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고 보니 너 수현이한테 나랑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고 했지?
“어쨌든 전 약혼자니까요.”
-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전혀 없지만…… 뭐, 이해는 해 줄게. 넌 속이 좁은 것 같으니까.
살짝 긁는 그 말투를 현규는 미소로 넘겼다.
“네, 전 속도 좁고 이해심도 없고 고지식하고 보수적입니다. 과거야 상관없지만 과거의 사람을 지금도 만나는 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 앞으로 현명하게 행동해 주실 거라고 믿겠습니다.”
- 그건 너한테도 적용된다는 거 알지?
“물론이죠. 제가 헤어지면 착신 거부 거는 걸로 악명 높은 거 아시잖아요.”
- 백해경도?
갑자기 나온 그 이름에 현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놈의 백해경, 오래도 간다. 지긋지긋하다.
“……물론, 그 녀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착신 거부 중이고요. 그리고 중요한 사실을 하나 말하자면 그 녀석과는 사귄 적 없습니다. 단 한 번도.”
- 그때 분명 너희 둘 사귄다고 들었는데?
우리 학교까지 소문이 날 정도로, 라는 말에 현규는 솟구치는 짜증을 참으려 이를 꾹 악물었다.
“헛소문이에요.”
- 둘이 자주 같이 있었잖아?
“같이 있기는 했죠. 같은 학년에 같은 과였으니까요.”
한국인이 드문 대학이라 자연히 한국인끼리는 칠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거기다 그 녀석과는 이상하게 성격이나 취향도 잘 맞아 급격하게 친해졌다.
물론, 거기엔 다 이유가 있었고 그게 잘못된 만남이라는 건 얼마 안 가 알게 됐지만, 그래도 피할 수가 없었다.
같은 동네에 살고 같은 대학원에서 같은 수업을 듣는데 어떻게 피할까?
부모 죽인 원수라도 못 피한다.
- 진짜, 안 사귀었다고?
“전혀요. 우린 절대 사귈 수가 없는 관계예요.”
- 어째서?
“……그럴 사정이 있습니다.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고…… 나중에 상황이 되면 그때 얘기하죠.”
설명하기 모호한 상황에 현규는 짜증스러워하는 얼굴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백해경과는 여러 사정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자꾸 엮이는 것뿐인데 더럽게 걸렸다.
하지만 그런 현규와 달리 해준은 여전히 미심쩍다는 듯 의뭉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녀석은 왜요?”
지난번에도 아는 게 있다느니 하는 의미심장한 말을 해 사람을 떠보더니 왜 자꾸 그 녀석을 언급하는지, 현규는 해준의 진의가 뭔가 싶어 의심을 품었다.
해준 형은 학교가 달라 그 녀석과는 별로 만날 일이 없었을 텐데 백해경을 기억하는 것도 신기하고 또 자꾸 거론하는 건 더더욱 이상했다.
이 사람이 설마 뭘 아는 건가 하는 의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잠시 말을 끌던 해준이 화제를 돌린다.
- 아냐, 아무것도. 그냥 너랑 해경이랑 사귀었다는 얘기가 생각나서. 하여간, 주영이랑 네가 연락해도 나는 솔직히 상관없는데…… 주영이가 널 무서워하는 건 맞으니까 말한 건 내가 전할게.
현규가 생각한 이유와는 다르지만 어쨌든 ‘불편함’에는 해준도 동의했기에 순순히 그에 응했다.
- 하지만 장담은 못 해. 주영이도 자기 생활이 있으니까.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할 일이 많을 텐데요?”
감히 내 요구를 안 들어줄 거냐, 라는 약간의 위협과 강요를 뒤섞은 현규의 거만한 어법에 해준은 혀를 찼다.
- 그렇게 고압적으로 위협하지 말고 솔직하게 부탁을 해. 그래도 다 들어줄 거야.
“해 본 적이 없어서, 부탁하는 법을 모르는데요.”
전 부탁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서요, 라는 이야기였다, 결국.
실제로 그래 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현규가 누군가에게 부탁할 일은 없을 예정이었다.
그건 해준도 잘 알고 있었다. 저 정도의 스펙이라면 타인의 눈치를 보거나 비굴하게 굴 일도, 고개를 숙일 일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지금까지의 경우다.
- 이제부터는 알아야 할 거야. 수현이 데리고 사는 게 쉽지는 않을 테니.
오늘도 당장 감시할 사람 필요해서 연락한 거 아니냐고 해준은 아픈 곳을 찔렀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현규도 할 말이 없었다. 다른 건 전부 돈으로 해결이 가능하지만 수현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녀석도 돈은 많으니까…….
“……노력해 보죠.”
- 아주 많이 노력해야 할 거야.
그 말의 뒤에는, 네 성격에 가능할지는 모르겠다만, 이라는 말은 생략된 채였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해준도 회의적이었다. 현규가 노력하는 것에 가치를 둘 뿐.
- 그럼 그건 됐고…… 수현이 옆에 있어 달라는 건, 그 집에서 같이 지내 달라는 거지?
“네. 수현이도 지금 바빠서 이쪽에서 출퇴근해야 할 겁니다.”
- 집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너, 집 있다며?
갑자기 나온 그 화제에 현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얘기는 또 언제 샌 거냐.
- 수현이는 네가 집이 없어서 오피스텔에 들어온 줄 알던데?
“……있는 건 맞지만 회사에서 멀어서요.”
- 차로 10분 거리던데?
젠장.
“……다른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 그거 네 사촌이라며?
설마 네 사촌이 집이 없어 못 나가고 있는 거냐는 빈정거리는 듯한 질문에 현규는 더는 얼버무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사실 대학 시절부터 살던 아파트가 있긴 했다. 다만 유학 기간이 길어져 사촌에게 빌려줬다 최근 귀국하며 들어가기는 했는데……
하지만 상황이 급변했다. 돌아오자마자 수현과 동거를 하게 됐는데 불행히도 그 집에서 살 수는 없었다. 회사와의 거리도 괜찮고 환경도 좋았지만 단 하나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75평형의 복층형 펜트하우스라 너무 크다는 것.
그 정도 규모라면 한집에서 생활해도 거의 얼굴 볼 일이 없다. 그래서 일부러 수현의 오피스텔로 짐 싸 들고 들어왔고 아파트는 이 김에 아예 신혼집으로 인테리어 공사에 들어간 건데, 그새 그걸 들켜 버렸다.
“그 정보는 어디서 나온 거죠?”
- 주영이가 그러던데? 너 대학 때부터 거기서 살았다고.
또 서주영이다.
자기를 언제부터 알았다고, 주영은 자신에 대한 쓸데없는 정보를 많이 갖고 있었다.
역시, 따로 한번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앞으로 여러모로 협력해야 할 관계라 내버려 뒀더니 너무 나댄다.
그렇게 날 무서워한다는 녀석이 입이 너무과하게 가볍다. 지금 순간 그 녀석은 이지수 다음으로 경계해야 할 입 목록에 올라갔다.
- 주영이 탓하지 마. 주영이 친구가 너 좋아한다고 쫓아다니면서 이것저것 억지로 알려 준 모양이니까. 이 김에 말하자면 그 친구, 수현이랑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대.
그러니까 괜히 건드리면 수현이한테 곧장 얘기가 들어갈 수도 있다는 협박이었다.
듣던 중 짜증 나는 말에 현규는 입 안으로 작게 “빌어먹을.”이라고 중얼거렸다.
역시 그 학교 터가 이상하다.
- 그러게 착하게 살지 그랬어.
“저 정도면 깨끗하게 살았다고 자부하는데요?”
- 그래, 너 정도면 상류층 알파 중에서는 아주 깨끗하긴 하지만…… 그래도, 수현이 기준에는 많이 못 미칠 거야.
걔네 가족이 어떤지 대충은 알지, 라는 말투였다.
알파와 오메가 사회에서뿐 아니라 상류층을 통틀어 봐도 수현의 집안은 결벽적이란 말이 돌 정도로 깨끗한 편이긴 했다.
집안마다 평균 서넛씩은 있는 혼외자는커녕 부모 양쪽으로 불륜설 한 번 돈 적 없었을 뿐 아니라, 두 사람도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다 대학 졸업 직후 결혼해 그사이 다른 염문 한 번 들리지 않았던 걸로도 유명하다.
물론,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그 두 분의 성격이 하도 지랄 같아 연애를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라는 걸 알지만, 수현이 성적으로 굉장히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란 건 사실이다.
역시나 괴팍한 성격 탓에 알파인 두 형 역시 모두 문란과는 무관한 삶을 살아왔고 삼촌이라던 해준 역시 알파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사생활이 깨끗했으니 수현의 기준선이 높을 수밖에 없다.
이쪽 집안이 수현에게는 동물의 왕국으로 보였던 것도, 그렇게 따지면 당연하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저 그렇게 연애 많이 안 했습니다.”
- 내가 아는 사람만 다섯 명인데?
그렇다는 건 미국에서 얘기다.
하지만 그 기준은 횡포였다.
“데이트 한 번 했다고 연애라고 하면 안 되죠.”
- 그건 미국 기준이고.
“한국에서도 그런 관계를 썸이라고 하죠.”
- 썸만 탔다고, 진짜?
“네. 제가 눈이 좀 높아서요.”
- 갑자기 높아진 건 아니고?
“제 순정을 무시하지 마시죠.”
- 나도 알파지만, 솔직히 세상에서 제일 못 믿을 게 알파들 순정이라서……. 만약 미리 사고 친 상황이 아니었다면 너희 둘 결혼에 제일 결사적으로 반대했을 사람이 나야.
“저 정도면 수현이 상대로 아주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만.”
- 나는 둘째 쳐도 이 집안에서 조건만 보고 수현이 보낼 거 같아? 수현이는, 무조건 수현이를 가장 우선시하면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보살펴 줄 사람한테 보낼 예정이었어. 집안이니 우성이니 상관없이.
“그럼, 어떻게 봐도 저네요.”
- 어떻게 봐도 넌 아니지.
“그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사람은 저밖에 없을 텐데요?”
- 그런 말을 할 거면 먼저 고백이나 하고 해. 너한테 절대 리스크 없는 길로만 갈 생각 하지 말고.
“그런 거 아닙니다.”
- 아니면?
“그 녀석이 절 무서워하니 시간을 두고 설득하려는 거죠.”
- 애 속여서 혼인 신고한 놈이 할 말은 아니네.
그걸로 신뢰까지 깨졌는데 무슨, 이라며 해준은 현규를 굉장히 한심해했다.
아픈 데만 골라서 콕콕 찔러 대는 해준의 말투에 현규는 입을 꾹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