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160)

형하고 한 차를 타고 가는 건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 대충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하는데, 문득 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형 옷 드라이클리닝 맡기실 거 있으세요? 맞다! 형 드레스 셔츠는 세탁소에 맡겨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양복도.”

제가 다림질을 더럽게 못해서요, 라는 변명을 덧붙일 여유도 없이 노트북을 바라보던 형이 조용히 뒤를 돌아본다.

헛소리 그만하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제대로 하라고 다그치는 눈빛이었다.

“……그게요…….”

지금은 형하고 한 공간에 있기 너무 불편하다고 말할 수는 없어 가장 무난한 표현을 고르는데 침실 쪽에서 휴대폰 벨 소리가 들려왔다. 형은 휴대폰을 식탁 위에 둔 상태니 자신의 휴대폰 소리였다.

“이런! 전화가 왔네요.”

세상에서 제일 경직된 음성으로 그렇게 외치며 후다닥 침실로 뛰어 들어갔다.

이 순간만은 보험 광고 전화, 아니 피싱 전화라도 상냥하게 받아 줄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통화를 오래 끌어 주면 더 감사할 거라는 생각에 침대 옆 사이드테이블 위에 둔 휴대폰을 손에 들자, ‘서주영’이라는 이름이 반짝인다.

30분 이상 통화가 가능한 상대의 이름에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너무 반가워 목소리까지 뒤집으며 전화를 받자 주영이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다.

- 어? 어…… 일어나 있었어?

“아까 일어났지.”

그 말을 하고 나니 그제야 주말인데도 7시에 깼다는 게 조금 억울해졌다. 일 정리돼서 한동안은 여유 있겠지만 그래도 주말은 주말인데, 지난 이틀간 너무 빨리 일어났다.

보통 주말에는 늘어지게 잔 뒤 느긋하게 요리를 해 풍성하게 먹고 종일 뒹굴거리며 친구들과 누가 누가 제일 게으른가 대결을 해야 하는데, 너무 부지런했다.

주말은 이렇게 보내는 게 아니다.

갑자기 몰려오는 후회와 함께 쓸데없이 부지런한 몸뚱이에 절망하는 사이 주영이 조심스레 묻는다.

- 그럼 이따 잠깐 볼 수 있어?

“물론, 무조건 가능해. 어디서?”

- 아, 어제 형이랑 술 마셔서 황태해장국 먹고 카페에 가려고 하는데 너희 1층 라테 생각나서. 마침, 너한테 할 말도 있고.

“그럼, 어서 와.”

- 지금 주차장 가는 길이야. 주말이라 길 안 막하니까 한 5분 정도 걸릴 거야.

차로 5분 정도라면, 주차장에서 차 빼는 시간까지 해서 10분 정도다.

“나도 지금 내려갈게.”

- 그래.

짤막한 통화를 마무리한 뒤 두 주먹을 불끈 쥔 수현은 소리 없이 ‘예스!’라고 외쳤다.

주영이 아주 기가 막힌 타이밍에,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약속을 잡아 줬다.

드디어 합법적으로 집을 혼자 벗어날 수 있는 상황이 오자 수현은 휴대폰을 손에 든 채 서둘러 침실을 나갔다.

“저기, 형.”

침실 문 바로 옆의 식탁에서 여전히 작업 중인 형을 부르자 형이 또 뭐냐는 눈빛으로 뒤를 돌아본다.

오늘 종일 형을 부르기만 하고 문장 하나를 제대로 이어 본 적이 없기에 저 눈빛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재빨리 본론을 꺼냈다.

“저 잠깐 1층에 내려갔다 올게요. 삼촌하고 주영이가 근처에서 밥 먹고 카페에 올 건가 봐요. 잠깐 얼굴 좀 보자고 해서요.”

여기 라테가 진짜 맛있거든요, 라고 괜스레 찔려 변명을 더하자 현규 형이 의외로 시원하게 답을 내 준다.

“다녀와.”

네 다리로 네가 가는데 어딜 가든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시선을 돌려 화면을 바라보는 형의 뒷모습에 다시 주먹을 불끈 쥔 채 서둘러 현관으로 향했다.

“그럼, 다녀올게요.”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이라는 말은 빼고 인사를 한 뒤 슬리퍼를 신은 채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휴대폰을 꺼내 나 지금 내려가는데 먼저 주문해 둘까, 라고 메시지를 보내자 곧장 답장이 온다.

[아이스라테 2. 하나는 오트밀로. 하나는 시럽 두 펌핑.]

오트밀은 삼촌이고 시럽은 주영이다. 주영이는 잘 몰라도 삼촌 식성은 뻔하기에 알겠다고 메시지를 보낸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곧장 홀을 지나 카페로 향해 가는데 한산한 카페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주중에는 늘 사람들로 꽉 차 있지만 주말에는 유동 인구가 없어 한산한 게 매력인 카페였다.

가을이라서인지 오늘은 특히나 느긋하고 나른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카페로 들어서 음료를 주문한 뒤 외부 테이블로 가 앉자 따뜻한 햇빛이 피부를 간질인다.

생각보다 볕이 강하다. 예전에 아버지가 여름 햇살보다 가을볕이 더 가혹하다고 해서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이런 느낌이었던 모양이다.

여름보다 건조하고 바람이 불어 더위는 덜하지만 볕은 더 따갑다.

마치 피부 안으로도 아주 날카로운 바늘들이 와 박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은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일단 집을 탈출했다는 것만으로도 태풍이 불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어,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 일광욕을 시작했다. 그러고 있자니 졸음까지 쏟아져 작게 하품을 한 뒤 의자에 빨래처럼 축 늘어져 있는데 익숙한 차 한 대가 건물 앞에 멈춰 서는 게 보였다.

주영의 세단이다.

싫어도 알아볼 수밖에 없는 게 보기 드문 하늘색 세단인 탓이었다. 쟤도 취향 특이하다는 생각을 하며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색감의 차를 향해 손을 번쩍 들어 올리자 곧 차 문이 열린다. 그리고 삼촌과 주영이 차에서 나란히 내려 이쪽으로 다가선다.

“오랜만.”

말로는 오랜만이라고 하지만 삼촌은 바로 그제 오후에 봤었고 주영이도 나흘 전에 보긴 했다. 제정신이 아닐 때 봐서 꿈인지 현실인지 살짝 헷갈리긴 하지만, 하여간 보긴 봤다.

“음료는 좀 이따 나올 거야. 앉아.”

자신의 앞자리를 가리키며 어서 앉으라고 손짓하자 주영이 맞은편 자리에 앉으려다 멈칫한다. 그러곤 표정을 굳힌 채 자신을 바라보다 옆에 선 삼촌을 돌아본다.

마치 어떻게 해야 하냐고 도움을 청하는 듯한 그 시선에 주영에게 물었다.

“왜?”

“어…….”

“응?”

무슨 일이냐는 물음에 주영이 자신을 힐끔 보곤 다시 삼촌을 바라본다. 난처해하는 게 분명한 얼굴이었다.

“왜 그래?”

문제가 있으면 뭐든 말하라고 주영과 삼촌을 번갈아 봤지만 어쩔 줄 몰라 하는 주영과 달리 삼촌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입고 있던 트렌치코트를 벗어 먼저 의자 등받이에 걸고 있었다.

삼촌의 태연한 태도에 정신없이 삼촌과 이쪽을 돌아보던 주영이 이내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

“왜? 뭐 문제 있어?”

“아니……. 그냥…… 저기, 현규 형은?”

여전히 어색한 태도로 쭈뼛거리며 주영은 마치 화제를 돌리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그 의도가 눈에 보이긴 했지만 일단 그에 응해 줬다.

“형은 집에서 일하는 중. 전기부 바쁜 시긴데 며칠 계속 나랑 같이 정시 퇴근해서 바쁠 거야.”

“아…… 그렇구나…….”

그렇게 말하며 웃는 주영의 얼굴에는 ‘그럼 안 내려오시겠구나.’라는 안도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어색함은 남아 있었다.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부자연스럽게 웃는 주영의 얼굴에 얘 왜 이러냐고 삼촌을 돌아보자 삼촌이 싱긋 웃는다.

그런데 웃는 게 순수하게 웃는 게 아니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어서 잔소리를 장착 중일 때 나오는 미소다.

그리고 그 예감은 여지없이 맞아떨어졌다.

“주말이기도 하고, 엘리베이터만 타고 내려오면 있는 건물 내의 카페라 편한 건 알겠지만…… 아무리 그대로 슬리퍼는 좀 그렇지 않을까?”

어쨌든 여긴 오피스 거리고 많은 사람이 오가는 카페인데 타인에 대한 예의는 조금 지켜 달라는 삼촌의 말에 서둘러 자세를 바로 하며 얌전히 발을 모았다.

“급하게 나오느라고…… 조심할게.”

그러지 않아도 현규 형에게도 한 번 주의를 받은 터라 외출 시 슬리퍼는 주의할 예정이라고 재빨리 반성의 태도를 보이자 삼촌이 좋은 해결책을 제시해 준다.

“편하게 신는 운동화 없어?”

“있는데…… 좀 답답해서.”

뒤꿈치 까져, 라고 작게 웅얼거리자 삼촌이 웃으며 그럼 다른 걸 신으라고 알려 준다.

“뮬 있잖아. 그리고 이제 날 추워졌어. 발 시려.”

그건 양말 좀 신고 다니라는 말이었다.

“잘 신고 다닐게.”

“내가 어제 현규한테 문서 하나 보냈는데 확인 안 했나 보네.”

이 새끼가 감히 애를 맨발로 내보내네, 라는 말이 생략된 기분에 수현은 서둘러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어제 이미 많이 샀어. 옷도 아주 많이 샀으니 걱정 안 해도 돼. 신발은…… 다음 주에 살게.”

“그래야지. 여기가 주택가라 서로 그런 부분을 양해해 주는 분위기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잖아?”

“응.”

여지없이 시작되는 삼촌의 잔소리에 서둘러 대충 대꾸하고 시선을 돌리는데 마침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아, 커피 나왔다. 커피 가져올게.”

화제를 전환할 아주 적절한 기회에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가 음료가 든 쟁반을 받아 들었다. 그러곤 곧 테이블로 돌아와 점원이 알려 준 대로 노란 빨대는 주영이, 빨간 빨대는 삼촌에게 건넨 뒤 머그를 들고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따뜻한 카페 라테를 한 모금 마시자 바로 앞에서 아이스라테를 한 모금 넘긴 주영이 마음에 든다는 듯 웃는다.

“여기 커피 먹고 싶었어. 자꾸 생각나서.”

“인사 와, 그럼.”

이미 여러 번 나도 마침 심심하니 인사 오라고 권했지만 주영은 그때마다 직장이 멀어서 곤란하다고 거절했었다. 그래서 당연히 이번에도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이번엔 좀 달랐다.

“그러지 않아도 지금 알아보는 중이야. 그런데 이 건물에는 매물 나온 게 없더라고.”

“응?”

“독립한다고.”

주영에게서 들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그 단어에 놀라 커피를 뿜어낼 뻔했다.

“독립한다고?”

“응.”

“왜?”

어차피 곧 삼촌하고 결혼할 텐데 결혼해서 나가지, 라는 말을 줄여 그렇게 묻자 주영이 곤란한 듯 어색하게 웃는다.

그게 쉽게 되겠냐는 미소였다. 그리고 삼촌 역시 주영과 같은 의견인 모양이었다.

“너희가 집안에 핵폭탄을 터트려 놓고 우리한테 같은 짓을 하라고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그건 그런데…… 진짜 독립하려고?”

“응.”

“어…… 오메가 혼자 살기에는 좀 위험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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