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160)

그냥 대충 추론하기에 자신의 출장 기간 중 수현을 압박해 이혼시키시려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수현을 데리고 가면 된다.

* * *

“안 돼요.”

작업이 끝난 뒤 현규의 사무실로 와 그 안을 구경하던 수현의 답은 간단했다.

못 간다.

“……어째서?”

작업 마무리돼서 휴가 낼 수 있다고 했는데, 라고 현규가 되묻자 수현이 그건 지난주의 이야기라고 딱 잘라 설명한다.

“지난주에는 휴식기였고 오늘 오류가 나온 이상 내일 또 어떤 오류 나올지 몰라서 휴가 못 내요.”

아마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배제할 수는 없다며 수현이 난 출장에 못 간다고 다시 한번 답한 순간 현규는 재빨리 전술을 바꿨다.

“그럼 그냥 나랑 출장을 간다면?”

“……왜요?”

사내 바퀴벌레, 혹은 이 건물 지박령이라고 일컬어지는 시발팀이 왜 해외 출장을 가야 하냐는 수현의 극히도 상식적인 질문에 현규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누가 봐도 수현이 출장을 가는 건 이상하다.

시스템개발팀의 최고 장점이 인터넷만 연결돼 있으면 한 자리에서 모든 걸 처리할 수 있다는 건데, 한국보다 인터넷이 느린 미국에 데려갈 이유가 없다.

“그런데 갑자기 웬 출장이요?”

그러고 보니 수현에게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는 걸 현규는 그제야 깨달았다.

만나자마자 여권은 있냐고 묻고, 있다고 하길래 그럼 내일 오후에 미국에 갈 수 있냐고만 물었다.

내일 자신이 출장을 가야 한다는 건, 아직 말하지 않은 채였다.

“내일 오후에, 출장을 가야 해서.”

“……형이요?”

“응.”

“아…….”

순간 수현은 뭔가 알겠다는 듯 짤막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거, 혹시 샌프란시스코?”

“어떻게 알았어?”

“윤 팀장님이 대표님 일정 보내 주셨거든요. 그렇지 않아도 아까 입원하셨다길래 혹시나 했어요.”

“아버지 일정 갖고 있어?”

“네, 여기.”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수현이 화면을 현규에게 보여 주자 현규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화면에 보이는 엑셀 파일에는 아버지의 일주일간 일정이 시간 별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물론 출장 기간의 일정은 통으로 ‘샌프란시스코 출장’이라고만 쓰여 있었지만, 그 외는 꽤 자세하게 정리돼 있었다.

그 덕에 다음 상황은 대비할 수 있을 듯했다.

“윤 팀장님은 이걸 어떻게 얻으셨는데?”

“비서팀 팀장님하고 친하세요.”

“아…….”

그 무표정한 철가면이 그래도 친한 사람은 있었구나, 라고 현규는 신기해했다.

그가 평사원일 때부터 종종 봐 왔는데,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말투도 표정도 늘 디폴트값으로 고정된 안드로이드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가끔 그가 인공지능이 아닌가 의심했는데 사람은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친한 사람도 있고.

“이거 나한테 공유해 줄 수 있어?”

“네. 앞으로도 윤 팀장님이 계속 보내 주신다고 했으니까 형한테도 전달해 드릴까요?”

“……윤 팀장님이 아주 적극적이시네.”

“오늘 석 달 치 월급을 벌었다고 크게 기뻐하셨거든요.”

주식이 이렇게 사람에게 해롭다는 걸, 수현은 윤 팀장을 통해 오늘 처음으로 깨달은 차였다.

예전에 주식과 도박, 불록 체인을 동시에 하던 대학 선배가 있었는데 그 선배가 그 세 가지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 적이 있다.

말이나 패 대신 주식과 코인이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하는 걸 보고 있으면 도파민 중독을 일으킨다고.

당시에는 그게 잘 이해가 안 갔는데 윤 팀장님을 보며 이번에 실감했다.

오늘 윤 팀장님의 상태는 상당히 하이(High) 했다. 그건 도박 중독이나 마약 중독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한번 결심했다. 주식에는 절대 손대지 말아야지, 하고. 물론, 블록체인도.

“이 정도 능력이라면 확실히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게 낫겠네. 윤 팀장님 우리 회사에 딱히 라인은 없지?”

“저흰 애초에 헤드헌팅으로 들어와서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대신 팀장님은 두루두루 대충 잘 지내시는 편이긴 하고요.”

“그래…….”

역시나 깍두기라는 느낌이었다, 윤 팀장은. 한쪽에 붙지 않고 적당히 여기저기와 다 잘 지내며 필요할 때 거래해 그쪽에 붙는, 일종의 스윙 스테이트(Swing State) 혹은 박쥐.

윤 팀장에 대한 파악이 완전히 끝나니 오히려 그가 편해졌다. 베타에 극히 개인주의적인 엔지니어라면 아주 다루기 쉽다. 특히나 수현이 잘 따르기까지 한다면 더욱.

“형, 사무실 좋아요.”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사무실을 구경하던 수현이 건넨 말에 현규는 무심히 주변을 돌아봤다.

“……그래?”

기능적으로 잘 꾸며진 공간이기는 하지만 딱히 좋다, 라는 인식은 없었는데 그렇게 들으니 좋아 보이는 것도 같았다.

“윤 팀장님이 보시면 배 아파 죽을 것 같아요.”

다른 팀들의 사무실이 단지 세련됐다는 느낌이라면 전략기획팀 사무실은 팀 전체 공용 공간부터 안쪽에 있는 현규의 개인 집무실까지, 전부 인테리어 전문가의 손을 거친 느낌이었다.

전략기획팀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직위를 한 단계씩 올려서 대해 준다고는 들었는데 확실히 좀 특별한 느낌이었다.

그냥 대충 봐도 쓰인 가구들의 가격대가 다르다.

“시스템개발팀 사무실도 좋던데?”

“생긴 지 얼마 안 된 팀이라 1년 전에 전부 새로 꾸몄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그렇게 듣긴 했다. 그 전까지는 시스템 개발이나 유지, 관리는 따로 외주를 줬는데, 모든 자료가 데이터화되고 전자 결제가 일반화되면서 아예 사내에 팀을 만들었다고.

그러면서 수현과 윤 팀장을 스카우트했다고 했다고도, 했다.

“그만 나가자.”

이미 10시를 훌쩍 넘겨 1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중간에 다른 오류가 하나 나와 그것까지 처리하느라 조금 시간이 지연된 차였다.

내일부터 사무실을 비워야 하기에 짐들을 정리해 들고는 재킷을 걸친 현규가 먼저 자리를 나서자, 수현이 바로 현규의 옆으로 따라 선다.

대부분이 퇴근해 고요한 사무실 안에서 둘이 나란히 걸어가며 현규가 먼저 말을 건넸다.

“일은 잘 마무리됐어?”

“네. 너무 자잘한 실수를 많이 하는 녀석이라 내일 한바탕하기로 하고 일단 정리는 했어요.”

“……왜?”

“분명히 그 부분 조심하라고 몇 번 주의를 줬는데 같은 실수를 해서요. 남의 말을 안 듣더라고요.”

일 자체는 잘하는 편이지만 혼자 작업할 때라면 몰라도 팀으로 일할 때는 다른 팀원들과 보조를 맞춰야 하는데, 본인의 고집이 세다. 오늘 오류가 난 것도 그 직원이 알면서도 코드를 몇 개 잘못 기입해서다.

정확히 말하자면 실수가 아니었다. 지시 사항을 일부러 무시한 거다.

“남의 말을 안 듣다니…… 누굴 보는 것 같네.”

“전 일할 때는 잘 들어요.”

“진심으로?”

막 사무실의 조명을 끄며 현규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자 수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진심으로요. 전 일 두 번 하는 거 싫어해서 일할 때는 말 잘 들어요.”

완벽주의자는 아니라도 같은 일 두 번 하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게 없다는 게 수현의 지론이었다.

기본적으로 귀찮고 번거로운 걸 싫어하는 마이 페이스 유형에 뭐든 가성비와 효율을 중요시하는 성격이라 그렇긴 할 거라고, 현규도 그 점은 동의했다.

“확실히, 너랑 잘 맞는 직업이긴 하네.”

천천히 전략기획팀의 사무실을 가로질러 나오던 중 현규는 수현의 적성을 드디어 인정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수현은 개발직이 최적이다. 과 선택은 기가 막히게 했다.

“삼촌이 오메가니까 재택이 가능하고 타인과 접촉이 적은 전문직을 택하라고 해서 골라 준 건데…… 생각보다 더 잘 맞아요.”

“……해준 형이?”

“네. 삼촌이 대학이랑 과까지 다 골라 줬어요. 물론 제가 입학하고 두 달 만에 후회하긴 했지만요.”

“왜?”

“제가 트레이닝복 입고 다니는 걸 보고요.”

학교에 가니 학생 대부분이 트레이닝복에 슬리퍼 차림이었고, 그나마 꾸민다는 사람도 어쩐지 핏이 어정쩡한 청바지에 체크 남방을 교복처럼 입고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도 학풍을 따르기 시작했다며 수현은 본인이 패션테러리스트가 된 경위를 소상히 설명했다.

그렇게 설명을 들으니 옷 좋아하는 해준이 질색할 만하다고, 이번만은 현규도 그를 동정할 수밖에 없었다.

해도 너무했다, 수현은.

후드를 썼을 때 그나마 귀여워서 참는 거지, 오피스텔의 드레스룸을 통째로 불 질러 버리고 싶다는 게 현규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수현은 브랜드와 남성복 여성복을 가리지 않고 입으면서 헤어 스타일까지 완벽하게 세팅하고 다녔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수현의 코디가 딱 부잣집 막내아들 룩이었는데, 그렇다고 너무 포멀하지만은 않은 루즈하고 프리한 느낌이라 자연스럽고 예뻤다.

원래 몸이 예뻐 뭐든 잘 소화하는 편인데다, 당시에는 머리카락도 살짝 길어 연한 갈색으로 염색하고 다닌 탓에 그 스타일이 너무 잘 어울렸다.

그런데 그 모든 게 해준 형의 스타일링이었다니 당황스럽긴 했다.

그럼 이제 내가 관리해 줘야 하나, 고민하며 막 사무실을 나가 엘리베이터에 선 현규는 수현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양복에 머리만 넘겨도 예쁘니까, 그건 안 된다. 회사는 지금 상태로 다녀도 충분했다.

다만 자신과 있을 때는 좀 화사하게 입었으면 할 뿐이다.

진짜 바퀴벌레 룩은, 좀 많이 아니다.

환한 색감의 상의와 편안한 청바지, 혹은 면바지, 그 정도만 돼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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