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삼촌이 빨리 주영이랑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삼촌이 애는 저 하나 키운 걸로 족하다고 하긴 했는데 육아 레벨 초고수인데 그 재능을 썩히는 건 아깝잖아요.”
우리 삼촌은 진짜 잘 키울 거예요, 라는 말에는 현규도 동의했다.
14살의 수현도 높은 육아 레벨이 필요할 거라고 느꼈는데 태어난 순간부터 수현을 키운 거라면 어떤 아이든 잘 키울 수 있을 거다, 해준 형은. 그것도 사랑을 듬뿍 주며 아주 헌신적으로.
이쪽 입장에서는 아주 귀찮지만…….
“……도와줄까?”
“네?”
“해준 형하고 주영이 결혼.”
그 두 사람이 빨리 정리가 돼야 이쪽도 교통정리가 될 것 같아 그렇게 말을 던진 현규는 한참을 들어가 안쪽에 있는 빈 공간을 보곤 차를 멈췄다. 그러곤 주차를 하려 후진을 하는데 뜻밖의 답이 나왔다.
“어…… 아뇨. 그건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당연히 반색할 줄 알았던 수현의 거절에 현규가 조금 놀란 듯 차를 멈춘다.
“……왜?”
“제 문제도 그렇지만 삼촌 문제는 삼촌이 해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프러포즈도 했다니 이제 두 사람이 같이 해결해야죠. 누군가 간섭하기 시작하면 온 가족이 다 뛰어들 텐데, 지금 삼촌이랑 주영이한테는 그게 오히려 역효과이기도 하고요.”
꽤나 냉정하게 상황을 보고 있는 수현의 판단에 주차를 하던 현규는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웃음이 삐져나올 것 같아 참기 곤혹스러웠다.
원래는 확실히 술버릇을 고쳐 놓을 때까지는 화를 낼 생각이었는데 그게 잘 안 된다.
“아마 그것 때문에 주영이가 독립하는 것 같아요. 프러포즈 링도 했더라고요.”
“그건 해야지. 커플링 겸으로.”
그쪽 커플이 이쪽처럼 페로몬 샤워한 채로 출근하게 할 스타일은 아니니 확실히 나 임자 있다고 어필할 만한 증거가 있어야 하고, 그중 가장 대중적인 게 반지니까.
그렇게 납득하며 현규가 먼저 차에서 내리자 수현 역시 곧 조수석에서 내려선다.
해가 짧아져 서서히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 공원에서 현규는 커피를, 그리고 수현은 밀크티를 손에 든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벌써 바닥을 나뒹구는 낙엽과 건조해서 기분 좋은 바람에 따뜻한 밀크티를 손에 들고 걷던 수현은 왼손을 들어 현규에게 보여 줬다.
“원래 삼촌이 커플링 이걸로 하려고 했대요.”
“응?”
“그런데 형이 먼저 선수 치는 바람에 못 했다고 하더라고요. 지난번에 저랑 같이 가서 보고 이걸로 골랐는데 주영이 반지 사이즈를 몰라서 킵해 둔 거였거든요.”
“그럼, 미안하니 결혼할 때 내가 크게 선물한다고 전해 줘. 주영이랑 해준 형 둘이 상의해서 원하는 선물 리스트 보내라고 해.”
“어떤 거요?”
“원하는 거 뭐든.”
“뭐든?”
“뭐든. 집까지 가능하다고 전해 줘.”
“그건 아니죠.”
무슨 집을 선물로 주냐고 웃던 수현은 그새 기분이 좋아진 듯 환해진 얼굴로 밀크티를 마셨다. 그러곤 모처럼 화창한 날씨에 사람과 개로 가득한 공원을 가로질렀다.
그러다 문득 뭔가 생각난 듯 수현이 묻는다.
“그런데 주영이랑 그 얘기도 했는데…….”
“무슨 얘기?”
지금은 무슨 얘기를 하든 즐겁게 받아 주겠다고 현규가 너그럽게 답한 순간 수현이 빠르게 질문을 이어 갔다.
“형 주식 증여 조건이 서른까지 결혼해야 하는 거라는 게, 맞아요?”
“……응?”
“주영이가 형 증여 조건은 혼외자 안 만드는 거였다고 해서요.”
갑작스러운 수현의 질문에 현규는 커피를 마시다 멈칫했다.
“주영이가 그래?”
“네.”
어쩌다 그 이야기가 나왔는지 몰라도 가끔 주영이 눈치가 없어질 때가 있는데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던 모양이다.
그간 집안끼리 조금 알기는 해도 그렇게 친한 관계는 아니라 신경 쓰지 않았는데, 슬슬 주영이도 입단속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여기저기 귀찮은 것들이 널려 있다. 이쯤 되면 지뢰밭이다.
“주영이가 잘못 안 모양이네. 이건 할아버지랑 나 둘만 아는 얘기니까.”
“……그래요?”
“응. 아버지도 몰라.”
“대표님은 모르실 것 같아요.”
그분 인생의 목표는 오로지 우리 아버지랑 싸워 이기는 거니까, 라고 중얼거리며 막 노을이 가라앉기 시작한 공원을 서쪽으로 가로지르던 중 수현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왜?”
“어…….”
갑자기 무슨 일이냐는 현규의 물음에도 수현은 선뜻 답할 수 없었다. 자기도 잘 모르겠는 얼굴이었다.
“왜? 뭐 잊은 거 있어?”
“아뇨. 그건 아닌데…….”
“아닌데?”
“그냥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서요.”
목덜미를 왼손 손바닥으로 누른 수현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목 여기저기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에 현규가 서둘러 묻는다.
“어디가?”
“어……열이 좀 있는 것 같아요.”
목을 만지다 이번엔 아예 이마를 짚은 수현은 처음에는 손바닥으로 열을 재다, 그래도 잘 모르겠다는 듯 이마에 손등을 댔다.
하지만 그런 걸 스스로 구분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특히나 지금은 바람이 차가워 손도 식은 터라 감지하기 어려웠다.
“열 있어?”
“아뇨, 모르겠어요. 기분 탓인가…….”
갑자기 날이 추워져서 그런가, 라고 중얼거리던 수현은 잠시 후 다시 약간의 미열이 있는 것 같다고 말을 바꿨다.
몸이 따끈따끈하거나 욱신거리는 게 아니라 미묘하게 열감이 느껴졌다.
그걸 가늠할 수 없어 인상을 쓴 채 이번엔 컵을 왼손에 쥐곤 오른손으로 열을 재려 하자, 현규가 기가 찬 듯 웃는다.
“너 열 못 재지?”
따뜻한 컵을 들고 있던 손으로 재면 열이 느껴지겠냐, 라는 말에 수현은 ‘아.’ 하고 납득했다.
“원래, 못 재요. 전 손이나 이마로 열 재는 사람들 신기해요. 그걸 어떻게 알죠?”
“그게 감이고 눈치지.”
넌 눈치고 없고, 라는 말에 수현은 순순히 수긍했다.
“집에 가서 체온계로 재 봐야겠어요.”
“돌아가자.”
“공원 한 바퀴 돌고 가도 돼요. 많이 아프진 않아요.”
“너 감기 잘 걸린다고 했잖아. 지금 맨발에 슬리퍼고.”
아무리 낮에 날씨가 좋았다고 해도 가을은 가을이라, 수현처럼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사람은 드물었다. 얇은 실내복에 맨발이라면 아무리 차를 타고 실내로만 다녔다 해도 위험하다.
특히 해준 형이 보내 준 ‘이수현 사용 설명서’에 유독 환절기 감기에 대해 구구절절 적혀 있었던 걸로 봐서는 주의해야 한다.
진짜 손 많이 간다, 이수현.
내가 왜 이런 걸 골라서는, 이라고 후회하면서도 현규는 급한 듯 수현의 손을 잡고 성큼 걸음을 옮겨갔다.
그사이 해는 완전히 저물었고 바람은 더 차가워졌다. 마주 닿은 수현의 왼손 손바닥이 축축하고, 약간의 열감이 느껴졌다.
그걸 의식한 현규는 걸음을 서둘렀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 * *
“37도 4분이야.”
“아……. 애매하네요, 역시.”
37.4라면 고열이라기엔 낮고 미열이라기엔 높다. 약을 안 먹고 버틸 수는 있지만 그럼 좀 힘이 빠진다.
나른한 기분에 집에 와 소파에 기대 담요를 덮고 있던 수현은 해열제를 먹을지 말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보통 이 정도 열은 보일러 온도를 올리고 푹 자고 일어나면 내리는 편이라 그냥 무시하고 자는 편인데 오늘은 좀 심상치 않았다, 느낌이.
“어떻게 할래? 식사는 늦게 했는데 약 먹을래? 아니면 뭐라도 먹을래?”
“배고프진 않아요.”
“약은?”
“어…… 해열제가 있긴 한데 이 정도는 보통 그냥 푹 자고 일어나면 나아요.”
“이 정도면 높은 편이야. 머리는? 안 아파?”
“괜찮아요. 아파 봐야 숙취죠.”
“아…….”
그러고 보니 어제 그렇게 술을 마셨다면 약간 열이 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것도 그 정도로 취한 상태에서 알몸으로 잤으니까.
그렇게 납득한 수현은 어제 어렵게 쟁취해 온 밍크 담요를 꽁꽁 만 채 소파에 기대앉았다.
“어제 너무 취해서 그런 것 같아요. 계속 무리하기도 했고요. 원래 마감하고 나면 한번씩 이렇게 아프니까 푹 자면 나을 거예요.”
워낙에 짚이는 곳이 많아 수현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두 달간 이어진 강행군에 일주일 사이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만취한 게 두 번, 거기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대미지를 입을 일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니까 이건 흔히 말하는 피로와 술병의 콜라보다.
그러니까…….
“그냥 따뜻하게 하고 푹 자면 돼요.”
“차 줄까?”
“네. 저 위쪽 수납장에 보이차 있어요.”
정확히 차 종류까지 지정한 뒤 좁은 2인용 소파에 누운 수현이 텔레비전을 켜자 현규는 서둘러 집 안의 보일러의 온도를 올린 뒤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그리고 수현의 말대로 인덕션 바로 위의 수납장을 열어 금색 종이에 싸인 보이차를 꺼냈다.
그러곤 설거지하다 봤던 다기를 챙겨 차를 우리는데 소파에 몸을 구기고 누운 수현이 느긋하게 TV의 채널을 돌리고 있다.
그 폼이 아죽 익숙해 보였다. 해준의 설명대로 자주 아파 본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