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괜찮다면 그만두고, 라는 말을 돌려 한 순간 갑자기 주영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형은 12시에 시험 끝날 거야. 형 연락처, 아니 내가 형한테 네 연락처 알려 줄게. 형이 곧 연락할 거야. 그때 약속 장소 정하면 돼. 진짜 고마워!〉
흥분한 듯 빠르게 내쏘는 말투와 높은 음성이 꼭 협박범에게서 벗어나 신난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그건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시험 때문에 바쁜데 이 상황 자체도 부담스러워서 빨리 얘기를 마무리하고 싶었던 거라고, 그렇게 나름 납득했다.
〈그럼, 빨리 시험 들어가. 시험 잘 보고 나중에 보자.〉
〈그래.〉
마지막 인사 후 끊기는 전화 저편에서 ‘살았다.’라는 주영이의 안도감 서린 탄식이 들려온 것 같긴 했지만…… 그건 자신이 혼자 기다리지 않아도 돼 다행이라는 의미 같았다.
그래, 그럴 거다.
아주 약간의 찝찝함이 남긴 했지만 그건 전부 기분 탓이라고 치부한 뒤 다시 내비게이션을 바라보자 현재 시각 10시 20분, 예상 소요 시간은 1시간 40분이다.
이쯤 되면 도착하기까지 최종 3시간을 잡아야 할 것 같다.
다시 정체된 거리에 초조한 듯 핸들을 두드리다 선바이저를 내려 거울로 머리를 확인했다. 그러자 역시나 정수리 부분에 우뚝 선 안테나가 보였다. 그 안테나를 꾹꾹 누르며 이번엔 시선을 내려 옷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오늘은 아주 포멀한 복장이다. 원래는 후드 티와 청바지에 오버 사이즈 야상 점퍼를 입고 나오려고 했는데 바로 어제 삼촌이 더는 못 참겠다며 쇼핑센터로 끌고 가 세팅해 준 차림이다.
그러면서 ‘우리 수현이 공대생 다 됐네. 내가 왜 널 공대에 보냈을까?’라고 웃던 삼촌이 굉장히 슬프고 열받아 보여서 얌전히 입고 나온 게 다행이었다.
현규 형이랑 만날 때 어제 옷차림이었다면 무슨 독설을 들었을지 아득하다.
아니, 독설이 아니라 눈으로 독침을 날릴 것 같다. 감히 그 꼴로 날 만나러 온 거냐고.
〈어, 머리, 머리…….〉
잘 안 내려가는 안테나를 꾹꾹 누르려 애를 쓰는 사이 전화 벨이 울려 왔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앞을 보자 휴대폰 액정에 처음 보는 번호가 떠 있다.
순간 감이 왔다. 어쩐지 이게 현규 형의 번호일 것 같다는.
불길하기까지 한 그 예감에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이수현?〉
나지막하게 울려 오는 그 음성은 분명 현규 형의 목소리였다. 몇 달 만에 듣는 데도 알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전화에 당황했는지, 혹은 벨 소리에 놀랐는지 두근두근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기분도 붕 뜬 듯 이상한 감각에 서둘러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네, 맞아요.〉
〈지금 어디?〉
잘 지냈냐, 언제 왔냐, 웬일로 여기까지 왔냐, 등등. 지난 여름방학 때 집에서 잠깐 보긴 했다지만 어쨌든 오랜만에 보는, 아주 친하지도 않은 관계인 자신에게도 형은 매너 따윈 없었다.
시간 낭비하기 싫다는 거다.
〈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도착 시간은 11시로 나와요. 하지만 12시 넘어야 도착할 것 같은데요…….〉
계속해서 늘어나는 숫자를 보니, 그때쯤에나 그 학교에 들어갈 것 같다고 작게 웅얼거리자 곧바로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시간 대충 맞겠네. 내 시험이 12시에 끝날 테니 주차장에 차 세워 두고 연락해. 괜히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길 잃어버리지 말고.〉
과하게 친절한 형의 제안에 화들짝 놀라 보일 리 없음에도 저도 모르게 손을 내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어디 계시는지 알려 주시면 제가 갈게요.〉
〈네가?〉
퍽이나 잘 찾아오겠다, 라는 형의 말투에 삼촌에게 했듯 서둘러 형을 안심시켜 주었다.
〈저에게는 구글맵이 있어요…….〉
〈구글맵이야 눈만 있으면 볼 수 있지.〉
그렇기는 하다. 운전도 손하고 발만 있으면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는 것과 그걸 잘하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니까.
〈……도착하면 연락드릴게요.〉
〈그래.〉
통화의 목적을 달성한 순간, 휴대폰 안팎에서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친하기는커녕 데면데면하지도 않은, 오히려 만나면 피해 다니던 관계라 본론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10년을 알아도, 여전한 어색함에 도저히 그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잘 지내셨어요?〉
늦어도 한참 늦은, 거기다 이 상황과는 어울리지도 않는 그 인사에 형도 아차 한 듯 조금 목소리를 낮춘다.
〈그런대로. 너는…… 당연히 잘 지냈겠지?〉
여름에 잠깐 봤을 때도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게 아주 행복하게 지내는 것 같더라는, 여지없는 형의 비아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네, 잘 지냈어요.〉
알코올중독자가 되지 않고 용케 4년을 잘 보냈다고 웃자 다시 분위기가 풀렸다. 그렇게 무난하고 평범한 대화가 이어졌다.
〈언제 온 거야?〉
〈일주일 정도 됐어요.〉
〈갑자기 왜? 유학 취소했다더니…… 다시 준비하려고?〉
〈이번에는 그냥 관광이에요. 삼촌한테 상담할 것도 있고 해서요.〉
〈……결혼 얘기?〉
생뚱맞은 그 질문에 멍청하게 반응했다.
〈네?〉
유학 중인 사람과 상담하는 거면 당연히 유학 관련이지 갑자기 결혼은 왜, 라고 떠올리는데 형이 서둘러 말을 돌린다.
〈아니, 됐어. 나 이제 시험 들어가야 돼. 도착하면 메시지 보내. 시험 중일 수도 있으니까.〉
〈네. 시험 잘 보…….〉
……세요, 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뚝 하니 끊긴 전화에,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원래 이런 사람이다. 통화를 많이 해 본 건 아니지만 평소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버지나, 큰형, 작은형도 전부 그렇다. 아무래도 저 싸가지 없는 태도가 알파들의 기본 덕목인 것 같다.
물론, 삼촌은 빼고.
〈아, 왜 자꾸 떠…….〉
여기가 주차장인지 도로인지 헷갈리는 광경을 눈앞에 둔 채 앞창과 선바이저의 거울을 번갈아 보며 계속해서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삼촌이 드라이해 준다고 할 때 해 달라고 할걸.
순간, 시험 보러 가기 직전까지 머리 빗겨 주고 옷 챙겨 주던 삼촌이 떠올라 쓰게 웃고 말았다.
삼촌 눈에는 아직도 자신이 삑삑이 신발 신고 걸어 다니는 아기로 보이는 것 같다.
〈아, 향수도 뿌릴걸.〉
삼촌이 사 준 향수를 쓸 걸 그랬다고,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사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건 교통 체증이지 차림이나 향수가 아니다.
그걸 알긴 아는데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후드 티 두 개에 조거 팬츠 두 개로 외출복과 실내복을 돌려 막기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걸로는 안 될 것 같다.
그 순간, 어제 없는 시간 쪼개 옷 사입혀 준 삼촌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삼촌 말은 잘 듣겠다고 결심했다.
* * *
처음 도착 예상 시간은 10시 30분이었다. 하지만 10시 30분이 11시가 되더니 이내 12시가 되었고, 도착했을 때는 이미 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차량 수도 많지만 앞에서 사고가 났는지 도로가 꽉꽉 막혀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그 덕에 예상보다도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려 도착한 목적지에서 차에서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게 사이드미러를 보는 거였다.
3시간이 넘도록 안 가라앉는 머리카락은 포기한 뒤, 옷을 툭툭 털고 삼촌이 정성을 다해 골라 준 코트를 입고 머플러를 했다.
그러곤 장갑까지 야무지게 끼고 휴대폰으로 도서관을 찾았다.
오는 중 시험이 끝난 형에게 아직 좀 더 가야 할 것 같다고 하자 형은 마침 자기도 도서관에 볼일이 있으니 천천히 오라고 했다.
하지만 도착 후 형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어차피 대학 구경이 목적이고 늦은 게 미안하기도 해, 도서관 앞에 가서 연락할 생각이었다.
목적지를 찾기 위해 휴대폰을 손에 꼭 든 채 주차장에서 도서관까지의 거리를 확인했다.
걸어서 5분. 경로 자체도 복잡하지 않았다.
대충 눈으로 지도를 스캔한 뒤 그 자리에서 건물 위치로 방향을 확인하곤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햇살이 유독 좋다 싶더니 오후가 되자 볕이 따갑기까지 하다.
나뭇가지 위에 쌓인 눈이 녹아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게, 꼭 보석이 나무에 줄레줄레 걸려 있는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트리보다 더 반짝거리는 물방울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쿵쿵거리며 뛸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부정맥인가 싶었지만 다행히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니고 또 그런 진단을 받은 기억도 없다.
그렇다면 혹시 현규 형을 만나는 게 너무 긴장돼서 그러는 건가 의아해하며 가슴을 지그시 눌러 봤다.
마지막으로 형을 본 건 9월이었다. 여름방학 중 잠깐 귀국했던 형이 출국 하루 전 집에 들렀고, 그날 새벽까지 같이 술을 마셨다.
그때 함께 있던 게 큰형, 지수 형, 그리고 현규 형이었다. 1학기 종강 파티 때 술 마시고 대차게 계단에서 굴러 발목 인대가 늘어났던 죄로, 자신은 그날 술을 마시지 못했다. 대신 같이 앉아 세 사람의 서라운드 잔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그래, 그때 귀를 닫은 채 절대 이 사람 중 두 사람 이상이랑은 한자리에 있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자신이 홀로 독립을 계획하는 사이 큰형이 먼저 자리를 떴고, 다음으로 둘째 형이 소파에서 뻗었다. 하지만 굳이 방으로 옮기진 않았다. 한여름이라 얼어 죽진 않을 테니까.
그렇게 공포 영화처럼 일행들이 하나씩 사라져 가던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현규 형도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미 술을 마셨고 시간도 너무 늦어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형을 게스트룸으로 안내하는데 그때도 좀 부정맥 같은 게 오긴 했었다. 하지만 그건 잔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 스트레스를 받은 데다 현규 형과 단둘만 있는 게 어색한 탓이었다.
거실에서 게스트룸까지 대충 5분, 그사이 단 한 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원래 현규 형은 말이 없고 자신은 현규 형을 불편해하니 대화가 될 리 없었다. 그저 집에 온 손님이니 어쩔 수 없이 안내만 할 뿐이었다.
그래, 이불만 꺼내 주고 가서 자자, 라고 다짐하며 막 게스트룸으로 들어오는데 그 와중에 형은 굳이 샤워해야 한다고 했다. 참 가지가지 한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손님이라 어쩔 수 없이 양해했고, 자신의 안내를 받은 형은 배스 가운만 든 채 욕실로 들어갔다.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 괜찮을까 걱정은 됐지만 겉보기에는 하도 멀쩡해 보여 그냥 뒀다. 사실, 말릴 수도 없었다. 무서워서.
자기가 샤워하러 갈 정도면 괜찮은 거니 쓰러져도 내 잘못 아니라고 무시한 채 후덥지근한 방에 에어컨을 켜고 침대 커버와 이불을 갈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려 왔다.
고요한 새벽에 크게 울려 대는 벨 소리에 놀라 저도 모르게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자,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 위에 있는 휴대폰에서 나는 소리였다.
형의 휴대폰이었다.
자신의 휴대폰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자 그쪽에서 시선을 돌리곤 다시 부지런히 이불을 정리했다. 하지만 이불을 다 정리하고 방에서 나가려고 할 때까지도 벨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새벽이라서인지 더욱 크게 느껴지는 그 소음에 격렬한 갈등이 일었다.
남의 휴대폰, 그것도 현규 형의 휴대폰에 손을 댈 수는 없는데 소리가 너무 요란하다. 형은 나오려면 한참 걸릴 것 같고, 이 시간에 끊기지도 않고 오는 전화라면 급한 일일 수도 있다.
저장도 안 된 번호인 걸로 봐서는 사고 같은 게 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받을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그사이 갑자기 전화가 끊겼다.
순간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려는데, 그 숨이 채 다 나오기도 전에 다시 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네가 받을 때까지 전화를 하겠다는 의지가 서린 그 집요함에 결국 전화를 받았다.
‘강현규 씨 휴대폰입니다. 지금 샤워 중이신데 메시지 있으시면 전해 드릴까요?’라고.
하지만 그 정도로 끈질기게 전화를 걸어 댄 것치곤 전화를 받았는데도 너무 조용했다. 혹시 끊긴 건가 해 화면을 확인했지만 아직 통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