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걸 알아듣지 못하는, 멍청할 뿐 아니라 예의도 없는 것들이 천지에 깔려 있다니…… 오히려 그게 더 놀라웠다.
이건 지능의 문제다.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
박 대리에게 아무래도 몇 가지 교육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러니 그쪽은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고 하며 수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는데 순간 고요하던 문이 덜컹거리며 고함이 울려왔다.
“야! 강현규! 문 열어!”
쾅쾅 거리며 잠긴 문을 두드리는 남자의 고함에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나왔다.
“……젠장…….”
빌어먹을 사촌 형, 강세영이다.
이래서 족벌경영이 안 좋은 거다.
회사 안에 친인척들이 있으니 거추장스럽다.
조만간 본사에 있는 인척들을 모조리 지방으로 좌천시켜버리겠다고 이를 가는데 쿵쾅 거리는 소리가 더 커진다.
“야! 문 안 열어? 너 여기 있는 거 알고 왔어! 전화 좀 받아, 이 새끼야! 너 때문에 내가 피 말라 죽겠다고!”
아주 지긋지긋해 죽겠다며 고함을 내지르는 남자의 음성에 수현은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 겸 물었다.
“……누구예요?”
“……강세영 팀장님.”
“아…….”
너무나 익숙한 그 광경에 수현은 조금도 놀라워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집에 있을 때는 너무나 자주 보던 광경이라 친근하다 못해 반가울 지경이었다.
지수 형이 저러다 열 받으면 문을 박차고 들어와 내 방 문이 네 번인가 부서졌었지, 라고 회상하며 수현은 문을 가리켰다.
“문 열어주세요.”
회의실 문 부서지면 골치 아프니까, 라는 수현의 설명에 현규가 이를 악문 채 문의 잠금쇠를 푼다. 그러자 문짝이 떨어질 듯 거칠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남자가 현규에게 휴대폰부터 내민다.
“야, 전화 받아.”
아주 내가 치가 떨리니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하라고 세영이 휴대폰을 거의 떠밀 듯 건네자 결국 현규가 전화를 받는다.
“네.”
- 야, 강현규! 이놈의 자식! 감히 아버지에게 그딴 협박을 해? 네가…….
수현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울려 대는 부친의 고함에 현규는 망설임 없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사촌 형의 휴대폰에도 착신 거부를 걸어줬다.
“야, 그냥 끊으면 어떻게 해?”
“형도 전화 받지 마. 그리고 받을 거면 나한테 들고 오지도 말고.”
“어떻게 큰아버지 전화를 안 받아? 사무실에까지 전화를 하시는데.”
“착신 거부 걸어.”
“그게 말이 되냐?”
“안 되면 받든가.”
나한테만 갖고 오지 말라며 먼저 걸음을 옮긴 현규가 수현을 쳐다본다.
“오늘 몇 시에 끝나?”
“어…… 큰 문제 없으면 정시퇴근할 거예요.”
“그럼, 같이 퇴근해. 빨리 사무실로 가 봐.”
오류가 났다니 서두르라는 현규의 말에 수현이 시각을 확인하곤 걸음을 서두른다.
“네. 그럼, 저 가 볼게요. 강 팀장님도 다음에 뵙겠습니다.”
현규에 이어 세영에게까지 인사를 남긴 수현은 서둘러 회의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뒤에 남겨진 현규와 세영이 다투는 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그건 그쪽 집안일이라 무시한 채 걸음을 서둘렀다.
다소 정신은 없지만 평범한 하루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런 파란도 예상할 수 없는…….
* * *
- 형, 저 오늘 정시 퇴근 못 할 것 같아요.
퇴근 시각이 조금 지나 막 사무실에서 나가려던 순간 걸려 온 전화에 현규는 침착하게 되물었다.
“……왜?”
- 오류가 나왔는데 오늘 내로 수정해야 해서요.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럼 언제쯤 끝날 것 같은데?”
- 복잡한 건 아니라 9시쯤에는 정리될 것 같아요. 형, 먼저 퇴근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아니, 나도 어차피 일이 많아서 야근을 해야 한다고 전화하려던 참이었어.”
말과는 달리 이미 자리에서 선 채 잔뜩 싸 놓은 짐을 현규는 다시 주섬주섬 풀어 놓기 시작했다.
어차피 오늘 야근을 하긴 해야 했다.
수현이 정시 퇴근을 한다고 해서 일을 잔뜩 싸 들고 퇴근하려고 했던 건데, 야근한다면 같이 하면 된다.
- 형도요? 하긴, 전기팀 바쁠 때죠?
전략기획팀이야 항상 바쁘지만 이 시기는 특히 더 바쁠 때라 정시퇴근하는 게 이상하긴 했다는 수현의 말에 현규는 사내커플의 장점이자 단점을 하나 알아챘다.
같은 회사다 보니 서로의 스케줄이나 돌아가는 상황을 너무나 잘 알 수밖에 없다. 그게 서로를 이해하는 포인트가 될 수도 있지만 싸움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절대 어설픈 거짓말은 하면 안 된다.
그게, 아주 마음에 들었다.
수현의 스케줄이 훤하다는 게.
“그럴 시기니까. 그럼, 저녁은 어떻게 할래? 주문해서 먹을까? 아니면 잠깐 나가서 식사하고 올까?”
- 어…… 저희는 작업 중이라 팀에서 대충 컵라면으로 때울 것 같은데요.
역시나 눈치는 아직 한참 없는 수현의 반응에 현규는 슬슬 끓어오르는 짜증을 참으며 수현을 설득했다.
“식사는 제대로 해야지.”
- 어…… 그런데, 다들 일하는 중이라…….
좀 곤란할 것 같다는, 수현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저 멀리서 웅성거리는 남자들의 음성이 들렸다.
“괜찮아, 나가서 먹어!”, “밥은 먹고 해야죠!”, “식사하고 오세요. 저흰 신경 쓰지 마세요, 제발!”이라는, 사회생활 잘하는 직원들의 외침이 울려 왔다.
사내에서 시스템개발팀이라면 검은 바퀴벌레 아웃사이더 군단으로 유명한데 의외로 사회생활에 필요한 눈치와 요령은 갖추고 있었다.
물론, 수현은 빼고.
- 그래도 나갔다 오면 시간이 빠듯한데요. 10시 넘길 수도 있어요.
작업은 한자리에 앉아 계속해야지 괜히 나갔다 돌아오면 다시 집중할 때까지 오래 걸린다며 수현이 팀원들에게 빨리 진행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하는 순간, 저 멀리서 아주 간절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좀 늦어도 괜찮아요!”, “저흰 애인도 없고 친구도 없는 게임 덕후들이라 회사에서 밤새도 돼요! 저희 같은 건 주변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라고 생각하세요.”, “저희 대리님하고 저녁 먹고 싶지 않아요! 나가서 드세요! 밥맛 떨어져요!”라는 막말까지.
간절하다 못해 절박한 그들의 사회생활을 등에 업고 이번엔 현규가 되물었다.
“그렇다는데?”
어쩔래, 라는 승리를 확신한 권유에 수현이 아주 쉽게 넘어와 준다.
- 그럼, 어디 가실 거예요?
“뭐 먹고 싶어?”
- 백반이요. 근처에 맛있는 김치찌개집 있는데요.
“거기로 가.”
- 그럼, 점심을 늦…… 아니, 하여간 아직 배는 안 고프니까…… 7시에 거기로 가요.
“7시에 데리러 갈게.”
- 네, 그럼 기다릴게요.
그 어감이 좋다고, 현규는 문득 떠올렸다.
기다릴게요, 라는 말이, 그 음성이, 그 단어가 너무 예뻤다.
“그래…….”
더할 수 없이 충족감이 느껴지는 상황에 현규는 살짝 미소를 띤 채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러곤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어 둔 뒤 커프스를 풀었다.
난방이 잘돼서인지 사무실 안 공기는 다소 덥고 조금은 습하기까지 했다. 약간의 갈증과 더위가 느껴져 소매를 걷어 올리고, 다시 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꺼내 놓은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일이든 뭐든 의무가 아니라 충실하고 싶어진 기분에 막 쌓아 둔 오래된 서류들을 끌어당기는데 다시 휴대폰이 울려 왔다.
아버지를 제외한 문제의 번호들 대부분 착신 거부를 해제한 후라 또 시작인가, 라는 생각에 화면을 확인하는데 다행히 아버지는 아니다.
‘최윤석 변호사님’이다.
“네.”
- 너, 너희 아버지한테 무슨 짓 했냐?
무슨 짓을 했는지 안 했는지를 묻는 게 아닌, 무슨 짓을 한 건 확실한데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는 물음이었다, 그건.
뜻밖의 질문에도 현규는 무심히 대답했다.
“아무것도요.”
- 아무것도 안 했는데 너희 아버지가 왜 불효 소송을 하겠대?
“……불효 소송이요?”
- 그래. 네 지분 전부 빼앗아 오겠다고 이를 갈던데?
듣던 중 어이없는 그 말에 현규는 실소했다.
불효 소송이라니, 어불성설이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걸 보니 또 자기 마음대로 안 되니 발작을 일으키신 모양이었다.
말 같지도 않은 그 소리에 아버지가 주장하고 있는 법리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일단, 제 지분은 할아버지한테서 증여받은 거라 아버지와는 무관하고 둘째로 전 효도 계약서를 작성하지도 않았습니다. 더불어, 가장 중요한 쟁점인 불효한 기억이 없는데요?”
분명 자신은 효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효라고 할 만한 어떤 행동을 한 적이 없다. 애초에 회사 외에서는 얼굴 볼 일도 없는데 효고 불효고 할 일이 없다.
아니, 그 전에 그 사람은 효니 불효니를 따질 입장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