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160)

오메가인 자신이 할 말은 아니지만 자신의 경우는 아주 특이한 케이스고, 주영은 좀 위험해 보여 걱정하자 주영이 테이블 위로 삼촌의 손을 잡는다. 그러곤 시선을 돌려 삼촌을 바라본다.

“그래서 이쪽 오피스텔 알아보다 여기 매물 없어서 해준 형 아파트로 알아보는 중이야.”

시선을 마주한 채 웃는 두 사람은 아주 행복해 보였다.

그 달달한 분위기도 그렇지만 주영의 오른손을 잡은 삼촌의 왼손에 있는 반지에 정신이 확 들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웨딩밴드였다.

“삼촌, 프러포즈했어?”

삼촌과 함께 봤던 바로 그 프러포즈 링이라 놀라 묻자 삼촌이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긍정의 답이다.

“언제?”

“그제.”

너희가 사고 쳐서 정신없을 때, 라며 들어 보인 주영의 왼손에서도 삼촌과 같은 은색의 밴드가 반짝이고 있었다.

“와, 이걸로 했네?”

“너희한테 선수를 뺏겨서.”

“아…….”

프러포즈 링으로 딱이라 지금 네가 왼손에 끼고 있는 그 밴드를 주문하려고 했는데 현규 때문에 망쳤다는 삼촌의 원망에 그제야 나 커플링, 아니 프러포즈 링 끼고 있었지, 라고 깨달았다.

며칠 사이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터라 이 커플링을 빙자한 자칭 프러포즈 링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 웨딩밴드라고 해야 한다, 이젠.

그래, 그랬다.

이제 이건 결혼반지다. 혼인 신고를 했으니.

그렇게 생각하니 진짜 웨딩 밴드 같다. 원래 웨딩 밴드지만…….

“와, 축하해. 어쨌든 드디어 프러포즈했네.”

그래서 주영이 급하게 독립을 하려는 거구나, 하고 곧장 납득했다. 아직 집안의 허락을 못 받아 결혼은 못 하지만 어쨌든 프러포즈를 받았으니 조금 정리를 하려는 것 같았다.

그건 이해했다.

다만…….

“집에서 허락하셨어?”

“아니. 그냥 나오려고.”

역시나 굉장히 주영답지 않은 답에 놀라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냥 나오겠다고?”

“응.”

“혼날 텐데?”

작년에 멋대로 독립한 뒤 큰형한테 당한 게 떠올라 경험자로서 어지간한 각오가 아니면 그런 건 안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라고 조언했지만 예상외로 주영은 단호했다.

“각오하고 있어. 그래도 해 보려고.”

어떻게 결론이 나든 한번 부딪쳐 보겠다는 의미였다.

처음 보는 주영의 고집스러운 모습에 수현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넌 진원 형 같은 형은 없으니까…….”

밤새워 전화 100통 하고, 새벽 5시에 집에 찾아오진 않겠지, 그래, 그게 어디냐, 하고 수현은 곧 납득했다.

본인이 감당하겠다는데 제삼자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살다 보면 인생에 한 번쯤 이런 용기를 내야 할 때가 오는데, 주영에게는 그게 지금인 듯했다.

“그렇게 결심한 거면 잘해 봐. 이사할 때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하고.”

“고마워.”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뭔가 했는데 독립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조금 걱정이 되긴 하지만 어차피 해준 형네 근처로 나오는 거니 잘 알아서 하겠거니 할 수밖에 없었다.

생에 첫 이사 선물로 뭘 준비해야 하나 고민하며 다시 커피를 마시는데, 주영이 이쪽을 힐끔 바라보다 눈이 마주치자 서둘러 고개를 숙이며 커피를 마신다.

그러곤 다시 “날씨 좋네.”라고 의미 없는 말을 내뱉더니 아무것도 없는 주변을 휘휘 돌아본다. 그러다 본인도 민망한지 문득 말을 던진다.

“오늘 덥다. 어제는 시원했는데.”

“요즘 계속 날씨가 오락가락하니까.”

추울 것 같아 후드티 입고 출근했다 더워 죽을 뻔했다고 말하는데 계속해서 자신의 눈치를 보던 주영이 도저히 안 되겠다는 얼굴로 삼촌을 바라본다.

제발 좀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듯한 그 시선에 삼촌이 마시던 곧 잔을 내려 둔다. 그러곤 아주 자연스럽게 대화를 유도한다.

“현규랑 지내는 건 어때? 잘해 줘?”

“어…… 나쁘지는 않아. 의외로 집안일도 잘하고, 잘 챙겨 주긴 해.”

쇼핑할 때도 귀찮다고 직원한테 다 맡길 줄 알았는데 다 골라 주긴 했다. 그것도 사이즈까지 맞춰서 꼼꼼하게.

너무 세심해 조금 귀찮긴 했지만 대신 골라주니 편한 건 사실이었다.

“담요는? 샀어?”

“응. 그거 백화점에 없어서 찾느라 고생했어. 그런데 좋긴 하더라.”

“잘 했네. 현규가 그렇게 다정다감한 편은 아니라 걱정했는데.”

“다정하진 않아.”

절대, 조금도, 라고 확신을 담아 말하자 삼촌이 묘한 미소를 띤다.

“현규가 그 정도로 챙겨 주는 거면 엄청 다정한 거야.”

“……그게 다정한 거면 그건 진짜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그건,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 솔직히 유학 시절 초기에 나한테 하던 거 생각하면 지금 너한테 하는 건 인간이 바뀐 수준이니까.”

아니, 진짜 바뀐 걸 수도 있겠네, 라는 삼촌의 말에 의아함이 일었다.

현규 형과 삼촌이 유학 가서 처음 본 것도 아니고, 중고등학교 시절 꽤 마주쳤던 걸로 아는데, 그때 기억으로는 그렇게 나쁜 관계는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좋고 나쁘고 할 관계가 아니다. 8살이라는 나이 차이에 친구의 삼촌, 조카의 친구라는 관계라면 일반적으로 서로 이름도 알 필요 없는, 마주치면 눈인사만 하면 되는 관계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런 관계였다. 가끔 집이나 학교에서 보면 묵례로 인사만 할 뿐 서로의 이름도 잘 모르는…….

그 관계에서 뭐 안 좋을 게 있냐고 수현이 의아해하자 해준이 그런 수현이 귀엽다는 듯 웃는다.

진짜 현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하고.

“그러고 보니 너 현규랑 안 친했지? 고등학생 때는.”

“지금도 안 친한데?”

지나치게 솔직한 수현의 발언에 커피를 마시던 주영과 해준은 동시에 헛웃음을 흘렸다.

“혼인 신고까지 하고 안 친하다는 건 좀 그런 것 같은데?”

물론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건 이제 겨우 열흘이 넘었고 다시 만나자마자 작업부터 들어갔으니 이해는 하지만 뭔가 되게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수현 역시 그게 이상하다는 건 자각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기는 한데…… 뭔가 그런 느낌이 아니라…….”

뭔가 우리는 친해질 관계는 아니라는 느낌이라고 중얼거리며 수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 정확히 뭐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현규가 싫거나 친해지고 싶지 않다는 느낌이 아니라, 그냥 현규와 자신의 관계는 ‘친하다.’라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어쩐지…… 현규 형하고는 친해지지 않을 것 같아.”

“왜?”

“그런 느낌이 아냐. 친한 게 아니라 뭔가 좀 다른…….”

애매한 수현의 표현에 해준이 그런 수현을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묻는다.

“그게 뭔지 모르겠어?”

“응?”

“난 알 것 같은데?”

어린아이를 보듯 수현을 바라보는 해준의 물음에 수현이 눈을 껌뻑인다.

“그게 뭔데?”

“너도 알걸.”

“……내가?”

“응. 아마 알고 있을 거야, 이미. 그런데 그냥 모르는 척하고 싶은 거겠지.”

“……왜?”

“그건 난 모르지. 네가 알지.”

“어…….”

그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해준이 뭘 말하는 건지, 수현은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말 그대로 자신이 지금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알 것 같기는 한데…….”

“그래?”

“응.”

“그럼, 네가 생각해 봐. 내가 널 진짜 너무 곱게 키운 것 같기는 하니까 이젠 네가 고민하고 생각해서 알아내 봐, 뭐든.”

“……고민해 볼게.”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수현의 착실한 답에 해준이 앞으로 몸을 숙이며 은밀한 투로 말을 건넨다.

“이대로는 현규한테 너무 유리하니, 너한테도 카드를 하나 던져 줄게.”

“응?”

“처음부터 얘기했지만 현규는 주영이와의 약혼을 얼마든지 거절할 수 있었어.”

그러니까 둘이 사귀니 마니 하다 혼인 신고까지 갈 필요도 없이 현규가 ‘NO’만 외치면 끝날 일이었다고 해준은 확신하고 있었다.

강 대표는 힘이 없고 회장은 현규에 대한 신뢰가 너무 강하기에 그 집안의 실권자는 현규였다. 그러니 결혼 문제에 있어서도 현규는 독립적인 의사 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물론, 집안과 완전히 대립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따를 의무도 없다.

그 집안에서 제일 질색하는 건 결혼을 안 하는 게 아니라 결혼 후 줄줄이 혼외자를 달고 오는 거니까.

“어, 그런데 형이 서른 살까지 결혼하는 조건으로 주식을 증여받아서 결혼은 해야 한다고 하던데…….”

그래서 집안 결정에 따라야 한다고 했다고 수현이 해준이 모르고 있는 사실을 알려 주자 그때까지 조용하던 주영이 눈을 껌뻑인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현규 형이 그래?”

“응.”

“어…….”

“왜?”

“……내가 그 집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건 아닐걸?”

“응?”

“내가 알기로는 현규 형 할아버지께서 아버님한테 하도 데여서 결혼은 차라리 철들고 늦은 나이에 하는 쪽을 권하신 걸로 알아. 만약 결혼 후에 혼외자가 하나라도 나타나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증여한 주식을 전부 거둬들이실 거라고. 그래서 현규 형도 늘 입버릇처럼 결혼 후에는 상대든 자기든 바람피우는 건 상관없지만 혼외자는 절대 안 된다고 했거든. 현규 형도 혼외자라면 질색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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