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그대로 집에 돌아갈 생각은 아니다. 그냥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천천히 산책이나 할 생각이었다.
연락을 못 받은 건 휴대폰이 방전돼서라고 하면 되니까…….
이런저런 계획을 짜며 머그를 반납하러 카운터로 가는데 카운터의 왼쪽에 있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옆으로 돌아본 순간 당황해 몸을 움찔했다.
하지만 그쪽은 전혀 개의치 않고는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다가섰다. 그러곤 물었다.
“해준 형하고 주영이는?”
“……방금 갔어요. 영화 예매해 놨다고…….”
게으름 부리지 말고 빨리 나갈걸, 하고 후회해도 이미 늦은 후였다. 이렇게 딱 마주쳤으니 피해 갈 수도 없다.
“마침 잘됐네. 가자.”
해준과 주영이 아직 있었으면 인사나 할까 했는데 벌써 갔다면 됐다고, 현규가 먼저 돌아서 로비 쪽의 출입구로 나서자 수현도 얼결에 현규를 따라 가게를 나섰다.
“커피 안 사세요?”
“어차피 마트에 갈 테니 괜찮아. 점심으로 외식하고 산책하고서 돌아오는 길에 마시면 돼.”
그 말에 현규를 쭈욱 훑어보니 실내복 차림이 아니다. 회색 맨투맨 티셔츠에 면바지, 그리고 딱 삼촌이 좋아할 만한 보트슈즈에 차 키와 휴대폰만 손에 든, 외출복 차림이었다.
“형, 일은요?”
“다 했어. 섬유 유연제 산다고 했지?”
“그거 안 급해요! 당장 안 사도 돼요! 자매품, 아니 사은품 샘플 받은 거 있어요.”
그러니 그냥 올라가자고 수현은 필사적으로 현규를 만류했다. 지금도 어색한데 그 좁은 차 안에서 단둘이 있어야 한다니, 그것만은 싫다. 오피스텔은 그나마 욕실과 침실과 거실이 분리라도 돼 있지.
“생각난 김에 사야지. 시간이 또 언제 날지도 모르는데.”
“아니, 그…… 아! 빨래! 저 이불 빨래했잖아요! 그거 널어야 돼요!”
순간 현규 형이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이쪽을 내려다본다.
그래, 여긴 오피스텔이다. 그것도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오피스텔이라 이불을 널 테라스 따윈 없다.
자신은 한 번도 이 집에서 빨래를 널어 본 적이 없다. 그저 건조기에 돌린 뒤 창문을 열고 몇 번 털어 주는 게 전부다.
“건조기에 넣었으니 2시간 뒤에 건조 끝날 거야.”
이제 됐지, 라는 얼굴로 다시 로비를 가로지른 현규가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모습에 수연은 낭패라는 듯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어제부터 계속 잔머리 굴리다 독박만 쓰고 있다.
이래서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되는 거다.
오늘도 또 망했다는 생각에 형을 따라 걸으며 끙끙대는데 문득 자신의 발이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본 순간 확하고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저기, 형.”
“또 왜?”
“저 지금 추리닝에 슬리퍼 차림이라 외출하기 좀 그런데요…….”
그러니 차라리 다시 올라가자고 하자 현규 형이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그 차림으로 출근도 하는 놈이 무슨 약한 소리냐는 얼굴이었다, 그건. 그리고 그건 수현도 조금 찔린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자신이 이런 차림으로 다니는 것도 사실이고 의외로 마트는 이런 차림으로 다니는 사람이 꽤 된다.
왜냐면 내가 늘 이 차림으로 가니까…….
“전 괜찮은데요…… 혹시라도 형이 저 때문에 창피해하실까 봐요.”
“상관없어. 내가 입은 거 아니니까.”
난 그런 사소한 일에는 신경 안 쓴다며 현규가 막 열린 엘리베이터 안쪽으로 들어서자 수현 역시 죽을상을 한 채 그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순간 처음으로 빨리 출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당분간 퇴근은 안 했으면 좋겠다고도 떠올렸다.
적어도 이 쪽팔림이 사라지는 순간까지만이라도.
* * *
‘나는 침묵을 참지 못한다.’
마트에서 쇼핑한 뒤 점심을 먹고, 커피를 사 공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수현은 태어난 후 처음으로 자신이 침묵에 대해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불어 침묵과 고요에 대한 알레르기가 수치심과 죄책감을 뛰어넘는 편이라는 것 역시 깨닫게 되었다.
냉정하게 말해 자신의 양심은 신변의 안전뿐 아니라 침묵 앞에서도 별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집안뿐 아니라 밖에서도 하도 시끄러운 사람들만 있어 지금까지 그걸 알아채지 못했던 것 같다.
“……날씨가 갑자기 다시 더워졌네요.”
“……그래.”
“옷 입기 애매한 것 같아요.”
“그런 시기니까.”
“……내일부터는 양복 입고 출근할 건데 재킷 입고 다니는 게 좋을까요?”
“마음대로.”
계속되는 침묵을 참지 못해 결국 아무 의미 없는 말들을 줄줄이 떠들어 댔지만 현규의 반응이 너무 나쁘다.
말은 많지 않아도 눈빛이나 표정이 다양해 조용하다는 느낌은 아니었는데 오늘은 너무 반응이 약하니 미치겠다. 이 어색함을 참을 수 없다.
“저기, 형…….”
“왜?”
“화났어요?”
“아니.”
“그런데 왜 이렇게 답이 짧으세요?”
“원래 그런데?”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다. 맞다.
원래 눈빛으로 주로 말하고 말이 짧은 사람이긴 했다.
최근 워낙 대화를 길게 해서 착각했을 뿐.
“그렇군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차 안에 침묵이 돌기 시작했다. 사이가 좋을 때도 참기 힘든 침묵을 오늘처럼 어색한 관계일 때 겪자 더 참기 힘들다.
그래서 대화의 방향을 틀었다.
“아, 주영이 독립한대요.”
삼촌과 주영이가 왔던 이유를 궁금해할 것 같아 먼저 말을 걸자 운전을 하던 형이 이번엔 그럴듯한 반응을 보였다.
“……주영이가?”
“네.”
“……해준 형하고 동거하는 거야?”
“아뇨. 그냥 삼촌 아파트 단지로 나온대요.”
“……왜?”
그럴 거면 그냥 같이 살지, 라는 의미였다.
역시 사람 생각하는 건 다 비슷한 모양이다.
“저도 그래서 이상하다 했는데 정식으로 허락받고 결혼하고 싶대요.”
“……그런 걸 두고 시간 낭비라고 하지.”
“비효율적이긴 하죠.”
그렇다고 일단 혼인 신고부터 한 뒤 허락을 하든 말든 알 바는 아니지만 일단 통보는 하겠다고 접수증 사진만 덜컥 보내는 것도 합리적이지는 않지만 어쨌든 너무 기다리기만 하는 것도 불합리하다.
두 사람 성격상 지금까지처럼 연애하면서 무던히 기다리긴 하겠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빨리 동거라도 해서 좀 더 오래 같이 있었으면 하는 게 개인적인 바람이었다.
삼촌은 많이 외로운 사람이니까.
“빨리 결혼했으면 좋겠는데…….”
“……왜?”
“삼촌이 외로움을 많이 타거든요. 할아버지가 양자로 들인다고 하시긴 했지만, 호칭만 삼촌이지 거의 우리 큰형처럼 자랐는데…… 우리 집이 늘 시끄럽고 우당탕탕이라 안 그럴 것 같은데 그래도 삼촌은 가족이 그리운가 봐요. 우리를 친가족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것과는 별개로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게 있는 것 같거든요. 10살 때 돌아가셔서인지 너무 뚜렷하게 기억을 해서요.”
“……그랬어?”
“네. 그래서 할아버지가 몇 번이나 입양하고 싶다고 했는데 삼촌이 거절했어요. 이해준이 아니라 윤해준으로 살고 싶다고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저랑 결혼을 추진하려고 하신 거죠.”
처음 듣는 그 이야기에 현규는 놀라 브레이크를 밟을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해준의 스토커 때문에 결혼시키려고 했다는 것도 황당한데 단지 해준의 성을 ‘이’씨로 만들지 못해 결혼시키려고 했다는 건 더 경악스러웠다.
지금까지 들었던 결혼 사유 중 최악이다.
“……잠깐, 잠깐만. 해준 형을 이씨로 만들지 못해서 너랑 결혼을 추진했다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현규가 기겁하자 수현이 눈을 껌뻑인다.
“제가 말 안 했나요?”
“처음 들어.”
“어…… 지수 형이 얘기 안 했어요?”
“너랑 해준 형 약혼 이유는 삼겹살집에서 처음 들었어.”
바로 일주일 전까지 난 너랑 해준 형이 곧 결혼할 걸로 알고 있었다고 현규는 다시 마음을 진정시키며 덧붙였다.
사실 세상은 넓고 사연 듣다 보면 별별 사연이 다 있지만 전 세계의 결혼 사유를 통틀어 이렇게 당혹스러운 케이스는 처음이었다. 꿈에서 돌아가신 증조부께서 나타나 반드시 눈 밑에 흉터가 있는 여자와 결혼을 시키라고 했다고 진짜 눈 밑에 흉터가 있는 여자를 찾은 아버지가 강제로 결혼식장을 잡았다고 미치려고 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이건 그만큼이나 기가 막힌 이야기였다.
확실히 저 집안도 정상은 아니다. 이 대표님만 이상한 줄 알았는데 할아버지도 좀 이상한 것 같다.
“그랬구나. 뭐, 떠들고 다닐 얘기는 아니니까요. 제가 태어나고 삼촌이 절 정성껏 키워서 저랑 차라리 결혼시켜서라도 우리 집 가족으로 만들고 싶어 하셨어요, 할아버지가. 우리 집 유전자 개량이 일생의 목표셔서요.”
갈수록 가관이라고, 갑자기 나온 개량 소리에 현규는 겨우 공원 근처의 공영 주차장으로 들어서며 빠르게 되물었다.
“개량?”
“네. 사실 삼촌이 우리 할아버지의 이상 그 자체거든요. 조용하고 우아하고 목소리는 나긋나긋해 누구나 보면 품위 있다고 하는 스타일이요. 약간 그림 같은 스타일이라고나 할까요? 만지면 되게 부드럽고 상냥할 것 같은?”
너무나 구체적인 수현의 설명에 현규는 싫어도 그걸 이해해 버리고 말았다.
해준이 기본적으로 다정하고 부드러운 건 사실이다. 그리고 품위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비싼 물건으로 꾸미고 품위 있는 척을 해서가 아니라 사람 자체가 타고난 특유의 기품이 있었다.
게다가 말투까지 우아하니 온 집안사람이 복식 호흡을 기본으로 흉통에서 소리를 질러 대는 그 집안에서는 당연히 부러워할 만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을 집안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손주와 결혼시키려 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래서, 저랑 결혼시켜서 제가 삼촌처럼 예쁘고 상냥한 아이를 낳아 집안의 DNA를 개량해 보려고 했는데 실패한 거죠.”
“……이번엔 진심으로 물어보는 건데 할아버지께서 무슨 일만 생기면 결혼으로 해결하려고 하시는 분인 건 아니겠지?”
“설마요. 삼촌 문제만 그래요. 우리 할아버지의 숙원 사업이거든요.”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