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기기 귀찮아요.”
오피스촌이다 보니 세탁소까지 한 블록 정도 가야 하는데, 거긴 배달은 해 주지만 수거는 안 해 간다.
그런데 매번 옷을 갖다 맡기기는 귀찮다고 수현이 본심을 내뱉자 현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쉰다.
“그럼, 내가 맡길게.”
어차피 내 양복과 셔츠도 맡겨야 하니까, 라고 현규가 덧붙인 순간 수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럼, 노력해 볼게요.”
“좋아. 다 됐어.”
다 마른 머리카락을 빗으로 다듬으며 현규가 대충 스타일을 잡아 준 덕에 부스스하지만 일단 조금 전보다는 나은 꼴이 되었다.
이제 진짜 집을 나가도 되는 상태에 수현은 먼저 휴대폰을 찾아 들었다.
하지만 역시나 이미 늦었다.
차라리 아예 늦으니 마음이 편해져 휴대폰을 주머니 안에 넣는데 본인 머리 세팅을 끝낸 현규가 파란색 병을 들고는 향수를 뿌리는 모습에 수현은 일부러 현규의 바로 옆에 달라붙었다.
그러곤 냄새를 맡으며 고개를 갸웃한다.
“샤워 제품들이 더 향이 좋은 것 같아요.”
현규와 샤워를 하면서 함께 썼던 보디 제품들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좀 더 진하고 다른 향이 섞인 느낌이라고 수현이 아쉬워하자 현규가 의외라는 얼굴을 한다.
“똑같은 향인데?”
“조금 달라요. 샤워 코오롱이 더 좋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향수 안 뿌리면 안 되냐고 수현이 현규의 등에 매달려 빤히 바라보자 시계를 차던 현규가 가만히 수현을 내려다본다. 그러곤 묘한 미소를 짓는다.
아주 만족스러워 보이는, 그래서 조금 위험한 느낌의 미소에 수현이 조금 몸을 움찔하자 현규가 놀랄 거 없다는 듯 수현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내 냄새가 많이 배 있어서.”
“같은 제품을 썼으니까요.”
“……그래…….”
그냥 같은 샴푸와 샤워젤을 써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듯한 수현의 순진한 반응에 현규는 대단히 만족해했다.
사실 굳이 같이 샤워를 한 데는 그런 목적도 있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샤워를 했다 해도 지금 본인의 몸에서 자신의 페로몬이 진동하고 있다는 걸, 수현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본인이 체감하지 못하기에 그저 같은 보디 제품을 써서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았다. 사실 그 덕에 오늘은 베타들도 점심시간에 그들이 뭘 했는지 모두 눈치채겠지만…….
“진짜 늦겠어. 그만 가자.”
더는 지체할 여유가 없기에 서둘러 새 양복 재킷을 걸쳐 입은 현규는 휴대폰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빠르게 집을 나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1층 버튼을 누르는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 두 사람의 휴대폰이 울려 대기 시작했다.
지금 걸려 오는 전화면 어디서 오는 건지 너무나 뻔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화면을 확인한 수현은 예상에서 벗어남이 없는 상대의 이름을 보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지금 들어가요. 5분 정도 걸릴 거예요.”
- 또 영업팀 박 대리님이세요.
“내가 직접 영업팀으로 가서 PT해 준다고 하세요.”
안 그러면 오늘 종일 전화하겠다고 수현이 말을 자르자 그제야 직원이 안도한 듯 전화를 끊는다.
그사이 옆에서 전화를 받고 있던 현규를 흘깃 보는데 전화를 받고 “네.”라고만 한마디 한 현규가 잠시 후 전화를 끊는다.
“누구예요?”
업무 전화치고는 너무 말이 없는 것 같아 슬쩍 휴대폰 화면을 바라본 수현은 거기 적힌 이름으로 상대가 누군지 싫어도 알게 되었다.
정자 기증자
“……대표님이세요?”
“응.”
“그런데 그렇게 끊어도 돼요?”
잘 듣지는 못했어도 저쪽은 화가 나서 계속 뭐라고 하는데 형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것 같아 그렇게 묻자 휴대폰을 확인하던 형이 무심히 중얼거린다.
“돼. 도촬에 사생활 침해에 협박에 위협에, 별이 끝이 없으니.”
“……네?”
“조만간 법정에서 뵐 수도 있겠어…….”
뜻을 알 수 없는 현규의 말에 수현이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껌뻑이자, 현규가 잠시 수현을 내려다보다 말을 흐린다.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이미 현규에 대한 신용도가 바닥을 친 상태라 막 건물을 나선 수현이 현규의 옷자락을 잡으며 그를 올려다본 순간 현규가 수현의 목덜미를 잡고는 입술을 겹쳤다.
여봐란듯이, 길가에 선 채 수현에게 키스를 한 현규는 아주 진하게 그리고 길게 입을 맞췄다.
점심시간이 지난 무렵이라 거리는 제법 한산했지만, 그래도 큰길가였다.
날씨가 유독 좋은 탓에 커피를 손에 들고 일부러 느리게 걸음을 옮기던 사람들이 놀라 두 사람을 돌아봤지만 현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주 느긋하게 키스를 남긴 뒤 천천히 입술을 떼곤 멍하니 있는 수현의 이마를 손끝으로 두드릴 뿐이었다.
“늦었어.”
이젠 진짜 가야 한다며 현규가 먼저 수현의 팔을 잡아끌자 기습 키스에 당황해 있던 수현이 재빨리 현규의 뒤를 따른다.
“어…….”
얼결에 현규에게 끌려 거의 달리듯 걸음을 떼던 수현은 한순간 기묘한 느낌을 받곤 뒤를 돌아봤다.
잘은 모르겠지만 시선이 느껴졌다.
아주 먼 곳에서.
“저기, 형…….”
뭔가 이상하다고 현규 형에게 말을 걸려는데 다시 휴대폰의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또 그 전화다. 아무래도 오늘 박 대리가 애들을 잡으려는 모양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서둘러 걸음을 옮기며 수현은 일단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 시선에 대해서는 잠시 잊은 채.
* * *
“……으로 클릭만 하시면 됩니다.”
“네.”
점심시간 이후 또 한 번 발작을 한 영업팀 박 대리의 극히도 순종적인 답에 수현은 의아해하는 눈길로 앞에 앉은 그의 머리통을 내려다봤다.
전화로 하도 난리를 쳐 직접 사무실까지 온 건데 예상 외로 박 대리가 너무 고분고분했다.
오래 보지는 않았지만 그간 겪어 본 박 대리는 절대 이렇게 얌전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알파 특유의 거만한 기질에 알파 외의 사람들, 특히 오메가나 여성의 말은 일단 무시하는 타입이라 솔직히 같이 일하기 싫었는데, 지금은 너무 공손하다.
그 태도가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협조적이라고 트집을 잡을 수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은 이 사람 옆에 있고 싶지 않다.
원래도 이 사람이 쓰는 향수를 싫어했지만 오늘은 유독 역하다.
개인적으로 제일 싫어하는 머스크 향이다.
그래서 재빨리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럼, 더 물어보실 거 있으세요?”
“아뇨, 됐습니다. 다른 건 알아서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다른 영업팀분들 문의 사항 있으면 지금 말씀하세요.”
온 김에 한 방에 처리하고 가 줄 테니 뭐든 물어보라며 모처럼 쓴 안경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다들 별 불만 없는 눈치였다.
다행히도 새로운 시스템은 호평을 받는 중이었다.
UI는 가벼워지고 분류도 깔끔해진 데다 어지간한 서류 작업은 태블릿에서도 가능하도록 만들어 놨으니 불만이 있을 리가 없다.
이전보다 덜 직관적인 느낌이 다소 아쉽긴 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문제고.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문제 있으면 연락 주세요, 라고 인사를 마친 수현은 가벼운 걸음으로 영업팀을 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리고 막 팀원에게 지금 올라간다는 메시지를 보내려는데 앞에서 오는 두 명의 직원이 웃으며 말을 건넨다.
“오랜만이야, 이 대리.”
“오랜만이에요. 차 실장님, 윤 팀장님, 잘 지내셨어요?”
회계팀의 두 분을 보곤 웃으며 반갑게 인사하자 윤 팀장님이 싱긋 웃는다.
“아니, 못 지냈어. 일 더럽게 많아서.”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손에는 김밥과 라면이 잔뜩 들려 있었다. 그리고 몇 가지 주전부리도.
“아직 식사 못 하셨어요?”
“응. 오전 내내 바빠서.”
너희 때문에, 라고는 안 했지만 새로 적용한 시스템 때문에 애 좀 먹었다는 반응이었다.
그럴 만하다. 하는 김에 회계 시스템까지 손을 봤으니까.
“쓰다 보면 편하실 거예요. 지난번에 요청하신 기능 다 들어갔어요.”
“그건 좋긴 하더라. 익숙해지면 일거리는 확실히 줄겠어.”
“회계 시스템까지 손대느라 진짜 고생했어요. 막판에 오류 나서 일주일 동안 퇴근도 못 했다고요.”
“아, 그래서 그때 상태가 그 모양이었어?”
지난주에 시스템개발팀 완전 좀비 군단이었는데, 라며 그녀는 시원스레 웃음을 터트렸지만 수현은 심각했다.
“진짜 그때 죽을 뻔했어요. 그 덕에 엄청난 사고까지 쳤다고요.”
“무슨 사고?”
결혼 사기요, 라는 말이 입을 간질였지만 그건 쉽게 뱉을 말은 아니라 얌전히 입 안으로 욱여넣고 말을 돌렸다.
“그럼, 식사하세요. 혹시 쓰시다 문제 있으면 언제든 제 휴대폰으로 전화 주시고요. 회계 시스템 쪽은 제가 따로 체크해야 하니까요.”
“그래, 이 대리도 수고…… 어?”
수현의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가려던 그녀가 문득 걸음을 멈추곤 수현을 바라본다.
“이 대리 향수 바꿨어? 냄새 좋네?”
“향수요?”
“응.”
“향수 안 쓰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