스키를 벌컥벌컥 마셔 대던 수현은 어느 순간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고, 그래서 자냐고 물었더니 안 잔다고 했다. 대신 피곤한 듯 눈을 비비며 옆으로 다가와 지금처럼 찰싹 달라붙어 몸을 기대 올 뿐이었다.

성적인 의도보다는 어린아이가 어른에게 의지하는 것 같은 느낌이라 불쾌하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더 황당했다.

평소에는 둔하고 눈치도 없는 게 애교도 없어서 이게 막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는데 술에 취한 수현은 어리광이 심했다. 그것도, 너무.

“수현아.”

“응.”

“정신 차려. 방에 가서 자야지.”

“응.”

“가자.”

“응.”

“수현아…….”

“응.”

“……대답은 잘하네.”

“응.”

무슨 말을 하든 돌아오는 대답이 ‘응’뿐인 수현의 어리광에 현규는 난감한 듯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이걸 휴대폰으로 찍어 수현의 주사를 알려 줄 생각이었는데 휴대폰이 너무 멀리에 있다.

휴대폰을 가지러 가고 싶어도 수현 때문에 꼼짝할 수 없다.

“수현아?”

“응.”

“아가, 잠깐만 옆으로…….”

“응.”

여전히 대답만 하며 꼼짝도 안 하는 수현을 내려다보자 수현이 꼭 쥐고 있는 휴대폰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현규는 그런 수현이 귀엽고 또 한심하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분명 소맥으로 자신을 보낸 뒤 저 휴대폰으로 자신의 주사를 촬영해 내일 보여 주려고 벼르고 있었을 텐데, 불행히도 본인이 먼저 가 버렸다. 휴대폰만 꼭 쥔 채.

사흘 전 위스키를 마셨을 때 술집에서 술을 마시던 것까지는 기억한다고 했으니 자신의 주량을 봤을 거고 위스키로는 어지간하면 취하지 않을 거라 판단했을 거다.

하지만 어제 소주 일곱 병에 취한 모습에 소주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오늘 굳이 소주를 박스로 사고 하이볼을 마시자고 했다 기회가 오자 재빨리 소맥을 말겠다고 한 건데…….

그게 너무 우스웠다.

그냥 수현의 머릿속이 훤히 보여 웃겼다.

사실 자신이 굳이 위스키를 산 것 역시 수현이 위스키에 유독 약하다고 ‘이수현 사용 설명서’에 쓰여 있어 하이볼로 보내 버리려고 한 거라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변명을 하나 하자면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그날의 기억이 없는 건 좀 심술이 났지만 이제 술을 안 마시면 되니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랬다. 하지만 소주를 박스로 구매하며 먼저 함정을 파려는 수현이 괘씸함과 동시에 술 마시고 길거리에서 뻗는 게 주사라는 걸 알고 나니 도저히 더는 수현의 술버릇을 간과할 수 없었다.

더불어 자신에게 주사가 있다며 여기저기 전화해 굳이 확인 작업을 한 것도 얄미웠다.

아무래도 이 자식은 한번 당해 봐야 다시는 술을 안 처마실 거라는 생각에 수현의 주사를 동영상으로 찍으려고 준비한 건데…….

그 본인이 또 방해를 하고 있다.

옆에 꼭 달라붙어 꼼짝할 생각을 안 하는 수현을 밀어내지 못하는 건 아니다.

사실 밀어내려고만 한다면 아주 쉽게 떨쳐 낼 수 있지만, 그걸 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그러니까 못 하는 게 아니라 할 수 없다.

이상하게 자신은 이 녀석에게는 약하다. 늘 그랬던 것 같다. 16살 때도 19살 때도, 그리고 지금도.

“그런 건 미리 말했어야지…….”

바로 사흘 전까지만 해도 수현은 당연히 해준 형과 결혼할 줄 알았다. 그래서 아예 자신의 연애 대상으로는 생각해 본 적도 없기에 자각이 늦었던 걸 생각하니 조금 부아가 치밀었다.

아니, 이건 사실 이지수 잘못이 제일 크다.

그 긴 세월 동안 몇 번이나 은근히 수현과 해준 형은 언제 결혼하냐고 호기심을 드러내며 힌트를 줬음에도, 이지수는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이지수도 잘 몰랐을 수 있지만 그래도 스토커 관련 이야기는 했어야 했다. 그리고 수현이 따로 독립해 살고 있다는 것도.

물론, 미리 알았다고 해도 그 정도로 애절한 건 아니라 뭐 그러려니 했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다.

몇 번인가 지수를 통해 소식을 듣고 한국에 와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하고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을지도.

다시 한국에 돌아와 만났을 때 처음으로 본 모습이 시커먼 다크서클을 단 채 칫솔을 입에 물고 검은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를 걸치고서 맨발에 슬리퍼를 찍찍 끌며 다니는 모습이었던 터라, 첫사랑이 와장창 무너진 기분이었지만…… 이수현은 이수현이었다.

여전히 번거롭고 손 많이 가고 둔한 데다 눈치도 없어 생각나는 대로 다 뱉어 내는 게, 이수현이 맞았다. 너무 단순하다 보니 오히려 호쾌하기까지 한 점도 그대로였다.

물론 술에 취해 길바닥에서 잠들 거나 요리할 때 양 조절을 못 해 사람을 황당하게 한다는 건 의외였지만 그것도 나름 신선한 포인트가 되었다.

이건 진짜 내 거다 싶어서 재빨리 혼인 신고까지 했는데 거기엔 아주 만족한다. 잘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탓에 해준 형이 뭔가를 눈치챈 것 같아 그게 신경 쓰일 뿐.

그래도 동영상은 찍을 거지만…….

이번에 확실히 증거를 남겨 술은 집에서만 마시게 할 생각으로 다시 수현을 내려다봤지만 수현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눈썹이 가볍게 움직이는 게 완전히 숙면에 든 건 아니지만 램수면 상태인 듯했다.

지금 완전히 잠이 들면 깨우기 힘들 것 같아 서둘러 수현을 깨웠다.

“수현아?”

“응?”

“일어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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