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160)

그러니, 슬슬 자야 한다.

곧 자정이다.

샤워도 하고 이불도 갈아야 할 것 같아 몸을 일으키려는데 형이 어깨를 잡아 누른다.

“샤워하고 싶어요.”

“아침에 해도 돼.”

“시간 없어요. 그리고 찝찝해요.”

몸 여기저기에 정액과 체액이 잔뜩 남아 일단 닦아 내고 싶다고 했지만 이번에도 형은 전혀 이야기를 들어 주지 않았다.

“앞으로 나흘간 떨어져 있어야 해서 일부러 남긴 거니 내일 샤워해.”

“뭘 남겨요?”

“필요한 거.”

말과 동시에 계속해서 뒤에서 목덜미를 빨던 형이 손을 뻗어 아직 열기가 남은 몸의 옆구리를 매만진다.

아찔한 그 감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되물었다.

“……페로몬 샤워요?”

소문으로만 듣던 그거냐고, 혹시나 하며 묻자 형이 이번엔 유두를 지분거리며 웃는다.

“그런 것도 알아?”

“이론은 알죠. 형, 저 거기 아파요.”

형이 하도 만져 대서 부은 것 같다고 수현은 현규의 손을 밀어 내려 했지만 역시나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그리고 듣지도 않고 있었다.

“안다면 됐어. 매너도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많은 모양이니 마킹을 해 놔야지.”

“매너요?”

“다른 알파가 먼저 마킹해 놓은 오메가에게 절대 자기 냄새를 묻히지 않는 건 암묵적인 약속이니까.”

그런데도 박 대리 새끼가 본의든 아니든 냄새를 묻혀 놨다며 현규는 수현의 목덜미를 세게 깨물었다.

의도적으로 자국을 내려는 듯 살짝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깨무는 그 느낌에 수현은 살짝 인상을 썼다.

“형, 아파요.”

“여긴 가리고 다니지 마. 페로몬은 이틀 정도밖에 안 가니 일부러 남긴 거야. 눈치 없는 녀석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내놓고 다녀.”

굳이 후드 티로도 감춰지지 않는 목덜미에 자국을 새긴 뒤 바로 뒤에서 수현을 세게 당겨 안은 현규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좋은 냄새 나네.”

그 말에 수현이 작게 웃는다.

“형 냄새잖아요.”

“그래, 내 냄새. 자, 이제.”

말과 함께 진짜 자려는 듯 리모컨을 든 현규가 침실 조명을 끄니 수현이 조금 불편한 듯 뒤척거린다.

“진짜 샤워 안 하고요?”

“괜찮아. 내일 해.”

“형, 샤워 안 하면 잠 못 잔다면서요?”

“괜찮아. 일어나기 싫어. 네 냄새 좋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몸을 세게 감싸는 힘에 수현은 어쩔 수 없이 현규의 품에 안긴 채 눈을 감았다.

현규의 품은 따뜻하고 편안했고 지금은 너무 피곤했다. 오늘은 너무 정신없었고 또 바쁜 하루였다.

그래서 그냥 잠들기로 한 순간 수마가 몰려왔다.

그리고 곧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더없이 편안하게.

* * *

수현이 완전히 잠에 빠져든 걸 확인한 현규는 조심스레 수현의 위로 이불을 덮어준 뒤, 침대에서 내려섰다. 그러곤 나이트 가운을 걸쳐 입은 채 휴대폰만 들고 방을 빠져나왔다.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각이라 거실은 어두웠다. 오피스 거리라 모두가 퇴근한 후의 건물들에는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고요했다.

간간이 차의 소음만이 울려오는, 이상할 정도로 고요한 거실의 불을 밝힌 현규는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리고 곧장 창가 쪽으로 향하며 휴대폰 안에서 해준의 번호를 찾았다.

어쩐지 갈증이 나 생수병을 비우며 통화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데, 한참 만에야 겨우 통화가 연결되었다.

- 이 밤중에 왜?

새벽에 왜 전화질이냐는, 이 시간에 잤을 리가 없는 사람의 투정에 현규는 이런저런 변명이나 양해 없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일부터 주영이 수현이네 와서 지내게 해 주세요.”

- ……주영이?

“네.”

형 말고요, 라는 말은 감정 상할까 굳이 하지 않았지만 알아들었을 거라고 현규는 자의적으로 판단했다.

이 세상에는 매너도 눈치도 없는 인간들이 많지만 이 사람은 눈치와 염치는 있는 사람이니까.

- 일단, 이 새벽에 전화할 정도의 일이라면, 그럴 만한 이유부터 설명해야 하지 않을까?

순간 내가 왜 그런 설명까지 해야 하지, 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현규는 현명하게 그 말을 참아 냈다.

지금은 그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니 저쪽에 맞춰 줘야 한다.

태어나서 평생 남에게 부탁 같은 걸 해 본 적이 없어서 자꾸 본성이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어떻게든 성질을 꾹꾹 눌렀다.

“내일부터 나흘간 급하게 해외 출장이 잡혀서요. 그동안 수현이 옆에 있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 갑자기 출장 잡힌 건 강 대표님 입원 때문인 것 같으니 이해가 가는데…… 수현이 옆에 누가 있어야 한다는 건 왜?

역시나 벌써 들은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너 때문에 내가 입원까지 했다고 이 대표님께 전화해서 또 한바탕 했으리라는 건 충분히 유추 가능했기에 놀랍지도 않지만 그래도 참 너무 예상대로다. 그리고 세상 쓸데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 입원해서 전화해 봐야 아버지만 손해일 텐데 굳이 왜?

거기까지 생각하던 현규는 이 대표님 쪽에서 먼저 연락했을 가능성을 떠올리곤 아차 했다.

그래, 아버지 입원 소식을 듣고 이 대표님이 신이 나 전화하셨을 수도 있다. 물론 입원 소식은 주가를 생각해 극비에 부쳤겠지만 이야기는 결국 어디서든 새어 나가기 마련이다.

일단 아버지한테 적이 너무 많다.

어머니라든가, 모친이라든가, 윤 이사님이라든가…….

새삼 떠올리니 골치 아프다.

그래서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쪽 일은 그분들이 알아서 하실 일이고 지금 자신은 수현에게 집중해야 한다.

“제가 출장 간 사이 아버지가 무슨 짓을 하실지 몰라서요. 혼자 있는 게 걱정되기도 하니까 잠깐 같이 지냈으면 하는데요.”

- 해 봐야 이혼하라고 압박밖에 더 하시겠어?

“……그것도 들으셨나요?”

- 정현 형이 전화해서 심보를 그따위로 쓰니 혈압이 오른 거니 뭐니 하면서 이 김에 혈관이나 다 터지라고 해서 알았어.

덕분에 귀에서 피 나는 줄 알았다고, 해준은 탄식했다. 동시에 수현이 왜 형들이나 아버지 전화 받을 때 휴대폰을 저 멀리 떨어트려 놓는지도 절실히 이해해 버렸다.

이 집안 남자들은 말이 너무 많다. 그리고 목청도 좋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간 해준에게는 다들 조심해서 실감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수현과 현규의 문제로 눈이 뒤집히자 이젠 해준이고 뭐고도 없다.

일만 생기면 전화해 하도 소리를 질러 대 아예 휴대폰 볼륨을 최소로 낮춰 놨다. 그냥 들리기만 하는 정도로.

“그 부분은 이 대표님도 저랑 생각이 같으시네요.”

- 그렇지 않아도 형이 너 갑자기 너무 마음에 든다고 하더라. 강 대표님 입원시켰다고. 데릴사위까지 생각하시던데?

“고려해 보겠다고 전해 주세요.”

- 고려하지 마. 괜히 집안싸움 더 일으킬 생각 말고.

하나뿐인 후계자가 사라지면 집안이 난리가 나긴 할 거라 현규도 데릴사위 이야기는 포기하기로 했다. 그쪽 집안에 자식이 수현뿐인 것도 아니고 지수는 많이 떨어지지만 진원 형은 나쁘지 않다.

- 하여간, 아무리 그 어른들이 막 나가도 애한테 해코지는 안 해. 미친 듯이 싸워도 서로 가족은 건드리지 않는 상식과 윤리는 있는 분들이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진짜 그렇게 생각하세요?”

당신은 진심으로 그 어른들에게 지각과 양심이라는 게 있을 것 같냐는 물음에 해준 형은 침묵했다.

물론, 진짜 협박이나 납치 같은 범죄는 저지르지 않겠지만 그래도 조금 애를 건드리긴 할 거다.

그 말도 안 되는 괴문자가 증거다.

“아니라고는 못 하시죠?”

- ……그래서, 주영이한테 옆에 있어 달라고? 강 대표님이 무슨 짓 하나 확인하게?

“네, 그리고 좀 마음에 걸리는 문제도 있고요.”

- 뭔데?

“너무 귀여워서 자꾸 이상한 놈들이 꼬일 것 같아 퇴치제 좀 뿌려 놓으려고요.”

원래도 귀여웠지만 점점 더 귀엽고 예뻐지고 있어서 솔직히 걱정이라며 현규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해준은 가차 없이 그 의견을 묵살했다.

- 그건 아니라고 봐.

“그렇게 귀여운데요?”

- 절대 아냐. 그러니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어떻게 그렇게 장담하시는데요?”

- 내가 수현이를 사랑과 정성으로 키운 건 맞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객관적으로 평하자면 수현이는 연애 상대로는 그다지 좋은 타입은 아냐. 친구나 가족으로서라면 몰라도.

눈에 띄는 화려한 미모는 아니지만 단정하고 깔끔한 인상에, 일단 집안이 너무 좋으니 가끔 의도를 갖고 접근하는 녀석들이 있긴 했다. 아무리 발정기가 안 지난 오메가라도 수현의 스펙은 무시 못 하니까.

하지만 불행히도 그것도 딱 10분뿐이다.

정확히 10분만 대화하면 대부분 속이 터져서 패스를 외친다. 한동안 수현이 상류층 모임에 끌려다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때 별명이 텐 미닛이었다.

그게 수현의 현실이었다.

은근히 고집도 있는 데다 성질도 있고 눈치를 안 보기에 가끔 말도 세게 한다. 본인은 솔직하게 생각을 그대로 내뱉는 거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팩트 폭력이다.

괜히 수현이 지금까지 연애를 못 한 게 아니다.

그러니 네가 걱정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해준은 확신했지만 현규의 의견은 달랐다.

“그건 형 관점이고요.”

- 내 관점이 네 관점보다는 객관적일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 어쨌든 부탁하고 싶다면 주영이에게 직접 얘기해. 날 거칠 필요 없이.

“제가 주영이랑 연락하는 거 불편하실 텐데요?”

갑작스러운 그 말에 해준은 약간의 간극을 두고 다시 물었다.

- 내가 왜?

“아주 잠깐이지만 약혼할 뻔한 관계였으니까요.”

그제야 해준은 뭔지 알겠다는 듯 작게 한숨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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