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160)

“환절기에는 자주 이래?”

“아뇨. 자주는 아니고. 그냥 계절 바뀔 때 한 번씩 머리 아프거나 감기 오거나 해요. 이번에는 마감이 껴서 더 그런 것 같고요.”

“그래서 해준 형이 그렇게 네 옷 챙기라고 한 거네.”

“제가 그냥 두면 좀 대충 다니긴 해요.”

부들부들하고 적당히 두꺼운 담요의 감촉에 수현은 기분 좋은 듯 웃으며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컨디션이 아주 나쁘지는 않은 눈치였다.

어젯밤 본인이 한 짓이 있는 탓에 책임감을 느낀 현규는 계속해서 눈으로 수현의 상태를 살피며 차를 우려 곧장 소파로 다가섰다.

“수현아, 차 마셔.”

소파가 좁아 소파와 테이블 사이에 선 채 말을 건넸지만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수현?”

사람이 깨 있을 때는 인기척이라는 게 있는데 너무 조용했다. 그게 이상해 설마 하며 돌아보자 노란 소파 위에서 빨간 담요를 뒤집어쓴 수현이 정신없이 잠들어 있는 게 보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분명 깨 있었는데 어느새 잠이 들었다.

피곤한지 곤한 숨을 내쉬며 편히 잠든 그 모습에 현규는 굳이 수현을 깨우지 않고 텔레비전을 껐다.

그러곤 혹시나 해 다시 한번 수현을 불렀다.

“수현아?”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르며 뺨을 손등으로 살짝 쓸어내렸지만 아무 반응도 없다.

이 정도면 푹 잠든 거다. 확실히 몸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손 끝에 닿는 열기가 조금 높다.

설마 하며 다시 체온계를 들어 열을 재자 이번엔 조금 더 높게 측정되었다.

37.6이다.

병원에 가면 좋겠는데 응급실에 가기엔 높은 열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냥 두기에는 좀 높다.

계속해서 미묘하게 판단을 어렵게 하는 상황에 현규는 우선 수현을 안아 든 채 침실로 향했다. 담요로 꽁꽁 싸맨 수현을 일단 침대로 옮겨 눕힌 뒤 그 위에 마침 건조기에서 보송하게 마른 이불을 덮어 주었다.

“자고 있어.”

말할 필요도 없이 아주 깊게 잠든 수현을 혼자 둔 뒤 휴대폰을 들고 조용히 방을 나온 현규는 곧 해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12시쯤 영화를 예매했다고 했으니 지금쯤이면 충분히 끝났을 시간이다.

손목시계로 시각을 확인하며 아일랜드 식탁 앞에 선 채 초조한 듯 상판을 두드리는 사이 통화가 연결되었다.

- 응.

“수현이가 열이 나는데 응급실에 가야 되나요?”

- 응? 수현이, 열나?

아까는 괜찮았는데, 라고 해준이 놀라 되레 되물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오랜만에 통통하니 살이 쪄 반질반질해진 얼굴을 봤는데 그새 아프다니 좀 황당하다는 투였다.

“네. 어제 좀 과음을 했어요. 갑자기 만두 400개도 싸고…….”

원치 않던 자위까지 하게 됐고, 라는 말은 현규는 굳이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미 알고 있을 거다.

그래서 아까 그냥 내려보낸 거니까.

- 몇 도 나오는데?

“37도 6분이요.”

애가 아프니 일단 애 엄마에게 전화해 확인해야 할 것 같아 전화를 했는데, 역시나 해준은 빠르게 대처법을 알려 줬다.

- 잠은 자?

“네. 지금 자는 중입니다.”

- 그럼, 피로 누적 때문에 그럴 거야. 원래 계절도 타는데 만두 400개를 싼 거면 스트레스도 많이 받은 거야. 아파서 못 자는 거 아니면 그냥 자게 둬. 푹 자고 일어나면 금방 나을 거야.

역시 해준은 수현을 잘 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만두가 시그널이었던 모양이다.

“보통은 몇 개 싸는데요?”

- 보통 200개, 많으면 300개. 400개면 엄청 많이 쌓인 거야.

자기는 모르겠지만, 이라는 역시나 ‘이수현 사용 설명서’의 집필자다운 말에 현규는 일단 안심했다. 스트레스 때문이라면 차라리 낫다.

몸이 아픈 게 아니니 한 번 앓고 나면 개운해질 거다.

- 다른 데는 아프다고 하는 데 없지?

“딱히 아프다는 말은 없는데 열이 계속 오르는 것 같아서요.”

일단 열이 있다는 것 자체가 염증 반응이라 조금 걱정은 되는 상태였다. 거기다 계속 오르다 38도를 넘어가면 고열 상태다.

- 독감 같은 건 잘 안 걸리니까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체크하고 물 챙겨 먹이다 38도 넘으면 응급실로 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수액 맞으면 금방 나을 거야. 기침하거나 몸살 기운은 없지?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얻을 정보는 다 얻었으니 끊겠다며 서둘러 통화를 마무리하려는데 이번엔 해준이 현규를 잡는다.

- 잠깐.

“……네.”

- 우리 할 말 있을 것 같은데?

“수현이가 자고 있어서 침실에 좀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요.”

- 일단 푹 쉬게 놔둬야 하니 깨우지 말고 혼자 둬. 온도만 조절해 주고.

“잘 때 예민한가요?”

그런 느낌은 없었는데, 라는 말에 해준이 곧장 받아친다.

- 전혀. 한번 잠들면 옆집에서 굴착 공사를 해도 몰라.

“……그건 신경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요?”

- 수현이는 잠도 온, 오프뿐이야. 중간에 어설프게 자는 경우는 거의 없어. 술 취했을 때 빼고.

나긋나긋한 투로 수현의 버릇에 대해 말하는 듯했지만 결론은 내가 준 거 어디로 읽고 어제 애한테 술을 먹여서 술병이 나게 만드냐, 였다.

순간 현규는 이 사람도 참 극성이라고 떠올렸다. 결혼해서 애를 낳으면 온갖 PTA에 개근하며 바짓바람 어지간히 날리고 다닐 타입이다.

뭐, 그건 자신이 알 바 아니지만…….

“어젯밤은 수현이가 먼저 시작한 거예요. 술 먹여서 제가 주정 부리는 거 영상으로 찍겠다고 소맥 말다 자기가 먼저 갔으니까요.”

- 수현이가 할 법한 짓이라 믿긴 하겠는데…… 그러지 말고 그냥 네가 귀여워서 그랬다고 하지 그랬어?

역시나 이미 모든 걸 눈치챈 듯 순식간에 폐부를 찔러 오는 해준의 질문에 현규는 조금 삐딱한 태도로 대꾸했다.

“싫은데요.”

- 왜?

“제 순정을 주사 취급하는 녀석한테 사실대로 말하는 건 자존심 상해서요.”

그러니까 저 녀석이 먼저 말할 때까지는 절대 먼저 말 안 할 거라는 게 현규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해준의 입장은 달랐다.

- 그렇게 나오면 나도 도와줄 수 없어.

“도와달라고 안 했는데요? 각자도생하죠.”

-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아는 게 아주 많지만 입 다물 수밖에. 뭐, 도와달라고 해도 어차피 지금도 이미 너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 밸런스 맞춰질 때까지는 안 도와줄 거지만.

“……무슨 소리예요?”

- 일단 유학 시절 초기에 네가 왜 그렇게 싸가지 없게 굴었고, 주영이를 왜 그렇게 열심히 나한테 소개해 주려고 했는지 알았다는 거지. 그리고 주영이가 내 빌라 근처로 집 옮겨 온 뒤에 갑자기 나한테 상냥해진 이유도 알았고. 더불어 주영이한테도 친절해진 것도 다 알아챘거든.

해준은 아주 오래된 일들을 꺼내 그가 현규에 대한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을 어필했다.

하지만 여전히 현규는 그건 내 알 바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그래서요?”

알았으면 뭐 어쩔 건데, 라는 말투였다.

예상했던 반응이라 해준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 그래, 이미 오래전 일인데 이제 와 얘기해 봐야 별 의미는 없지. 그런데 그건 의미 없어도 수현이가 여행 왔다 빨리 돌아간 이유는 너도 궁금할걸.

“……이미 얘기 들었습니다. 몸살이었다고요.”

수현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구는 해준의 태도에 조금 비위가 상한 현규가 허세를 부리자 해준이 웃는다.

- 수현이가 그래?

“네.”

- 수현이는 그렇게 알지.

“…….”

- 아니, 지금까지는 그렇게 알았지. 그런데 이젠 알 거야. 그게 아니라는 거.

“……무슨 뜻이죠?”

- 수현이 일어나면 물어봐. 아니, 아직은 모를 수도 있겠네. 하지만 언젠가는 알겠지.

말을 할 거면 하고 말 거면 말지 애매하게 사람 애를 태우는 해준의 어법에 현규는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제 보니 이 사람도 은근히 성격 나쁘다. 천사 같다는 것도 다 이미지 메이킹의 결과였다.

- 그 얘기는 수현이가 해결해야 하니 그만하고…… 그럼, 수현이 잘 챙겨 줘. 따뜻한 차 끓여서 수시로 먹이고 한 시간에 한 번씩 열 재서 38도 넘으면 곧장 응급실로 업고 가. 해열 파스 있으면 꼭 붙이고. 찡얼대면 몸살 온 거니 그때는 곧장 몸살약 먹여. 그리고 기침하면 약국에서 어린이용 시럽 사다 먹여. 수현이는 기침감기 걸리면 아직도 시럽 먹어. 그게 제일 잘 들어.

28살짜리 성인 남자가 아니라 8살짜리 남자애를 돌보고 있는 듯한 기분에 현규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눌렀다.

이 사람도 이 정도로 수현을 돌봤을 것 같지는 않은데 이상하게 자신에게는 과한 걸 요구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마치 심술을 부리는 것처럼.

“……어제도 말했지만 전 입양을 한 게 아닌데요?”

- 내가 백해경에 대해 얘기 좀 할까, 수현이랑?

널 위해서 모르는 척해 줬는데, 라는 해준이 말에 현규는 그순간 바로 윤해준에 대한 평가를 완전히 바꿨다.

성격이 안 좋은 정도가 아니다. 어쩐지 눈빛에 은은한 광기가 돈다 했더니, 성격 더럽게 나쁘다.

“아무 관계도 아닌데, 그게 왜요?”

- 수현이가 아는 게 있거든.

“네?”

- 그러니까 잘하라고. 그럼 끊을게. 아, 수현이 이불 못 걷어차게 네가 이불 위에 누워 있어. 수현이 침대 킹사이즈지?

“……네.”

- 그래, 그럼 다음에는 웃으면서 보자고.

도저히 웃을 수 없는 인사를 남긴 뒤 일방적으로 끊어 버린 전화에 현규는 문득 알아채 버렸다.

이 사람이 지금 과한 심술을 부리고 있는 건 명백한 사실인데, 그 이유가 그가 정성껏 키운 수현이를 채 간 것에 대한 원한이 반, 그리고 유학 시절 초반에 싸가지 없는 태도로 대한 것에 대한 보복이 반이라는 걸.

그때 자신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싸가지가 없긴 했다. 그래서 굳이 반론하지 않은 거다.

그래, 그러니까 어지간한 건 당해 줄 수 있다.

조금 짜증이 나긴 했지만 지금은 그가 문제가 아니라 다시 체온계를 챙겨 들고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연 순간 해준의 말대로 이미 이불을 걷어찬 채 대자로 누운 수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담요로 꽁꽁 싸 놨는데 담요까지 걷어찬 걸로 봐서는 침낭도 소용없을 것 같긴 했다. 28년 동안 못 고쳤으면 앞으로도 못 고친다.

그러니까 그 부분은 쿨하게 포기하기로 한 뒤 침대로 다가가 꼼꼼하게 이불을 덮어 줬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 누워 이불을 몸으로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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