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160)

브랜드로는 마르니나 샤넬도 어울리겠지만 제냐와 필립 림도 포기 못 한다. 그리고 버버리 프로섬과 폴 스미스의 라이트함도 잘 맞고, 발렌티노와 보네타 베나타의 절제된 라인도 잘 어울릴 거다.

너무 입히고 싶은 옷들이 많아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수현을 입히고 벗기기를 반복하다, 문득 차라리 자신의 옷을 입히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다다랐다.

이런저런 옷들을 입히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셔츠만 입혀 놓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무슨 색이 좋을까?

이왕이면 베이직한 흰색 셔츠에 아래는 아무것도 안 입는 게 좋을 것 같다.

역시 어깨와 이어진 쇄골과 골반 쪽으로 흐르는 허리 라인이 예쁘니까 선이 드러나는 부드러운 옷감으로…….

현규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수현을 샅샅이 훑듯 관찰하던 사이 휴대폰을 확인하던 수현이 움찔하는 게 현규의 시야에 잡혔다.

그러곤 잠시 후 수현은 슬금슬금 게걸음으로 현규에게서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공포영화에서 뒤에서 나타난 귀신을 피해 눈치 보며 도망치는 듯한 그 움직임에 현규는 오랜만에 싱긋 웃어 보였다.

“뭘 하는 거지?”

“…….”

감히 네가 내 옆에서 도망치는 거냐는 그 질문에 수현이 현규를 곁눈질하며 작게 중얼거린다.

“형 지금 이상한 생각 하고 있잖아요…….”

위협을 느낀 듯 현규와 최대한 떨어진 거리에서 힐끔거리는 그 시선에 현규는 대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눈치 빨라졌네?”

그간 내가 아무리 잡아먹을 듯 쳐다봐도 해맑게 웃던 녀석이 확실히 이젠 예리해졌다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역시 눈치도 학습되는 거였다. 수현이 저렇게 눈치가 없는 건 극단적인 마이 페이스라 그런 것도 있지만 그간 눈치를 볼 환경이 아니어서였을 가능성이 컸다.

한성의 막내아들에 오메가라는 체질 특성상 바람 불면 날아갈세라 비 오면 젖을세라, 온 집안사람들이 애지중지 금지옥엽 옥수경지로 귀하고 곱게 키워 애가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으니 눈치가 없었던 거다.

역시 눈치는 눈칫밥을 먹으면 느는 게 맞다.

그렇다는 건 자신이 눈칫밥을 먹인 건가 잠시 고민하던 중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이미 대부분의 직원이 퇴근해 텅 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며 현규가 한마디를 던졌다.

“타.”

일단 타고 얘기하자고 한 순간 수현이 슬쩍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게 보였다.

그 움직임에 현규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 뭐 하는 거냐는 질문을 그대로 담은 얼굴에 수현이 또다시 쭈굴거리며 옆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한다.

“전 옆 엘리베이터 탈래요.”

“……어째서?”

“아버지가 아버지랑 형들하고 삼촌 빼고 다른 알파는 믿지 말라고 해서요.”

지금 네가 그 엘리베이터에서 나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난 옆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겠다는 의미였다.

수현이 많이 똑똑해졌다.

그건 좋은 징조였다.

“회사 안에서는 아무 짓도 안 한다고 했을 텐데?”

내가 무슨 발정 난 망아지도 아니고 5분이면 집에 돌아가는데 뭐하러 CCTV가 잔뜩 설치된 직장, 그것도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무슨 짓을 하겠냐며 현규는 어서 타라고 손짓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 샤워하고 맥주 한잔하고 싶은 기분이라 한 번 더 손가락을 까닥이자 눈치를 보던 수현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그러곤 일부러 현규와 가장 먼 대각선 쪽의 코너에 달라붙는다.

그 모습에 현규는 모처럼 환하게 웃어 보였다.

진짜 아무것도 안 할 생각이었는데 이 정도로 경계하니 조금 건드려 보고 싶어졌다.

그럴 마음이 없었어도 저렇게 의심하면 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이다.

그런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했는지 수현은 더욱 몸을 움츠리며 현규를 이상한 듯 바라보기 시작했다.

겁먹고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작은 동물 같은 그 눈빛에 현규는 입술을 달싹였다.

저렇게 쳐다보면 가학심이 인다.

어떻게든 해 버리고 싶다.

고등학교 때도 그랬었다. 그때는 자신만 보면 피해 다니는 녀석이 괘씸해 짜증이 나는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수현이 저렇게 쳐다보거나 피해 가면 속이 부글부글 끓으면서도 아랫배에서 시커먼 뭔가가 뭉치는 기분이 들던 이유는 자꾸 만지고 싶어서였다.

그래, 그랬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신기하게 상처는 받는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냐고 화가 나기도 했다.

그래서 더 집요하게 따라다니고 만날 때마다 잔소리하고 일부러 더 냉랭하게 대했던 것 같다.

그럼 또 수현은 도망치고, 이쪽은 더 거칠게 대하게 되고…….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지리멸렬한 루틴이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안 잡아먹어.”

그러니 옆으로 오라고 했지만 수현의 경계심은 여전했다.

“……잡아먹을 거잖아요.”

“여기선 안 잡아먹어.”

“욕실에서도 바쁘다고 안 만진다고 했는데 만졌잖아요.”

그게 뭐, 라고 하려다 현규는 말을 바꿨다. 솔직히 수현이 너무 믿는 것도 곤란하지만 이 정도로 불신하는 것도 기분 좋지는 않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상처는 받으니까.

“거긴 집이고. 난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사람이야.”

“……진짜요?”

자꾸 물어볼래, 라는 듯 인상을 쓴 채 가까이 오라고 고갯짓하자 그제야 조금 긴장을 푼 수현이 옆으로 다가선다.

쭈글거린다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 못 했는데 지금 수현을 보니 알 것 같다.

눈치를 보면서도 조심조심 가까이 오는 모습이 짜증 날 정도로 귀여워 눈을 내리깐 채 쳐다보고 있자 녀석이 여전히 자신을 힐끔거린다.

괴롭히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건들고 싶어지는 그 눈빛을 보며 잠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얘를 대체 어째야 하나, 하고.

그리고 동시에 내가 얘를 두고 나흘이나 출장을 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솔직히 수현이 못 간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오히려 빡빡한 일정에 수현을 거기까지 데려가는 것도 걱정이었던 터라 금세 단념했는데 지금은 그게 쉽지 않을 것 같다.

그간 못 보고도 잘 살았는데, 이제 떨어져 지내면 못 견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업이야 팀원들이 알아서 할 테니 그냥 몰래 전용기에 싣고 가 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손등에 뭔가가 스쳤다.

간지러울 정도로 가벼운 그 감촉에 시선을 내리자 수현이 조심스레 손을 잡아 온다.

“……집에서는 괜찮아요.”

순간 뭐가, 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그게 무슨 뜻인지 깨달은 현규는 혹시나 하며 되물었다.

“……집에서는?”

“네. 그러니까 밖에서는 하지 마세요.”

해금의 선언과도 같은 그 말에 현규는 풀어지려는 얼굴을 간신히 유지했다. 대신 수현의 손을 힘주어 쥐었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억세게.

* * *

이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강현규 걱정이다, 라는 말이 유행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1학년 때였을 거다. 당시 고3이었던 현규 형이 중간고사 직전 오른팔을 다친 일이 있었다.

큰 부상은 아니고 인대가 늘어나 반깁스를 댔고, 그 상태로 시험을 봐야 한다는 이야기에 온 학교가 들썩거렸다.

형 시험 못 보면 어떻게 하냐고.

특히나 현규 형을 좋아했던 당시 짝꿍 녀석이 울며 자기 팔을 떼 주고 싶다길래, 네 팔은 짧아서 안 될 거라고 했더니 내 발을 꾸욱 짓이기고는 한동안 말도 안 걸어서 생생히 기억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전혀 걱정할 필요 없었다.

그때 밝혀진 사실이지만, 현규 형은 양손잡이였다.

수저를 들거나 글을 쓸 때는 오른손을 주로 쓰긴 하지만 어릴 적에는 왼손을 주로 사용한 탓에 왼손을 더 잘 쓴다고 했다.

그래서 현규 형은 중간고사를 왼손으로 봤고 그때도 자랑스럽게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학교를 떠돌던 말이 그거였다.

강현규 걱정은 하는 게 아니다, 강현규를 걱정할 거면 네 미래나 걱정해라, 노비 새끼들이 감히 왕자님을 걱정하냐, 기타 등등.

그때 그 말을 수현은 11년이 지난 지금 새삼 깨우치고 있었다.

내가 왜 이 사람을 걱정했을까……라고.

“형, 진짜 더는 못 해요. 힘들어요…….”

침대 위에 축 널브러진 채 죽어 가는 자신의 뒤에서 연신 어깨와 목덜미에 입을 맞추는 현규에게, 수현은 간절하게 항복을 선언했다.

아니, 애초에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집에서 해도 된다는 건 키스 정도를 말하는 거지, 귀가하자마자 또 뒤엉킨 채 침대로 와 두 번이나 사정하는 걸 의미한 게 아니었다.

삽입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점심시간에도 한 번 하고 난 터라 저녁까지 하는 건 힘들었다.

특히 퇴근 후에는.

“이젠 안 해. 잠깐만 이대로 있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연신 아랫배와 허리를 쓰다듬으며 귓불과 목덜미를 빨고 핥아 대는 현규 탓에 수현은 여전히 난감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쩐지 형이 심란해하는 것 같아, 자신이 너무 경계해서 상처받았나 걱정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괜히 해도 된다고 했다.

또 낚인 거다.

이래서 반한 사람이 진다고 하는 건가, 하고 수현은 옛 선조들의 말씀을 떠올렸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이젠 다 잊었다고 생각했을 때도 입장상 질질 끌려다녔지만 아직도 형을 좋아한다는 걸 자각하고 난 후로는 형이 원하는 건 다 들어주고 싶어져 버렸다.

그러니까 그 이전이 강제였다면 지금은 자발적이라는 차이가 있는데, 어느 쪽이든 휘둘리는 건 마찬가지다.

어쩐지 귓가에서 ‘수현아…….’라는 답답하고 어이없고 속 터진다는 삼촌의 탄식이 들려오는 것 같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오래가지는 않을 신혼 생활이니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는 게 합리적이니까.

그러고 보니 아직 혼후 계약서 작성을 안 했다. 고문 변호사님께 검수도 받지 못했다.

하도 정신없어서.

그래, 할 일이 아직도 쌓여 있다. 회사 일도 산더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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