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160)

“그래서 화장실로 도망간 거야?”

“네.”

“……그럼, 착신 거부를 하고 휴가를 써.”

“그럼 집으로 찾아오잖아요.”

“집 말고 다른 데 가 있으면 되지.”

“제가 가봐야 우리 집 아니면 삼촌 집이라 금방 들킬걸요.”

내 행동반경은 회사, 오피스텔, 집, 맛집 이게 끝이라고 수현은 본인의 슬플 정도로 단순한 사생활을 스스럼없이 공개했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어쩔 수는 없겠다고 현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오메가니 외부 활동이 그렇게 자유로울 수는 없다. 갈 수 있는 곳은 특히나 한정적이다.

그렇다고 호텔을 가면 체크인하는 순간 들킬 테고.

“다른 쪽으로 파견 나갈 수 있게 알아볼 테니 화장실에는 숨지 마.”

“화장실 따뜻하고 편해요. 물도 나오고.”

거기다 조용해서 사람들 오가는 것까지 확실하게 들려서 좋다는 수현의 옹호에 현규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낮아졌다.

“수현아…….”

좀 닥치라는 “수현아”였다, 이번 건.

그걸, 수현은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왜냐면 너무 삼촌 같아서…….

“형, 점점 삼촌 같아져요.”

갈수록 삼촌 말투랑 비슷해진다고 수현이 신기해하자 현규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다.

이번 것도 닥치라는 의미였다.

이번 건 현규다웠다.

“……내일은 팀장님이 팀별로 교육 시간 잡아 준다고 하시긴 했어요.”

“윤 팀장님이?”

“네.”

절대 윤 팀장답지 않은 대처에 현규는 의자에 기대앉으며 팔짱을 꼈다.

윤 팀장에 대한 평은,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고 단체 생활은 그다지 중요시 여기지 않는, 전형적인 아웃사이더 성향의 공대남이라는 거였다.

그리고 그와 수현을 스카우트한 헤드헌터의 평도 비슷했다.

본인이 좋아하는 일에만 관심 있고 또 그 좋아하는 일만 하는 타입이라 사내 정치에는 관심 없고 큰 욕심도 야망도 없는, 전형적인 워커 홀릭 엔지니어라 오히려 깍두기처럼 쓰기엔 좋은, 그냥 부품 같은 존재라는 것.

그렇게 보면 무해한 인간이지만 그런 유형의 인간이 이 정도로 적극적으로 수현에게 협조해준다는 건 마음에 걸렸다.

그를 오래 본 건 아니지만 윤 팀장 같은 유형의 인간은 절대 본인의 이익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게 감정적 이익이든 물리적 이익이든.

그래서 혹시나 하며 물었다.

“또 무슨 내기라도 하신 건가?”

“아뇨. 오늘은 내기가 아니라 주식이요. 우리 회사 주식 팔아야 하냐고 하시길래, 제가 주식 팔지 말라고 하고 우리 집 한성이라고 얘기해줬거든요. 그래서 금요일 오후에 마이너스 통장 써서 저희 주식도 사두셨나 봐요. 그런데 오늘 오전에 양쪽 다 올라서 거의 날아다니시거든요. 앞으로도 얼마든지 협조해주신다고 하셨어요.”

“아…….”

그러고 보니 그랬지, 라며 현규는 오늘 아침 장이 열리는 순간부터 경주마처럼 달리기 시작한 주식 그래프를 떠올렸다.

주말 내 두 사람이 이미 혼인 신고를 했다는 소문이 증권가에 퍼지면서 이쪽과 한성 쪽 주식뿐 아니라 그 관련주들까지 미친 듯이 치솟고 있었다.

덕분에 할아버지는 크게 기뻐하셨고 아버지가 분해 미치려고 하고 있다는 소식을, 비서를 통해 전해 들은 채였다.

어지간하면 고혈압과 부정맥으로 포럼 중 퇴장하셨을까?

그러고 보면 그것도 대단하다고, 현규는 새삼 부친의 더러운 성질머리에 감탄했다.

바로 올해 여름에 한 건강검진 결과 상 너무 건강해 몸에 염증 하나 없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영감탱이가 쓸데없이 건강하기까지 하다며 혀를 찼는데 뜬금없이 가족력에도 없는 고혈압에 부정맥이라니.

그게 분해서 온 화병이라면 성격 진짜 더러운 거다.

물론, 갑작스러운 고혈압과 부정맥의 원인에는 점심시간의 일탈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일부러 소문을 뿌려 주식 시장부터 점령해버렸다는 사실을 눈치챈 이유가 더 컸을 거다.

자신에게 완전히 당했다는 사실에 혈압이 솟구친 거다.

그러라고 한 짓이니 잘된 거고.

“그럼, 착신 거부할까요?”

“그래.”

그 말에 수현이 서둘러 그 번호를 착신 거부 걸려고 하는데 그새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너희가 안 하면 내가 이혼시킬 거야, 두고 봐. 너희는 이혼하게 돼 있어.]

[이정현이 내 사돈이라니 그건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야. 절대 난 너희 둘 인정 못해.]

연이어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한 수현은 그 메시지를 현규에게 그대로 보여줬다.

“시간 많으신가 봐요.”

일정표 보니 바쁘시던데, 라며 수현이 신기한 듯 말을 전하자 바로 그 직후 또 메시지가 도착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너희 둘을 이혼시킬 거니 일 복잡하게 만들기 싫으면 이혼 서류에 도장 찍어.]

갈수록 가관이라고 회사 대표이자 나름 시아버지라는 사람이 이 따위 문자나 보내고 있다는 사실에 현규는 혀를 찼다.

보자보자 하니 가지가지 한다.

“할 일이 너무 없으니 인생이 너무 무료하신가 보네. 좀 바쁘게 해드려야겠어.”

그렇게 말하며 현규는 수현을 대신해 아버지께 정성껏 문자를 보내드렸다.

[월동 준비 잘하세요. 올겨울은 꽤 추울 겁니다.]

할 말은 많았지만 그조차도 귀찮아 짤막하게 할 말만 한 뒤 재빨리 그 번호를 착신 거부하자 곧 문자창도 통으로 사라진다.

번호 하나가 사라지자 너무나 깨끗하고 쾌적해진 휴대폰의 문자 내역에 현규는 다시 휴대폰을 수현에게 전해 준 뒤 다시 숟가락을 들며 차분하게 계획을 세웠다.

시간이 많으셔서 주체가 안 돼 이따위 괴문자나 보내시는 모양이니 당분간 공사 양면으로 아주 바쁘게 해드려야 할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혼외자들의 습격과 함께 스토킹과 사생활 침해, 협박 등으로 형사 소송을 건 후, 임시 주주총회를 소집해 아름다운 알래스카 땅에서 올겨울을 나시면 인생이 좀 즐거워지실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문제의 세 영감탱이들이 매일 빽빽거리며 서로 싸우는 이유 역시 할 일이 없어서일지도 모른다며 현규는 모처럼 아버지께 평생 안 해 본 효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올겨울 보일러 대신 소장으로.

정성이 듬뿍 들어간 장어 덮밥의 마지막 한 숟가락을 먹어 치운 수현은 바로 눈앞에 놓인 종이컵을 손에 들었다.

에스프레소 3샷에 카라멜 시럽 2펌핑, 무지방 우유를 듬뿍 넣고 거품은 모두 뺀 카페 라테.

정확한 시간에 맞춰 도착한 커피를 손에 든 수현은 아주 만족스러워하는 얼굴로 빈 도시락을 옆으로 밀었다.

그러곤 자신과 마찬가지로 바로 맞은편 자리에 앉아 빈 도시락을 정리한 뒤 커피를 손에 드는 현규를 보며 웃으며 말을 건넸다.

“형.”

“응?”

“이제, 전화받으셔야 할 것 같아요.”

무서워요, 라는 말을 대신해 수현은 바로 테이블 위에서 요동을 치고 있는 현규의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그러니까, 문제의 시작은 현규 형이 자신의 휴대폰에서 대표님의 번호를 착신 거부하고 5분 후부터였다.

착신 거부했으니 이제 됐겠지 했는데…… 역시나 그렇게 쉽게 끝내실 분이라면 아버지와 지금까지 싸우고 있을 리가 없었다.

5분 정도 지나자 착신 거부를 당한 걸 눈치채셨는지, 그때부터는 비서들의 휴대폰으로 메시지 폭격을 시작했고 역시나 그걸 확인한 족족 현규 형이 전부 착신 거부에 걸어 버리자, 마침내 모르는 사람의 휴대폰까지 빌려서 전화를 하시기에 이르렀다.

그 상황에서는 그냥 받고 끝내는 게 낫지 않을까 했지만 현규 형은 가차 없이 그 번호마저 착신 거부에 걸고 휴대폰을 무음으로 돌려놓았다.

일단 거기서 마무리됐다고 믿고 겨우 식사를 다시 하려는데 역시나 대표님은 대표님이었다.

이번엔 현규 형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역시나 현규 형은 가차 없이 비서팀 전원의 휴대폰을 전부 착신 거부 걸어 버렸다. 심지어 기사님과 대표님과 접촉 가능한 모든 사람들의 번호를 다.

그쯤 되면 진짜 더는 전화를 못 할 거라 생각했지만 대표님은 자신의 상상 이상으로 끈질겼다.

이번엔 전략기획팀으로 전화해 현규 형에게 착신 거부를 풀라는 지시를 남겼고, 전략기획팀에서 온 연락을 받은 현규 형은 전략기획팀원들의 번호와 내선까지 전부 착신 거부에 걸어 버렸다.

“저, 형처럼 착신 거부 잘하는 사람 처음 봤어요.”

자신도 기계를 꽤 잘 다루는 편이고 휴대폰의 문자 패드를 누르는 것도 빠른데 형처럼 순식간에 그 많은 번호를 착신 거부 거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수현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정확히는 착신 거부에 걸 사람들을 그룹별로 기가 막히게 나눠 놓았다는 사실에 탄복했다는 게 맞을 거다.

마치 이런 일이 자주 있는 사람처럼, 형은 착신 거부에 프로페셔널했다.

애인들과 헤어지면 착신 거부에 건다는 것도 사실인 것 같다.

확실히 인성에 하자가 있다.

“앞으로 종종 모조리 모아 착신 거부 걸어야 하니 너무 연락처 저장할 때 아예 착신 거부용 그룹을 만들어 놔. 아버지와 비서팀은 꼭 묶어야 돼. 그리고 아버지 친구들 휴대폰으로 하실 때도 있으니 그쪽도 한 그룹으로 저장해 놔.”

“아니, 전 그냥 안 받으면 되니까 괜찮아요.”

받아도 멀리 떨어트려 놓거나, 아예 볼륨을 줄여 놓고 통화 중인지 확인만 하곤 다른 일 하니까 상관없다고 수현이 본인만의 노하우를 알려주자 현규가 그것도 괜찮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안 들으면 그만이지.”

다행히 수현은 남의 말은 전혀 안 듣는 데에 비상한 재주가 있으니 울리는 전화벨 소리를 계속 듣는 것보다는 그쪽이 나을 듯했다.

“그런데, 이제 진짜 전화받으셔야 할 것 같아요…….”

태연하게 대화를 하는 중에도, 계속해서 테이블에서 용트림을 하고 있는 휴대폰 위에는 ‘법무팀 강세영 팀장’이라는 이름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번 건 전략기획팀도 아니고 비서팀도 아니니 좀 받으라고, 수현은 채근하자 화면을 확인한 현규가 곧 휴대폰을 엎어 놓는다.

받기 귀찮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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