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가 역할극에 너무 심취한 모양인데…… 더 심해지기 전에 빨리 빠져나와. 그러다 치료받아야 될 수도 있어.
“역할극이 아니라 사실이에요.”
- 그렇게 주영이가 싫으냐? 그럼 다른 상대를 찾아볼 테니 빨리 이 대리부터 정리해.
“주영이든 누구든 결혼할 생각 없고 제가 결혼하고 싶은 상대는 이수현뿐이니 아버지가 포기하세요.”
- 그러니까, 그게 말이 되냐고? 네가 언제 이 대리를 봤다고 둘이 사랑을 해? 차라리 원나잇을 했다가 애라도 생겼다고 하면 그러려니 하지!
“제가 좋아했어요.”
- 네가 얼마나 날 우습게 보면 그걸 믿으라고…….
현규의 말을 무시한 채 혼자 흥분해 진짜 방언을 쏟아내는 듯하던 강 대표가 순간 말을 멈춘다.
그러곤 내가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라는 투로 되묻는다.
- ……방금, 뭐라고?
“제가 짝사랑했다고요.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그럼 10년 넘게 짝사랑을 했다고? 네가?
“네.”
짤막하지만 단호한 현규의 답에 순간 강 대표가 절규하듯 고함을 내질렀다.
- 그게 말이 돼?
“아버지가 헛발질한 덕에 겨우 여기까지 왔으니 그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안 그랬으면 지금까지 수현이가 해준 형하고 결혼할 거라고 믿고 있었을 텐데 좋은 계기를 만들어 주셨으니까요.”
게다가 그 난리를 쳐서 수현의 등까지 떠밀어 준 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현규의 진심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의 존재에 감사한 게 이번 결혼 난동이었으니까.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 이상 간섭하려 드는 건 곤란하다. 그러니 여기서 이만 철수하라는 현규의 충고를 빙자한 위협에 수화부 저편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한동안 고요하더니, 그가 다시 묻는다.
- 그러니까, 네가 진짜 이 대리를 짝사랑했다고? 10년 넘게?
자각한 건 얼마 안 되었지만 하여간 그때부터 시작이긴 했기에 빠르게 긍정했다.
“네.”
- ……왜?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부친의 물음에 현규 역시 그간 필사적으로 고민하고 생각하며 겨우 내린 결론을 입에 담았다.
“신경 쓰여서요.”
- 뭐?
“그냥, 처음부터 신경 쓰였어요. 생긴 것도 신경 쓰이고 말 안 듣는 것도 신경 쓰이고 저한테서 도망 다니는 것도 신경 쓰이고 그냥 다 신경 쓰였어요.”
그래, 그랬던 것 같다.
본인도 도저히 이해가 안 가 오래도록 고민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언젠가 수현이 했던 말처럼 신경 쓰인 순간 끝난 거다. 자신도 그걸 너무 늦게 알았지만 그런 거였다.
그게 호르몬 반응에 의한 것이든, 외형이나 성격, 혹은 어떤 매력 포인트에 대한 호불호에 의한 것이든.
“제가 짝사랑했고 기회가 와서 필사적으로 잡은 거니, 이혼은 꿈도 꾸지 마세요. 제 별명 아시죠? 어릴 때는 한번 물면 안 놔서 미친개였고 커서는 죽을 때까지 안 놓는다고 독사인 거.”
그러니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이혼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현규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포기하는 쪽이 낫다고 아버지를 세뇌하듯 반복해 말했지만 불행히도 이 상황에서도 아버지가 꽂힌 포인트는 다른 부분이었다.
- 미친개고 나발이고! 네가 진짜 이정현 아들을 짝사랑했다고? 그것도 10년 넘게?
‘이 대리’에서 ‘이정현 아들’로 바뀐 호칭에서 아버지가 이수현이 아니라 이 대표님에게 꽂혔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그 부분에서 현규는 지독한 피로감을 느꼈다.
저 정도면 애증이다.
가끔 혹시 이 대표님과 둘이 고등학교 때 사귀다 더럽게 헤어져서 저러나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어쩌면 그게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아들이나 파트너 없이는 살아도 이 대표님 없이는 못 살 것 같다.
“들으신 대로입니다. 그러니 제발 포기하세요.”
- 너, 이…….
갑자기 커진 음성이 차마 그 뒤로 이어지지 못한 채 사그라졌다. 이번엔 진짜 충격적이었는지 숨이 끊어질 듯한 소리가 울려왔다.
- 아, 내 머리. 뒷골. 아, 내 혈압…….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 뒤로 너무나 상투적이라 식상한 대화가 이어졌다. 드라마나 소설에서 저런 대사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이 진짜 저런 말을 쓰나 의심했는데, 지금 확실해졌다.
사용한다. 학습으로 인한 관용어 사용 같은 건지, 본능적으로는 나오는 반응인지는 모르겠지만.
“꾀병인 거 뻔히 아니, 괜한 시간 낭비 그만하시고 어서 퇴원이나 하시죠.”
- 안 해! 이 불효자식아!
그 말과 동시에 뚝 끊기는 전화에 현규는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작게 혀를 찼다.
어차피 저 성격에 사흘 입원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알아서 퇴원할 거고 그럼 그때 강제로 전용기 태워 보내 버리면 된다.
겨우 동거까지 하게 됐는데 내가 미쳤다고 나흘이나 해외 출장을 가겠냐 하며 현규는 다시 일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다시 울려오는 휴대폰 벨 소리에 화면을 확인한 현규는 한숨을 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정이원 비서팀 팀장이었다.
“네.”
- 정이원입니다.
“네.”
- 대표님 혈압이 갑자기 급히 오르셔서 사흘간 심장 검사에 들어가실 예정입니다. 심전도 검사부터 홀터 검사 및 수면 분석까지요.
“……겨우 혈압 오른 걸로요?”
이 무슨 미친, 이라는 말을 꾹 참고 그렇게 묻자 비서팀장님이 언제나처럼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답해 온다.
- 네. 혈압이 갑자기 180까지 오르셨거든요.
이번 건 예상치 못했다.
180은…….
“그건 또…… 신선하네요.”
혈압 역시 지극히 정상이라고 들었는데 순간 180까지 치솟았다니 그건 또 나름대로 기괴하다.
- 그런 이유로, 출장은 강 팀장님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대표님이 참석하실 수 없으면 부대표님이 가시면 되죠.”
아버지의 입원이 확실해지자 현규는 재빨리 전략을 바꿨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혈압이 그 정도까지 올랐으니 그 핑계로 아버지는 절대 퇴원하지 않으실 거다. 그렇다면 이번 출장은 일개 전략기획팀 팀장인 자신이 아니라 부대표가 가는 게 맞다.
그런 중요한 자리에는 아무나 가는 게 아니다.
- 머리 굴리셔도 소용없습니다. 출장은 강 팀장님이 가셔야 합니다.
“어째서요?”
- 정확히 이틀간 연이어 있는 스케줄 중 가장 중요한 일정이 뭔지 아시지 않습니까?
담담한 이원의 물음에 현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오가는 시간을 제외하고 출장은 겨우 이틀이었지만 그 이틀간이 강행군이었다. 수출 계약과 지사 방문, 그리고 현지 공장 건설을 위한 주와의 협약식과 그 후의 파티까지.
그중 대부분은 부대표가 참석해도 상관없는 자리였지만 몇은 평사원에서 부대표까지 올라간 분이 참석하기에는 애매했다.
특히나 협약식 이후의 파티는 목적 자체가 인맥 형성이다. 아마 그 지역의 셀레브리티들이 모두 모여 서로 얼굴을 익힌 뒤 연락처를 교환하게 될 거다.
정치인과 경제인뿐 아니라 언론인과 각 직종의 전문가들까지.
“젠장…….”
- 애초에 그쪽에서 원하던 건 팀장님이셨습니다. 실무자이자 실권자와 대화하기를 원하니까요.
그러니까 실무자이자 최대 주주인 네가 가라는 이원의 말에 현규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이번 출장은 기본적인 협의는 모두 마치고 사인만 하면 되는, 일 자체는 간단해 보이지만 사이즈는 큰 건들이었다.
물론, 아버지의 서명이 필요하지만 그거야 아버지가 침대에 누워 전자 결재를 하면 그만이다.
이런 건은 보통 사인 후 남길 사진과 그 이후 파티가 중요한 거라 그쪽에서 자신을 원하는 것도 당연하다.
실권을 모두 가진 실무자라니…… 현규는 슬프지만 더는 빠져나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아버지가 이겼다.
함정을 아주 잘 파 놨다.
짜증 나게.
-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이미 현규가 넘어왔다는 사실을 알아챈 듯 비서팀장이 말을 돌리자 현규는 살짝 미소 띤 얼굴로 이를 갈 듯 중얼거렸다.
“……아버지께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다고 전해 주세요.”
- 그런 건 직접 말씀하십시오. 내일 오후 3시 출발이니 출장 준비 잘하시고요. 보름 만에 돌아가시는 거니 낯설지는 않겠네요. 아, 그리고 혹시 모르니 협약 내용에 대해서는 비행기 안에서 해외업무팀에게 브리핑받으시면 됩니다.
“그거 제가 전부 협의했습니다.”
한국에 오기 전, 그쪽 지사에 있을 때 직접 협의하고 세부 사항 조율까지 다 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누구한테 브리핑을 받겠냐고 비꼬자 그제야 그가 작게 “아.”라고 내뱉는다.
- 그러셨죠. 그럼 일이 쉽겠네요. 거기에는 제가 동행하지 않고 대신 장 대리가 함께 갈 겁니다. 잠시 후에 연락드릴 테니 상의해서 움직이세요.
“알겠습니다.”
- 그럼.
통화를 마무리한 뒤 휴대폰을 던져 둔 현규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등받이에 깊이 기대앉았다.
그러곤 가볍게 팔걸이의 끝을 손끝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입원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기에 출장 자체는 놀라울 게 없었다.
너무나 아버지다워 오히려 안심될 정도였다.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이고, 아주 직관적이다.
뭘 하려는 건지 훤히 보여서 좋다.
다 알면서도 피할 수 없다는 게 조금 자존심 상하긴 하지만 어쨌든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거기에 맞춰 말을 움직이며 퀘스트를 클리어해야 한다.
이 출장의 목적은 간단하다.
아버지는 자신과 수현을 일단 물리적으로 떼 놓으려는 거다.
시간은 나흘. 문제는 그사이 뭘 하시려는 거냐, 인데…….
“……단순한데 복잡하단 말이지…….”
그러니까, 바로 그게 문제였다.
대범하고 직선적이지만 교활한 분이라 큰 줄기만 보면 일관성이 있지만 디테일한 전술 부분은 예측할 수 없다.
아니, 애초에 그 정도로 아버지와 친하지가 않다. 사고 치는 패턴이나 기질은 잘 알지만 아버지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세세한 부분에 대해선 모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버지에게 관심을 좀 가질걸, 이라고 생각해 봐도 여전히 별로 관심 갖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