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왜?”
“좀 비켜 주실래요?”
“왜?”
“……나가서 옷을 갈아입고 싶은데요…….”
“왜?”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요, 라는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차마 그 말은 할 수 없었다. 그 말을 하면 진짜 위험한 게 뭔지 보여 줄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가장 무난한 답을 골랐다.
“너무, 좁아서요.”
“방금까지 잘 갈아입었잖아.”
“바지를 갈아입으려면 허리를 많이 숙여야 하잖아요…….”
“숙여.”
“……좁아요, 형.”
이곳을 빠져나가려고 생각해 낸 변명이었지만 막상 그 장면을 상상해 보니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 드레스룸은 절대 남자 둘이 옷을 갈아입을 만한 규모가 아니다.
특히나 한 사람이 이 정도로 크면…….
그러고 보니 중학교 때부터 컸지, 라고 떠올리곤 형을 쭈욱 훑어보는데…… 가까이서 보니 진짜 크다.
드레스룸이 터질 것 같다.
그러니까…….
“비켜 주세요, 형. 우리 늦었어요.”
이미 아슬아슬하다고 애원하듯 형을 바라보자 형이 아무 말 없이 이쪽을 내려다본다.
어쩐지 무서운 눈빛으로…….
입맛까지 다시며.
조금 전의 훑는 듯한 시선과는 또 다른 위협적인 그 눈빛에 바지를 꼭 끌어안으며 옆으로 돌아섰다.
경계하는 그 태도에 형이 눈웃음을 흘리며 묻는다.
“왜 피하지?”
“……무서워서요.”
“무서운 건 알고?”
“네.”
“진짜…… 생존 본능은 강한 모양이네.”
내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다고 동의하며 형을 힐끔거리자, 잠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형이 입술을 달싹인다.
뭔가 아쉬운 듯 그리고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다시 열었다, 그리고 곧 닫는 모습에 더욱 바지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곤 여전히 경계하듯 형을 바라보자 잠시 후 형이 한숨을 내뱉으며 물러선다.
“그래, 아침부터 이럴 건 아니지. 빨리 갈아입어.”
말과 함께 드디어 형이 몸을 돌려 내주는 틈으로 드레스룸을 빠져나왔다.
넓은 공간으로 나오자 그제야 안심이 돼 저도 모르게 긴 숨을 내뱉었다. 그나마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막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역시나 형이 또 이쪽을 보고 있다.
아예 대놓고 내가 널 지켜보고 있다는 듯한 짓궂은 그 시선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이번엔 옷을 들고 아예 거실로 나갔다. 그러곤 등으로 문을 막은 채 바지를 갈아입기로 했다.
그사이, 침실 안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지만 그건 모른 척했다.
아니, 아는 체할 여유가 없었다.
출근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음이 급했다.
* * *
아슬아슬한 시각에 출근하게 된 수현과 현규는 복도로 나서자마자 도착한 엘리베이터로 다급히 달려들었다.
“감사합니다.”
진짜 아슬아슬하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열림 버튼을 눌러 기다려 준 분께 인사를 한 수현은 벽에 기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엘리베이터를 놓쳤다면 아슬아슬했겠지만 지금 내려가면 괜찮다.
다만 커피를 살 시간은 없을 것 같아 휴대폰으로 시각을 확인하고 있는데 그사이 멈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며 또 사람들이 올라탄다.
이럴 때는 넓은 화물용 엘리베이터가 그립다. 복도형의 오피스텔은 그냥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쓰는 게 맞지 않을까, 어차피 택배 물량도 많으니까, 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데 층마다 멈춘 엘리베이터에서 계속해서 사람이 올라탄다.
태풍이 오든 한파가 몰아치든 장마로 길이 물에 잠기든, 무조건 출근은 해야 하는 민족이라 그런지 그 좁은 엘리베이터에 사람들이 꾸역꾸역 들이찼다.
절대 지각은 용인하지 않겠다는 이웃사촌들에게 밀리고 밀려 얼결에 형의 옆으로 바싹 붙어서는데, 순간 아주 좋은 냄새가 났다.
베르가못과 화이트머스크, 그리고 시더우드의 향이 뒤섞인 것 같은 향이었다.
향수는 원래 좋아하지 않지만 이 노트들을 기억하는 이유는 오로지 자신이 좋아하는 향이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 큰형이 쓰는 네롤리와 둘째 형이 쓰는 머스크는 특히 싫어하고 삼촌이 쓰는 씨솔트를 그나마 좋아하는 편인데 그보다 더 좋아하는 게 베르가못과 화이트머스크였고, 그다음으로 좋아하는 게 시더우드다.
기가 막히게 좋아하는 향만이 뒤섞인 냄새였다. 형이 평소 쓰던 향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느낌인데…… 이게 더 좋다.
“형, 향수 바꾸셨어요?”
어깨가 끼일 정도로 바싹 붙은 채 그렇게 묻자 형이 뭔가 떠오른 듯 탄식한다.
“바빠서 안 뿌리고 나왔어.”
“……향, 나는데요? 베르가못하고 시더우드.”
그런 것 같다고 하자, 형이 알겠다는 듯 중얼거린다.
“보디 로션일 거야.”
향수를 포함한 보디 제품은 모두 통일해서 쓰니까, 라는 말에 그제야 갑자기 욕실 선반을 점령한 어마어마한 양의 보디 제품들이 떠올랐다.
어쩐지 보디 샤워나 젤, 그리고 샤워 코오롱에 샴푸까지 이상할 정도로 많다 했더니 그날 뿌릴 향수에 따라 보디 제품까지 다르게 사용해서 그런 거였다.
생각해 보니 욕실 선반이 백화점 진열장 같기는 했다. 제품을 세트별로 모아 둔.
“원래 그런 거예요?”
“보통은 그렇지.”
“어쩐지 둘째 형한테서 이상한 냄새가 나더라…….”
“그 녀석은 자기한테 맞지 않는 향수를 쓰니까.”
“……맞는 향수요?”
“각자 페로몬에 맞는 향수가 있어. 본인의 페로몬과 조화가 잘되는 향을 쓰면 훨씬 더 좋은 냄새를 풍길 수 있지. 그걸 잘 사용하면 페로몬의 농도까지 더 끌어 올릴 수도 있고. 쉽게 말해 향수를 이용해 자신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거야. 반대로 너무 페로몬이 강할 경우 조향을 통해 조금 누를 수도 있고. 다만, 그걸 잘못 사용하면 악취가 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섬세하게 밸런스를 조절해야 돼.”
단순하지만 직관적인 형의 설명 덕에 그제야 작은형에게서 가끔 악취가 풍기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본인 페로몬과 맞지 않는 향을 욕심내 사용한 거다.
그럴 줄 알았다.
“형은, 그럼 누르는 쪽이에요?”
“아니. 적당히 가장 비슷한 향을 쓰는 편이지.”
난 내가 제어가 가능하니까, 라는 말에 의아함이 일었다.
“페로몬이 제어가 돼요?”
“괜히 우성이라고 하는 게 아니니까. 그런데, 갑자기 향수는 왜? 싫어하는 향이야?”
“아뇨. 저 향수 싫어하는데, 이건 좋아서요.”
지난주부터 내내 붙어 있었는데도 오늘따라 유독 그 향이 좋아 형의 바로 옆에 붙어 킁킁대자 형이 휴대폰을 확인하며 작게 중얼거린다.
“나도 좋아하는 향이지만, 너한테는 안 어울려. 어울리는 걸로 사 줄게.”
“아니에요. 삼촌이 사 준 거 있어요.”
그게 4년 됐던가, 미국 갔을 때 사 준 거니까, 라고 작게 중얼거리자 형이 놀라 옆을 돌아본다.
“4년 전에 산 게 아직도 있다고?”
“안 쓰니까요.”
짤막한 그 답에 형이 황당하다는 듯 바라본다.
“당장 버려.”
“삼촌이 사 준 건데 어떻게 버려요?”
“그럼, 그냥 놔두기만 해. 쓰지는 마. 너한테 맞는 향수를 맞춰 줄 테니.”
“딱히, 필요 없는데요.”
원래 향이 있는 건 다 싫어한다고 솔직히 말한 순간 막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몸을 압박하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나가는 모습에 겨우 숨을 내뱉으며 형과 함께 로비로 내려섰다.
그러곤 빠르게 출입구로 향해가는데 바로 옆에서 걷던 형이 맞는 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필요 없긴 하지. 앞으로는 더욱…….”
“네?”
“아니, 됐어.”
별거 아니라며 먼저 자동문을 통해 건물을 나선 형이 바로 옆 건물로 향하며 묻는다.
“오늘 점심은 어떻게 할 거야?”
“오늘은 바쁠 테니, 그냥 구내식당에서 먹으려고 하는데요.”
“그 전에 만두부터 처리해야 할 것 같던데.”
냉동실에 가득 차다 못해 넘쳐서 아까는 싸 둔 비닐이 굴러떨어져 발등뼈가 부러질 뻔했다고, 형은 클레임을 걸었다.
확실히 이번엔 역대급으로 많이 만들긴 했다. 자신도 모르게 쌓인 스트레스가 꽤 됐던 모양이다.
“……형, 같은 음식 연이어 안 드신다면서요?”
“그래도 저 냉동실은 정리해야지. 안 그러면 오늘 내로 냉동고를 하나 더 사야 할 판이니.”
“……그렇기는 해요. 그런데 시간이…….”
오늘 상당히 바쁠 거라 건물 밖으로 나갈 시간이 있을까 고민하는데 형이 쐐기를 박는다.
“점심은 군만두로.”
딱 잘라 현규 형이 정해 준 메뉴에 조금 감동받았다.
“형, 만두 좋아하시나 봐요.”
“이제부터 좋아하기로 했어.”
“다행이에요. 저 만두 진짜 좋아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