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과 지각이 있는 인간이라면 효의 기본 조건이 자신의 양육이라는 걸 알아야지. 이쪽이 오히려 제대로 양육하지 않아 친권 박찰을 위한 소송을 걸어도 모자랄 판에 본인이 불효 소송이라니, 같지도 않다.
- 그건 당연하지. 내가 그런 계약서를 작성한 기억도 공증한 기억도 없으니까. 네 아버지 성격이 별로라 나 외에는 다른 아는 변호사도 없거든.
“그러시겠죠.”
- 그러니까 대체 뭐라고 했길래 강민혁이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면서 화병으로 입원까지 했냐고.
“……입원하셨나요?”
- 그래.
“저런…….”
일단 현규는 탄식은 해 줬다.
하지만 아무 감정도 깃들지 않은 국어책 읽기 수준의 어조는 누가 듣기에도 예의상 해주는 반응임이 너무나 명백했다.
최 변호사가 듣고 있으니 옜다, 하고 던져주는 느낌이었다.
- 입국하자마자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터질 것 같다며 입원해서 폐 CT에 뇌 MRI까지 찍었어. 그걸로도 분이 안 풀렸는지 전화해서 당장 너한테 소송 걸겠다고 하던데?
“찍을 곳이 잘못됐네요. 아버지 몸에 문제가 있다면 아래쪽일 테니, 그쪽을 찍어 보라고 하시죠. 이왕이면 방사선 많이 나오는 걸로요.”
인류의 평화를 위해 그 김에 고자가 되면 좋을 테니까요, 라는 말에 최 변호사가 크게 웃는다.
- 아버지한테도 가차 없네.
“제가 효자라서요.”
- 뭐, 너 정도면 효자긴 하지. 그래서, 대체 무슨 효도를 했길래 강민혁이 저러는데?
속 시원하게 말 좀 해 보라는 최 변호사의 다그침에 현규가 여전히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인다.
“글쎄요. 짚이는 바가 너무 많아서 모르겠네요.”
- 민혁이 말로는 창문을 열어 두고 섹스를 했다고 공연 음란죄니 어쩌니 하던데?
마침 노트북 화면에 뜬 새 메일을 확인하려 손을 움직이려던 현규는 순간 멈칫했다.
그러곤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그걸 본인 입으로 말하던가요?”
- 응. 하도 횡설수설해서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그런 얘기였어. 이정현이나 강민혁이나 화나서 말이 빨라지면 방언을 쏟아 내서 알아듣기 힘들거든.
40년 우정으로 대충 알아들은 내용이 그랬다고 최 변호사가 답한 순간 현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쯤 되니 화도 안 난다. 오히려 그냥 웃긴다.
“본인이 흥신소에 의뢰해 수현이 오피스텔 내부를 불법 촬영했다는 사실을 자백하다니, 대단하네요. 그것도 제 고문 변호사이기도 한 아저씨께요.”
어떤 의미로는 너무 멍청해서 존경스럽다는 현규의 반응에 최 변호사가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묻는다.
- 불법 촬영?
“토요일부터 흥신소 직원을 붙이셨거든요. 꽤 실력이 좋은 모양인지 종일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어 대던데요.”
- ……민혁이가 너랑 수현이한테 사람을 붙였다고?
“네. 정확히는 스토킹이죠. 사생활 침해 및 도촬을 더한. 옵션으로 협박까지요.”
그거 전부 한 번에 고소할 생각이니 잘 기억해 두라는 현규의 조언에 최 변호사가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라는 투로 되묻는다.
- 잠깐, 그럼 자기가 사람 써서 너희 섹스 장면을 촬영하고는 공연 음란죄라고 했다는 거야?
“그렇겠죠. 그 외에는 짚이는 바가 없으니.”
- 설마 너희를 이혼시키려고 그런 쓸데없는 짓을 벌인 건 아니겠지?
“정확히, 맞습니다.”
결혼시키려고 그러진 않았을 테니까요, 라는 현규의 태연한 답에 최 변호사가 탄성을 내뱉는다.
- 이야, 강민혁 완전 또라이네. 아무리 그래도 도촬까지는…….
요즘 불법 촬영에 대한 여론이 안 좋은데, 라는 딱 변호사다운 걱정에 현규가 그게 포인트라고 공감한다.
“그래서, 곧 소송할 생각입니다.”
- 아버지를?
“네.”
- 가족 간은 특수한 케이스라 소송이 될지 모르겠는데…… 잠깐, 넌 그걸 어떻게 안 건데?
“어머니가 아버지 쪽에 스파이를 심어 놨거든요. 그 김에 아버지 메일도 해킹해 아버지한테 전송되는 사진과 동영상들은 전부 실시간으로 받아 보시는 중이라 저한테도 곧장 보내 주고 계십니다.”
- ……윤준성이?
“네.”
아버지의 바람기 탓에 항상 부친의 메일이나 메시지를 수시로 감시하고 계시던 어머니는 이번에 아주 큰 게 낚였다며 매우 기뻐하셨다.
그리고 하는 김에 아주 아버지 멘탈을 박살 내 지근지근 밟아 버리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에 기쁘게 응하고 있다고 하자 최 변호사님이 진심으로 감탄하신다.
- 이야, 그 녀석들은 여전하구나.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면서 이럴 때는 둘이 똑같아. 어떻게 보면 천생연분이네. 걔네는 고등학교 때도 그렇게 서로 싸워 대고 뒤통수치고 몰래 엿 먹이면서 내가 너랑 결혼을 할 것 같냐, 너 같은 새끼랑 살 섞고 사느니 평생 혼자 산다 하더니 아직도 그러고 있네. 뭐, 아직 서로 죽이지는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곧 죽일 것 같더니 생각보다 오래 살려 두네, 라고 최 변호사는 먼 과거를 회상했다.
벌써 40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생생하다는 그의 증언에 현규가 물었다.
“고등학교 때도 그러셨나요?”
부모님 두 분이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정략결혼이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시절 이야기를 접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굳이 얘기할 필요도 없는, 데면데면한 사이였겠거니 했는데, 그때부터 이 모양이었다니 조금 뜻밖이었다.
서로 모르는 관계도 아니라 원수간이었다면 아무리 정략이라도 파혼하는 쪽이 좋았을 텐데…….
두 분을 이해하는 건 포기한 지 오래지만 지금은 더더욱 난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저렇게 피곤하게 사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 정확하게, 지금이랑 똑같았어. 이정현, 서재민, 강민혁, 윤준성, 그리고 정윤겸까지. 다섯이 장난도 아니었지.
“……정윤겸은 또 누군데요?”
- 어, 넌 모르나?
“유명인인가요?”
- 이정현 파트너이자, 수현이를 낳은 오메가. 그 녀석도 동창이야.
변호사님의 친절한 설명에 어렴풋하게 어린 시절 몇 번 봤던 그를 기억해 낸 현규는 작게 탄식을 흘렸다.
그리고 태어나 처음으로 풍수지리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기 시작했다.
절대 이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학교 출신인 문제의 인간들을 떠올려 보니, 거기 터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그 학교에 그런 사람들만 모이는 건지, 아니면 그 학교에서 사람들을 그렇게 만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학교에 문제가 있는 건 분명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 학교가 자신의 모교라는 점인데…….
자신의 모교라면 진원 형과 지수와 수현의 모교이기도 하다.
그렇게 나열해 놓고 보니 더 이상하다.
그만 알아보자.
- 어쨌든 이제 사정은 알겠어. 강민혁이 먼저 스토킹을 시작해서 네가 일부러 강민혁 성질을 긁어 놨다는 거지?
“설마요. 그냥 올겨울 추울 테니 겨울 준비 잘하시라고 문자 하나 넣어 드린 것뿐입니다.”
사실 일부러 아버지 성질을 긁을 정도로, 아버지한테 큰 관심도 애정도 없다고 현규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아버지 전화를 안 받은 것도 일부러 무시하려는 게 아니라 진짜 시간이 아까워서였다. 그런데 자꾸 귀찮게 건드리니 효도의 필요성을 느낀 것뿐이다.
올겨울 시원하게 나시라고.
- 네가 말로 직접 하니 알겠다. 강민혁이 왜 화가 났는지.
누가 들어도 확실하게 위협하는 말투이긴 했다.
- 강민혁이 먼저 쓸데없는 짓을 한 건 맞는 것 같은데…… 그래도 너무 자극하지는 마. 지금 병원에서 혼자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변호인단에 의사들 다 불러 놓고 절대 원인을 알기 전에는 퇴원 안 한다고 설치는 모양인데 그 자식 성질에 약 오르면 어디로 튈지 모른다고. 강민혁이 아무리 하찮아도 우성 알파야. 구력이 있다고.
“네, 오래되긴 했죠.”
- 그 오래된 구력이 무서운 거거든. 저 녀석이 얼마나 교활하고 잔머리 잘 굴러가는 놈인지 알잖아? 너무 까불면 너도 당한다?
확실히 그건 그럴 수도 있다고 현규도 인정했다. 자유분방한 하반신 탓에 집안에서도 거의 내놓은 자식이지만 그 치명적인 단점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께서 아버지를 못 버리는 이유는 확실했다.
대담하고 영리하며, 교활하면서도 배짱이 좋다.
평소에는 하반신 관리 못 하는 정신 나간 한량 같아 보이지만, 무슨 일이든 한번 시작하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 독기에 지고는 못 사는 승부사 기질까지 있다.
그에게 한 번 물리면 답도 없다. 죽어도 안 놓는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놓지를 못하는 거다. 사냥개로 쓰기엔 최적이니까.
그러니 자신도 늘 뒤통수를 조심해야 한다.
“그건, 명심하겠습니다.”
- 그래, 그럼 수현이한테도 안부 전해 주고 다음에 보자.
“네.”
꽤 긴 통화를 마무리한 후 휴대폰을 책상 위에 올려 둔 현규는 손목시계로 시각을 확인했다.
6시 24분.
아직 7시까지는 시간이 있다.
대충 확인할 내용만 훑어본 뒤 19층으로 가 수현과 저녁 식사를 할 생각에 현규는 다시 서류를 손에 들었다.
하지만 뭔가 조금 마음에 걸렸다.
아버지가 입원하셨다는 사실에 양심의 가책을 느낄 리가 없으니 그건 절대 아닌데, 이상하게 뭔가가 걸렸다.
그게 뭘까?
뭔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찝찝한데…….
불쾌한 그 예감에 책상 위를 손끝으로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퍼뜩 정신을 차리곤 짤막하게 답했다.
“들어오세요.”
* * *
“형, 무슨 일 있으세요?”
식사 후 커피를 사 들고 회사로 돌아가던 중, 수현은 갑작스레 표정을 굳힌 현규를 의아한 듯 바라봤다.
방금까지만 해도 기분 좋은 듯 웃고 있던 그가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정색하며 살벌한 기색을 풍기기 시작했다.
원래도 냉랭한 얼굴이라 늘 무서워 보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굉장히 짜증이 나 있는 얼굴이었다.
물론, 자신과 있을 때의 현규 형은 태반이 짜증이 나 있긴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자신을 볼 때의 짜증은 ‘아, 저 화상’이라는 느낌이라면 지금은 진짜 심한 말을 참고 있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