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다시 한번 더 ‘여보세요?’라고 하자 곧 그가 한마디를 건넸다.
‘죄송합니다.’라고.
그리고 갑자기 뚝 끊긴 전화에 휴대폰을 내려놓고 방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불행히도 그럴 수가 없었다.
어쨌든 허락 없이 남의 전화를 받은 상황이라 그 사실을 형에게 전해야 했다. 내일 아침에는 곧장 출국 준비를 하느라 바쁠 테니 까먹지 않게 얘기해 두려고 방에 앉아 한참을 꼼지락거리며 기다리는데 드디어 형이 돌아왔다.
그래, 그 순간은 선명히 기억한다. 그때 형은 젖은 머리카락에 배스 가운을 걸치고 있었는데, 처음 보는 형의 흐트러진 모습에 부정맥이 또 한 번 왔다.
하지만 그건 형이 너무 잘생겨서라고 생각했다. 너무 예쁘거나 잘생긴 걸 보면 사람은 기분이 좋아짐과 동시에 호르몬이 과하게 분비돼 심장 발작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얼굴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린 뒤 서둘러 용건을 전했다. 방금 전화가 왔는데 내가 받았다고.
형은 잠시 당황하는 듯했지만 이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바로 이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안녕히 주무세요.’라는 인사를 남긴 뒤 침실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그 후로 3개월 만이었다, 형을 만나는 건.
아마 오랜만에 잘생긴 형을 만나 또 잔소리를 들을 생각을 하니 부정맥이 생긴 것 같았다.
자신의 심장 건강을 위해서라도 오늘은 형이 잔소리를 덜해 주기를 바라며, 길을 가로질러 걷던 중 저 멀리 익숙한 형태의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젯밤 투어 일정을 짜며 수없이 본 그 도서관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지도를 확인해 보는데, 맞다.
드디어 다 왔다는 사실에 서둘러 오른손의 장갑을 벗고 형의 번호를 찾았다. 그러곤 막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건물 안에서 나오는 아주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현규 형이었다.
거리가 있음에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눈에 띄었다.
아니, 학창 시절에도 늘 눈에 띄어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도망가기 편한 상대였다.
오랜만인데도 형은 여전히 잘생겼고 근사했다. 다만 좀 퀭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역시 기말고사 기간이라 피곤했는지 눈가에 다크 서클도 보이고 전체적으로 많이 마른 느낌이었다.
그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빨리 따뜻한 데로 가 맛있는 거라도 먹여야 할 것 같아,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형의 옆으로 다가서는 낯선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큰 키에 롱코트를 걸쳐 입은 그는 확연히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화사하고 화려하고 품위 있어 보이는.
함께 서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멈칫한 순간 형이 웃으며 그 사람을 돌아보는 게 보였다.
그때 형은 진짜 행복해 보였다.
사랑스러운 사람을 바라보는 것처럼 녹아내리는 듯한 눈빛과 연한 미소를 띤 얼굴에, 순간 눈치채고 말았다.
형이 저 사람을 많이 좋아하는구나, 하고.
그리고 동시에 문득 3개월 전 새벽, 대신 받았던 전화가 떠올랐다.
누군지도 듣지 못했고 들은 건 단 한 마디 ‘죄송합니다.’뿐이었지만 그냥 그런 느낌이 왔다.
그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직감 같은 느낌이었다.
그 사람이구나, 하고.
그리고 그 새벽에 전화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구나, 하고.
자신이 새벽에 대신 전화를 받은 것 때문에 오해가 생길 수도 있었을 텐데 그건 아니라 다행이었다는 생각까지 한 뒤, 휴대폰을 내려놨다.
도저히 통화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러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뒤 돌아서 걸어온 길을 거슬러 돌아갔다.
방금까지 붕 뜬 것만 같던 기분은 바닥에 패대기쳐졌고 가볍던 발걸음은 갑자기 모래주머니를 찬 듯 무거워졌다.
그러고 보니 몸이 좀 아픈 것 같았다.
이상하게 마디마디가 쑤시고 목도 좀 아프고 몸이 후끈거리는 기분에 손으로 이마를 재 봤지만 손이 차가워 모르겠다.
그래도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아 삼촌에게 전화를 하려 했지만 마침 삼촌은 시험에 들어갔을 시간이었다.
그리고 주영이도 곧 시험 시간이다.
〈망할 기말고사…….〉
역시 이게 다 기말고사 때문이라고 화를 내며 다시 주차장으로 가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그 후 어떻게 집까지 돌아온 건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주영이한테 연락할 생각도 못 한 채 주차장 같은 도로를 지나 겨우 삼촌의 빌라로 돌아와 기절하듯 잠이 들었고, 잠에서 깼을 때는 삼촌이 걱정스러워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며칠 동안 너무 싸돌아다녀서 감기에 걸린 모양이라면서.
그러고 보니 내가 어지간히 돌아다녔구나 하곤 다시 잠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상태로 내리 이틀을 앓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출국 날짜가 가까워져 있었다. 그래서 뭘 생각하고 말 틈도 없이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왔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게 어이없이 자신의 첫사랑은 마무리되었다.
* * *
환한 햇살 아래 눈을 뜬 수현은 멍한 듯 눈을 두어 번 껌뻑였다.
그러곤 이내 아침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작게 숨을 내뱉었다.
몸은 괜찮았다. 열은 완전히 내렸고, 아픈 곳도 없다. 그리고 나른함도 사라졌다.
역시 피로로 인한 미열이었다.
장기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자마자 결혼 문제 때문에 이리저리 휘둘리느라 제대로 쉬지 못한 게 원인이었을 거다.
푹 쉬니 금세 사라진 증상에 팔을 쭈욱 뻗어 기지개를 켜다, 하는 김에 허리도 좀 펴려 허리를 왼쪽으로 비틀며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바로 그 순간, 헉 하며 숨을 멈췄다.
옆에서 자고 있던 현규 형과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진짜 바로 코앞이었다.
감동스러울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 눈앞에 놓이자 저도 모르게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눈을 떴을 때 이렇게 얼굴을 바로 마주한 건 두 번째였다. 항상 형이 자신의 뒤에서 몸을 누르며 자고 있어 침대에서 내려가야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새삼 침대 위에 누운 채 바라보니, 잘생겼다.
아침부터 보기엔 부담스러울 정도로 잘생긴 얼굴에 일단 아침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글쎄…….”
그건 잘 못 잤다는 뜻이다.
이젠 엿 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을 수 있다.
“잘, 못 주무셨어요?”
조심스러운 그 질문에 형이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눈을 들여다본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눈빛이었다.
잘 못 잤나 보다.
혹시 밤새 날 간호하느라 못 잔 건가 걱정하는데 형이 문득 묻는다.
“열은?”
“내렸어요.”
“다른 아픈 데는 없고?”
“괜찮아요. 진짜 그냥 피로 때문이었어요. 가끔 피곤하면 그렇게 뻗어요.”
그래서 푹 자고 나면 금방 낫는다고 하자 형이 납득한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렇게 적혀 있긴 하더군. 해준 형이 보낸 극성스러운 문서에.”
그건 거의 영아 돌보미에게 보내는 문서 수준이었다고 현규 형이 질색하는 표정에 그렇지 않아도 삼촌이 뭘 보냈니 마니 했던 게 떠올랐다.
“삼촌이 뭐 보냈어요?”
“이수현 사용 설명서.”
“……저요?”
“응.”
“……왜요?”
“널 잘 키우라고.”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전 다 컸는데요.”
“그러니까.”
난 너랑 ‘마이 페어 레이디’를 찍을 생각도 육성 게임을 할 생각도 없다고, 현규 형이 더하는 말에 이번만은 형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저도 더 이상 제 양육자를 늘이고 싶지 않은데요.”
주변에 왜 이렇게 날 키웠다는 사람들이 많은지, 지금도 지긋지긋해 죽겠는데 거기에 형까지 더하고 싶지 않다는 게 자신의 진심이었다.
이 이상 학부형이 늘면 한국을 떠날 거다.
“우리 결혼 생활에 가장 중요한 의견이 일치해 다행이네.”
“그러게요.”
짤막한 대화 후 다시 침묵이 흘렀다. 바로 옆에 누운 채 다정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어쩐지 목이 타고 피부가 간질거리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알레르기 증상처럼 약간 호흡도 차오르고 심장도 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일어날 수 있겠어?”
그 말에 서둘러 고개를 돌려 침대 협탁 위에 놓인 시계를 바라보자 8시가 다 되어 가고 있다.
요즘 일출 시간이 늦어 이 정도로 환한 거면 8시쯤이 맞다.
아무리 회사가 가까워도 너무 늦었다.
“늦었어요. 빨리 일어나서 아침 차릴게요.”
“또 12첩 반상?”
“아뇨, 만둣국이요.”
아무리 나라도 오늘은 그럴 시간이 없다며 침대에서 내려서려는 순간 형이 허리를 끌어안는다.
움직이지 말라는 듯 자신은 만류하는 손길이었지만 그 손길에 갑자기 두근 하고 심장이 크게 울려왔다.
이게 바로 두근거림이라는 거구나, 하고 납득하던 사이 뒤에서 몸을 끌어안은 형이 귓가에서 작게 속삭인다.
“……이 김에 묻는 건데, 난 만두를 얼마나 더 먹어야 하지?”
귀에서 소곤거리는 형의 음성에 등이 오싹해 왔다. 그리고 어쩐지 몸도 후끈했지만 애써 그 감각을 참으며 침착하게 형의 의문에 답해줬다.
“싸 둔 거 다 먹어야 하니…… 최소 일주일, 최대 보름이요.”
“그랬다간 내 몸속에 육즙이 흐를 것 같은데?”
“……이미 제 몸의 90%는 당면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당면?”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