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0/160)

짤막한 그 답에 서둘러 대꾸했다.

“곧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 * *

아침 햇살은 더없이 환하고 따뜻했다.

넓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가을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커튼과 어울려 아기자기한 거실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 볕 아래에서 부드러운 은색의 실크 가운을 걸친 채 노란색의 소파에 기대앉은 형은 우아하게 커피를 한 모금 넘기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형의 바로 옆에 앉은 채였다.

모든 게 그날과 같았다. 기시감을 넘어 내가 타임슬립을 했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모든 게 그대로였다.

그나마 확 바뀐 거실의 풍경과 사라진 스툴로 이게 악몽이나 타임슬립이 아닌 현실임을 알아챌 뿐이다.

더불어 겨우 며칠 만에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 자신의 멍청함 역시 처절하게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또 술을 마시면 사람이 아니다.

“오늘도 역시, 기억 안 나지?”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현규 형의 질문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이번에도 묵비권 행사인가?”

“……기억 안 나요.”

“그래, 그렇겠지. 그렇게 처마셨으니까.”

목소리는 더없이 나긋하고 미소는 상큼했지만 눈빛은 살벌했다.

“……제가 어제 무슨 짓 했나요?”

‘혹시 형에게 내가 하려던 짓을 자백했다거나 아니면 육욕을 참지 못해 형을 덮쳤다거나 한 건가요?’ 하는 말을 입 안에서 굴리며 커피잔을 두 손으로 든 채 현규 형을 힐끔거렸다.

순간 형이 눈을 맞추며 싱긋 웃는다.

“무슨 일이 있었을 것 같아?”

“…….”

“서로 다 아는데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한마디로 정리할게.”

거기까지 말한 뒤 잠시 시간을 둔 현규 형은 강한 악센트로 그 한마디를 남겼다.

“술 끊어.”

당장, 오늘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말 안 들으면 뒤의 일은 절대 보장 못 한다, 처먹고 싶으면 얼마든지 처먹어 봐라, 네 앞날이 가로등 없는 새벽의 고속도로 같을 테니 등등의 생략된 수많은 문장이 귀를 뚫고 뇌로 들어가 다른 쪽 귀로 흘러나갔다.

오늘따라 유독 문장이 짧은 것만으로도 지금 형이 화가 많이 났음은 명백했다.

그걸 감지한 순간 재빨리 대꾸했다.

“네. 끊을게요.”

“좋아. 모처럼 말귀를 잘 알아먹네.”

길게 대화할 필요 없이 깔끔하게 정리된 상황에 현규 형은 크게 만족해하며 다시 커피를 마셨다.

그렇게 대화가 끊긴 순간, 다시 무거운 침묵이 돌기 시작했다.

숨이 막힐 듯 무거운 그 분위기에 어깨가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어제 분명 뭔가가 있었다.

어쩌면 기억이 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커피를 내리면서 계속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여섯 번째 잔을 마시며 5살 때 지수 형이 내 신발 안에 레고를 넣어 놨던 걸 욕하던 중 기억이 끊겼다.

어떻게 침대까지 갔는지, 옷을 어떻게 벗은 건지, 아니 그 전에 왜 옷을 벗겠다는 생각을 한 건지도 모르겠다.

어제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또 그 분위기로 간 거냐?

설마, 혹시, 그러니까 진짜 아주아주 혹시라도 술에 취해 이성을 잃고는 자신이 형을 덮친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떠올린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래, 그러니까 이건 설마다. 그저 가정일 뿐이다.

일단 힘의 차이가 크기도 하니, 자신만 취한 상태였으면 형은 얼마든지 날 밀어낼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랬을 거라 확신하기엔 어제 형도 꽤 마셨다. 만약 취한 상태에서 자신이 먼저 덤벼든 거라면…….

“저기 형…….”

“말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진짜 아주아주아주 만약의 경우를 가정해 그렇게 묻자 커피를 마시던 형이 이쪽을 돌아보며 시선을 맞춘다.

그러곤 아주 예쁘게 웃는다.

“……진심으로, 그게 알고 싶어?”

진심으로 어젯밤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싶은 거냐는 형의 되물음에 침을 삼키며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진짜 그게 알고 싶은 거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그다지 알고 싶지 않다. 옷을 입을 때 다리 사이에 끈끈한 액체로 추정되는 것이 말라붙어 있었던 걸로 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너무 뻔하기에 알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 일이니 내가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무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리 불편한 진실이라 해도 내가 한 일이라면 책임을 져야 하고, 그래야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테니까…….

“저기…….”

“응?”

“저기 혹시…….”

“말해.”

“저기…… 혹시 제가…….”

형을 덮쳤나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도저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걸 자신의 입으로 묻기 민망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 진짜 내가 덮쳤다면 그 뒷일을 감당하기 힘들어질 것 같았다.

불편한 진실을 파헤치고 당당하게 그 일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이냐, 주사로 인한 실수 따위 깔끔하게 묻고 금주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것이냐?

쉽사리 결정할 수 없는 상황에 고개를 들어 이 사건의 최대 피해자인 형을 바라봤다.

이 모든 건 형의 결정에 따라야 하는 일이었다.

“형…….”

다시 한번 단전에서 목소리를 끌어내 겨우 형을 부르자 형이 왜 자꾸 부르냐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혹시, 어제 제가 형을…….”

“나를?”

“가…….”

“가?”

“가…….”

회피하고 싶은 마음을 내리누른 양심의 소리에, 용기를 내 혹시 내가 형을 덮친 거냐고 물으려 했지만 바로 시선을 마주한 형의 눈빛이 ‘어디 그 얘기 하기만 해 봐라.’라고 번뜩이고 있어 관두기로 했다.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 건 묻는 게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침, 드실래요?”

“그래.”

“……어제 해 둔 만두가 많은데 만둣국이 좋으세요, 아니면 떡만둣국이 좋으세요?”

혹시 몰라 떡도 사 왔어요, 라고 비굴하게 속삭이며 형의 답을 기다리자 형이 빠르게 메뉴를 선택한다.

“만둣국.”

“육수부터 내겠습니다.”

“그래.”

일단 이 숨 막히는 분위기를 피하기 위해 식사 준비를 한다는 핑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그러곤 어느 날보다도 진하면서 깔끔하고 뒷맛이 깨끗한 육수를 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양심 따위 신변의 안전 앞에서는 한없이 얄팍한 것이었다.

* * *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수현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이불 빨래였다. 마침 오늘 볕은 여름만큼이나 좋았고 알몸으로 자고 일어난 이불을 그냥 둘 수는 없어 부지런히 이불을 걷어 세탁기에 돌리곤 청소를 시작했다.

어제 대충 정리를 해 두긴 했지만 그래도 밀가루 등 여기저기 흔적이 남았을까 깔끔하게 집 안을 청소했다.

물론, 그건 청결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형과 마주 앉는 상황을 어떻게든 피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아침 식사를 하는 내내 어색해 미칠 것 같았다. 오늘은 도저히 형과 눈을 마주칠 수 없어 없는 일까지 만들어 가며 움직이고 있었지만 넓은 집이 아니다 보니 금세 레퍼토리가 바닥났다.

이제 남은 곳은 욕실뿐이다. 그런데 욕실도 어제 이미 형이 청소를 해 둔 상태라 청소할 게 없다.

이제 또 뭘 해야 하나 고민하다 설거지한 뒤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서류를 작성하고 있는 형의 뒷모습을 힐끔 바라봤다.

차라리 형이 계속 바빴으면 좋겠다. 그럼 핑계 대고 혼자 마트에라도 다녀올 텐데…….

어제 식재료는 하도 많이 사다 놓은 상태라 살 게 없지만 그래도 살 건 뭐든 만들어 내면 된다.

세제든, 화장지든…….

“아니, 세상에. 섬유 유연제가 얼마 안 남은 걸 깜빡했네. 오늘 빨래를 많이 해야 하는데.”

거의 국어책을 읽는 듯 어색한 어조로 긴급 상황을 읊은 뒤 다시 형을 흘깃 보며 어색하게 말을 건넸다.

“형, 저 섬유 유연제 좀 사 와야 할 것 같아요…….”

그럼 다녀올게요, 라고 하곤 삐걱거리는 걸음으로 휴대폰과 차 키를 찾기 위해 침실로 들어가려는데 형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건넨다.

“조금 이따 나랑 같이 나가.”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었다, 형은. 같이 있기 어색해서 나가는 건데 같이 나가자니 어불성설이다.

“섬유 유연제만 사 오면 되니까 괜찮아요. 금방 다녀올게요.”

“이것만 정리하면 되니까 기다려. 오늘 날씨가 좋아서 산책도 하고 싶으니까.”

“여기 오피스촌이라 주변에 도로뿐이에요. 공원 없어요. 공기도 더럽고요. 게다가 저 먼지로 뿌연 하늘 보세요. 해도 안 보이고 우중충한 게 걸어 다니면 폐가 썩을걸요.”

“누가 여기서 걷는대?”

당연히 차 갖고 나갈 거다, 라는 말이었다, 그건.

그래, 어차피 마트를 가도 차를 갖고 가야 하니 나간 김에 공원에 가면 되는 거다.

그래, 그랬다.

내가 또 무덤을 팠다.

이 집에 단둘이 있는 것도 숨 막히는데 차 안에 단둘이라니 상상만 해도 토할 것 같다.

“아, 이런! 생각해 보니 오늘 빨래에 쓸 건 있을 것 같아요. 지난번에 샘플 받은 걸 깜빡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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