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세팅을 마친 뒤 한 번 더 열을 쟀지만 다행히 열은 오르지 않았다.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는 판단에 체온계를 내려 두곤 수현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잘 자.”
라고.
* * *
그날의 하늘은 몹시 맑았고 볕은 눈이 부셨다.
전날까지만 해도 눈이 쏟아졌다 멈췄다를 반복하더니 그 하루만은 날이 너무 좋았다.
마치 방구석에 처박혀 있지 말고, 놀러 나가라고 등을 떠미는 것 같은 날씨였다.
〈진짜 혼자 괜찮겠어?〉
차의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삼촌의 걱정 어린 음성에 천천히 움직이는 앞의 차를 따르며 무심한 듯 대꾸했다.
〈응, 괜찮아.〉
〈초행이잖아.〉
〈이 세상에는 내비게이션이라는 문명의 이기가 있습니다.〉
이 나라 자체가 처음 오는 곳인데 초행 아닌 데가 어디 있겠냐며 내비게이션으로 목적지를 확인했다.
삼촌 말로는 가깝다더니 차로 40분 거리다. 한국에서 칭하는 ‘가까운 거리’란 보통 걸어서 5분 거리를 말하는 거다. 차로 가야 하는 거리는 ‘가까운’의 분류 안에 들어가지 않는데, 삼촌도 어느새 미국 놈들에게 적응한 모양이었다.
〈난 걱정 말고 빨리 시험이나 보러 들어가. 오늘 오후 3시가 마지막이지?〉
〈응.〉
〈그럼 내가 6시쯤 데리러 가면 되나?〉
〈그러면 좋긴 한데……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네.〉
네가 오늘 안에 집에 돌아올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다는 삼촌의 지적에 ‘아.’라고 작게 신음했다.
그렇지 않아도 방금 삼촌이 한 걱정을 똑같이 하던 차였다. 크리스마스이브라는 걸 감안해 아침 일찍 삼촌을 대학에 데려다주고 곧장 목적지로 출발했는데 벌써 길이 막힌다.
더불어 분명히 시동을 걸 때는 1시간이었던 소요 시간이 그새 1시간 20분가량으로 늘어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다 기말고사 때문이다.
〈왜 미국은 시험을 크리스마스 직전까지 보는 거야?〉
한국처럼 좀 미리미리 봐 두면 될 걸 게을러 터져서는 꼭 크리스마스 직전까지 시험을 치르느라 사람 피곤하게 만든다.
시험만 빨리 마쳤어도 삼촌이랑 신나게 투어 다니며 놀 수 있었고 주영이랑도 빨리 합류해 놀 수 있었는데 시험 때문에 망했다.
어차피 다 알고 온 거긴 하지만 새삼 화가 나는 건 지금 길이 막히는 탓이다.
역시 교통 체증은 사람의 정신 건강에 아주 좋지 않다. 그러니까 취직하면 반드시 회사 바로 옆에 집을 얻을 거다. 아니, 유학을 와도 절대 대학교 바로 앞 동네에 살 거고 대학원에 가면 기숙사로 들어갈 거다.
〈늦어지거나 길 막힐 것 같으면 무리해서 오지 말고 주영이네서 자. 오후에는 차가 아예 안 움직일 수도 있으니까.〉
못 오면 못 온다고 전화만 해 달라는 삼촌의 당부에 얌전히 답했다.
〈꼭 전화할게.〉
〈그래, 착하다. 오후에 또 눈 온다니 운전 조심하고, 다른 데로 새지 말고,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고. 친절하게 말 걸거나 뭐 사 준다는 사람은 특히 조심해.〉
〈삼촌 나 23살이야. 이제 24살 되고 두 달 후에 대학 졸업한다고.〉
지금 렌트한 차까지 운전 중이라고 몇 번을 말해도 삼촌의 답은 한결같았다.
〈그러게, 그런데 내가 왜 이럴까?〉
말 자체로만 본다면 스스로를 탓하는 말 같았지만 그 속뜻은 내가 왜 이러는지 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는 의미였다.
물론 자신이 은근히 말을 안 듣고 소소하게 사고를 친 일은 꽤 많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과보호다.
삼촌이나 아버지나 형들이나.
오메가, 그것도 육체적 문제는 전혀 없음에도 발정기가 안 온 오메가라는 이유로 모두가 자신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보듯 조마조마하며 지켜보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자신의 의견은 확고했다.
지금까지 안 왔으면 앞으로도 안 올 거다, 다.
육제적으로 문제가 없는데 아직도 발정기가 안 왔다는 건 결국 정신적인 문제라는 건데, 불행히도 자신은 정신적으로도 또 정서적으로도 아무 문제 없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발정기는 안 올 거라는 게 자신이 낸 결론이었다.
물론, 가족들의 의견은 전혀 다르지만.
〈알았어. 진짜 조심할게.〉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하고. 없어도 전화하고. 주영이랑 만나도 만났다고 전화해.〉
〈삼촌, 시험 중이니까 메시지로 보내 놓을게.〉
〈그래, 그게 낫겠다.〉
계속되는 삼촌의 걱정 뒤로 누군가 삼촌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충 왜 여기 있냐, 곧 시험 시작인데 안 들어가고 뭐 하냐는 말인 것 같았다.
〈시간 된 것 같은데 빨리 들어가. 그리고 난 신경 쓰지 말고 시험에 집중해. 삼촌이 나 떼어 놓고 유학 올 정도로 하고 싶어 했던 공부잖아.〉
원래는 더 빨리 떠나도 될 유학을 조카가 성인 돼야 갈 수 있다고 미루다 겨우 자신이 진짜 만 20세가 된 후에야 떠나 많이 늦어진 차였다. 그렇게 떠나면서도 걱정이 많아 매일 전화해서 걱정하다 술 마시고 늦어진다면 형들을 술자리에 보낼 정도로 극성이었다.
그걸 잘 알기에 이젠 제발 걱정 좀 그만하고 본인의 일에 집중하라고 했다.
그리고 삼촌도 그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한 듯했다.
〈그래, 열심히 해야지. 그래도 걱정되니 중간중간 연락해.〉
〈알았어, 그건 걱정 마. 그러니 이만 끊어.〉
이제 제발 시험 좀 보러 가라는 애원에도 삼촌은 쉽사리 전화를 끊지 못했다. 그런 삼촌을 대신해 자신이 친절하게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 주었다. 그러곤 곧 음악을 켠 뒤 내비게이션을 확인했다.
빌어먹게도 예상 소요 시간이 1시간 30분이 돼 있었다. 그새 10분 늘었다.
아무래도 오늘 일정은 망한 것 같지만 그래도 이미 출발한 이상, 이제 와 돌아갈 수도 없다. 길이 너무 막혀서.
이럴 줄 알았으면 차에서 쓰는 변기라도 준비해 둘걸, 이라고 후회하며 휴대폰으로 앞의 도로 상황을 확인하는데 문득 벨이 울려 왔다.
오늘 만나기로 한 주영이었다.
〈출발했어?〉
지난 몇 달간 자주 통화를 해 제법 익숙해진 주영의 음성에 반가이 답했다.
〈응. 가는 중인데 길이 많이 막히네.〉
〈어? 빨리 나왔네?〉
〈이브잖아.〉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만, 이라고 웅얼대며 이게 출근 시간이라서인지 이브라서인지 헷갈리게 막히는 길을 바라보는데 주영이 난감해하며 말을 꺼낸다.
〈그런데, 어쩌지?〉
〈왜?〉
〈내가 시험 시간을 잘못 기억하고 있었어. 12시인 줄 알았는데 2시였더라고.〉
〈……어쩌다?〉
어차피 강의 시간에 시험을 볼 텐데, 왜 그런 거냐고 묻자 예상보다 황당한 답이 나왔다.
〈일부러 마지막 날 시험을 보려고 학생들 수업 없는 시간을 다 확인해서 잡은 시간인데, 내가 다이어리에 다르게 적어 놓고는 정신이 없어서 확인하지 못했어. 적을 때는 2라고 적은 것 같은데 실수로 앞에 숫자 하나를 더 넣었나 봐. 오늘 시험 시간 얘기하는데 나만 잘못 알고 있었어.〉
유학 온 첫 학기라 확인하고 또 확인했는데 진짜 멍청한 짓을 했다는 주영의 한탄에 크게 웃었다.
〈공부할 시간 늘어서 좋겠네. 지옥 연장 축하해.〉
〈차라리 직전에 알았으면 몰라도 방금 알아서 좀 허무해 하는 중이야. 새벽 2시에 일어나서 공부했는데…….〉
2시간 더 잘 수 있었는데 아깝다는 주영의 탄식과 동시에 바로 앞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차를 따라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는데 주영이 바로 말을 잇는다.
〈저기, 그러지 말고…….〉
〈……응?〉
〈그러니까…… 그냥…….〉
할 말이 있기는 한데 말을 꺼내기 힘든지 질질 끄는 분위기에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 있자 잠시 후 주영이 어색하게 말을 건넨다.
〈저기, 너 혹시 현규 형 알아?〉
〈현규 형? 강현규?〉
〈……응.〉
〈당연히 알지. 우리 형 친구잖아.〉
중학교, 고등학교 2년 선배이기도 하고, 라고 그에 대해 아는 정보를 풀어 놓자 주영이 다시 묻는다.
〈……혹시 그 형이랑 친해?〉
〈아니.〉
우리 형이랑도 안 친한데 형 친구랑 친하겠냐며 꾸물꾸물 움직이는 앞차를 따라 이쪽도 꾸물꾸물 기어가는데 주영이 뜻밖의 제안을 해 왔다.
〈저기, 현규 형이 나랑 같은 대학인데 그 형은 오늘 오전에 시험이 끝나거든. 방금 도서실에서 마주쳐서 인사하다가 얼결에 네 얘기를 했는데…… 형이 가이드해 줄 수 있다고 해서…….〉
〈……현규 형이?〉
〈응.〉
〈날?〉
〈응.〉
〈……왜?〉
그건 순수한 의문이었다.
일단 현규 형과는 예의상으로라도 친한 관계라고 할 수 없고, 설사 친하다 해도 현규 형이 친구 동생 놀러 온다고 자기 시간 내 가며 학교 안내를 해 줄 정도로 친절한 사람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가는 김에 인사할게요, 라고 하면 내가 왜 널 위해 내 아까운 시간을 써야 하냐고 대놓고 말할 사람이지.
한마디로 박정하다. 길게 말하자면 성격 자체가 이기적이고 모든 사고가 자기중심적이며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다.
그런 사람인 걸 너무 잘 알기에 삼촌한테 나 왔다는 이야기도 전하지 말라고 했는데 갑자기 가이드라니…….
〈사실 나도 이유를 모르겠어서 물어본 거야…….〉
나랑도 안 친한데 왜 갑자기 그런 제의를 한 건지 모르겠다고, 주영은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굉장히 부담스러워하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할래? 불편하면 거절해도 되긴 하는데…….〉
〈……뭐, 나야 형이 안내해 주면 고맙기는 한데…….〉
일단 초행인 곳이니 가이드가 있으면 좋긴 하다. 아무리 구글맵이 있다 해도 넓은 곳이니까.
현규 형이라면 조금 껄끄럽고 불편할 수 있지만 그래도 혼자 다니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라고 고민하고 있는데 주영이 초조한 듯 다시 묻는다.
〈그럼, 형한테 부탁할까?〉
〈……어…… 뭐…… 형만 괜찮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