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이 왜 그렇게 말을 뇌에서 그대로 내뱉나 했더니, 아무래도 이 사람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사실 작정하고 기를 꺾으려고 한다면 해준 정도는 가볍게 밟아 줄 수는 있다. 알파처럼 철저하게 힘의 논리로 부딪쳐 상대를 찍어 누르는 종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랬다간 그대로 수현 안의 자신에 대한 평가가 바닥을 칠 게 뻔해 참아야 할 뿐이다.
사실 그게 제일 짜증 나는 부분이었다.
“그 부분은 형도 저한테 감사해야 할 일 같은데요. 제가 안 움직였으면 형하고 수현이가 혼인신고를 해야 했는데…… 그래도 지금 그 말을 할 수 있으셨을까요?”
자신이 무데뽀로 움직여 그나마 수현과 자신의 혼인 신고에서 끝난 거지, 아니었으면 일이 더 복잡해질 뻔했다.
그러니 자신에게 감사하라는 현규의 자신만만한 말에 이번엔 해준이 침묵했다.
그건 사실이니까.
- 그렇다고 애를 그렇게 속여서 끌고 다니면 안 되지.
“전 여러 사람을 위해 번거로운 절차를 줄여 준 것뿐입니다.”
- 그러니까, 그 전에 말을 좀 하라고.
“수현이가 남의 말 안 듣는 건 아시잖아요.”
- 그건 그렇지만…… 네 말은 들을 거야.
“글쎄요…….”
- 내가 장담할 테니 먼저 고백부터 해. 널 위해서 충고하는 건데, 자존심 내세우면서 질질 끌다 나중에 크게 후회할 일 생길 수 있어.
“……그건 두고 보면 알겠죠.”
- 그래, 굳이 겪어 봐야 안다면 어쩔 수 없지. 후회도 경험이니까.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그 말투에 현규가 살짝 인상을 쓴 순간 해준은 서둘러 통화를 마무리했다.
- 늦은 시각이니 이만 자. 주영이한테는 내일 오전에 연락할 거고 그럼 자기 스케줄 보고 알아서 할 거야.
“알겠습니다.”
- 그럼, 출장 잘 다녀오고 나중에 보자.
“네.”
끝까지 늦은 시각에 전화해서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하는 현규의 태도에 해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제야 현규도 빈 생수병을 쓰레기통에 버린 뒤, 거실의 불을 끄고 침실로 들어섰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수현은 여전히 곤히 잠든 채였다. 이불을 다 걷어차고.
역시나란 생각에 현규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 안으로 들어가 이불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다시는 수현이 이불을 걷어차지 못하도록 세게 품에 안은 뒤 잠을 청했다.
내키지는 않지만 밤에 이불을 덮어 줄 사람을 일단 찾아 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아침은 꼭 먹어야 돼.”
“…….”
“그리고, 잘 때 이불은 꼭 덮고 자고.”
“…….”
“귀찮아도 머리는 꼭 말리고 퇴근하면 집으로 곧장 가. 알파들이 말 걸어도 대답하지 말고. 누가 만두 사 준다고 해도 따라가면 안 돼.”
오전 근무를 하던 중 갑작스러운 현규의 호출에 전략기획팀 팀장 사무실로 온 수현은 바로 앞에 앉은 현규의 계속되는 잔소리에 압도된 채였다.
아침 내내 잔소리를 하더니 기어이 떠나기 직전에 불러 또 잔소리다.
진짜 쓸데없다. 시간이 아깝다.
“저기요, 형…….”
“됐고. 혹시 누가 수작을 부리면 파트너가 있다고 확실하게 말해. 그런 멍청한 놈들은 없을 거라고 믿었는데, 이 회사에는 좀 있는 것 같으니까.”
이래서 사원 면접 시 윤리적인 부분도 시험해 봐야 한다며 혀를 차는 현규의 초조해 보이는 태도에 수현은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저기, 형. 제가 이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는데요…….”
“할까 말까 망설여지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다고 해준 형이 안 가르쳐 줬나 보지?”
아직 내가 할 말이 남아 있으니 넌 닥치고 있으라는 말에도 수현은 이 말은 꼭 해야 할 것 같아 용기를 냈다.
“그래도 해야겠어요. 형, 지금 너무 엄마 같아요.”
그것도 애 두고 출근하는 워킹맘 같다고, 수현은 조금 질렸다는 얼굴로 현규를 바라봤다.
이대로 두면 비행기에서도 전화해 잔소리할 것 같은 그의 기세에 수현은 그제야 신혼의 단꿈에 빠져 잠깐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이 사람, 잔소리가 엄청 심하다는 걸.
잘못 걸렸다.
그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수현의 표정에 일장 연설을 하던 현규가 말을 뚝 끊는다.
그러곤 언제나처럼 웃으며 수현을 바라본다.
아주 익숙한 그 표정과 눈빛에 수현은 다음 순간 현규가 무슨 말을 할지 바로 알아챘다.
“……닥칠게요.”
자진 납세 후 시선을 내리자 형이 작게 혀를 찬다.
“애초에 네가 말을 잘 들으면 걱정도 안 하지. 아무한테나 쉽게 낚이니 걱정하는 거 아냐? 넌 너무 잘 휩쓸려.”
“저기, 제가 잘 낚이는 건 맞는데요…… 형이 그런 말 할 입장은 아닌 것 같아요.”
그간 자신의 뒤통수를 가루가 되게 후려쳤을 뿐 아니라, 자신을 가장 잘 낚고 많이 낚아 가장 큰 혜택을 본 건 형이라고 팩트를 내뱉은 수현은 다음 순간 바로 입을 다물었다.
앞에 앉아 있던 현규의 눈빛이 좋지 않은 탓이다.
입술만 비틀어 웃으며 너 지금 뭐라고 했냐고 묻는 그 눈빛에 수현은 얌전히 시선을 내렸다.
얌전한 그 반응에 현규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내가 출장 가면 아버지가 곧장 퇴원하실 거야. 물론, 퇴원 못 하게 손을 써 두기는 했지만 본인이 하려고만 하면 탈출이라도 하실 분이니 혹시 아버지가 출근하셔서 호출해도 절대 가지 마. 그리고 윤 팀장님한테 얘기해 놔서 앞으로 시스템 관련 문의가 들어오면 네가 직접 가서 확인하게 될 거야.”
그러니 가능하면 절대 사무실에 있지 말고 최대한 회사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라는 의미였다.
진짜 바퀴벌레처럼.
“네…….”
자신도 대표님과 마주쳐서 잔소리 듣는 건 싫으니까, 라고 수현은 수긍했다. 어차피 여기저기 안 떠돌아다니면 화장실에 숨어 있어야 하는데 그보다는 일을 하는 게 낫다.
“그래. 그리고, 주영이랑은 연락됐어?”
“어, 네.”
그렇지 않아도 수현 역시 그걸 물어보려던 차였다.
“저 나오기 전에 전화 왔는데, 주영이한테 뭐라고 하셨어요?”
“……뭐가?”
“주영이가 전화해서 형한테 자기가 뭐 잘못한 거 있냐고 해서요.”
애가 겁에 질려서 바들바들 떨면서 물어보더라는 수현의 설명에 현규가 황당하다는 얼굴을 한다.
“……그건 또 무슨 소리지?”
“형이 집에 오라고 했다면서요?”
중간에 뭔가가 빠진 느낌이긴 했지만 주영이 말한 내용은 결국 그거였다.
형이 집에 오라고 했는데 내가 뭐 잘못해서 혼내려는 거냐고. 그래서 형은 오늘부터 출장 간다고 말해 줬다. 그러니까 그냥 놀러 오라고.
삼촌이 말을 전했다는 걸로 봐서는 절대 중간에 말이 빠지거나 잘못 전달된 건 아닐 텐데 주영이 너무 놀라 앞·뒷말을 다 잘라 들은 듯했다.
주영이 현규 형을 무서워한다는 건 알았지만 솔직히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 녀석이 날 왜 그렇게 무서워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냥 나 없는 동안 너랑 지내라고 부른 것뿐이야.”
그 말을 듣고 무서워했다면 그건 주영에게 문제가 있는 거라고 현규는 굉장히 짜증스러워했다.
그리고 그제야 수현은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그렇지 않아도 그럴 거라고 얘기하긴 했어요.”
“그럼, 됐어.”
이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한 번에 알아먹지를 못하냐고 현규가 혀를 차는 모습에 수현은 그간 궁금해했던 바를 드디어 입에 담기로 했다.
“그냥, 이건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궁금해하지 마.”
네가 궁금해하는 건 태반이 쓸데없는 일이니까, 라는 뜻이었다. 수현은 충분히 알아들었지만 그 말을 무시하곤 질문을 이었다.
“주영이가 형이 자기 싫어한다고 하던데 진짜 싫어하시는 거예요?”
“아니.”
“……그럼요?”
“좋고 싫고의 판단은 그 정도로 내게 영향력이 있는 사람에게 하는 거야. 서주영은 내게는 주변에 있는 ‘엑스트라 1’이야. 이 방에 있는 책상, 혹은 화분하고 다를 바 없는 존재인데…… 책상과 화분에 호불호를 따지지는 않지.”
그러니까 게임 속의 NPC(Non-Player Character)와 같은 존재라고 현규는 주영을 정의했다.
사실 유학 시절 갑자기 같은 학교로 유학 온다고 하기 전까지 서주영은 무명의 아빠 친구 아들이었다.
그나마 주영을 의식하기 시작한 이유는 같은 동네로 이사 온 주영을 보곤, 해준의 타입일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극단적으로 낯을 가리고 내향적인 주영에게는 낯선 나라에서의 보호자가 필요했고, 해준은 남을 잘 챙겨 주는 타입이라 잘 맞을 것 같았다.
물론, 아버지와 서 국장님은 자신이 주영을 보살펴 줄 거라 생각하고 결혼의 밑그림을 그리기 위해 주영이를 강제로 유학 보낸 거였지만 턱도 없는 계획이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한 거다.
자신은 그 정도로 친절한 사람이 아니다.
그때 주영에게도 확실히 말해 놨다.
영감탱이들이 무슨 생각인지는 뻔하지만 난 너랑 결혼할 생각 전혀 없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 내가 너한테 친절할 거라는 생각은 망상으로도 하지 말라고.
그래서 대신 친절하라고 해준 형을 소개해 줬고 그건 아주 성공적이었다. 서 국장님이 일부러 자신의 집 바로 맞은편 집까지 구해 줬지만 자신이 무서워 차로 1시간 걸리는 해준 형의 집 근처로 도망갈 정도로, 주영은 해준 형에게 완전히 의지했다.
해준 형에게 주영을 소개해 준 게 자신이 태어나 제일 잘한 일이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두 사람은 결국 연애를 시작했고 그 덕에 수현과 공조할 수 있었으니까.
불가능하다 생각한 일도 만약을 위해 늘 철저하게 준비해 두면 언제든 기회는 오기 마련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주영이가 와 있는다고 해도 진짜 괜찮겠어?”
어제는 괜찮았지만 막상 떠날 시간이 다가오자, 얘를 어떻게 두고 가나, 지금이라도 여권 가져오라고 해서 그냥 가는 길에 태워 갈까, 고민하는데 수현이 그게 무슨 뜻이냐는 얼굴로 되묻는다.
“……뭐가요?”
“혼자는 아니지만, 나 없이 지낼 수 있겠냐고…….”
혹시나 하는 기대를 담은 현규의 물음에 수현은 도저히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썼다.
지금까지 안 보고도 잘 살았는데 뭘 새삼, 이라는 얼굴이었다.
“어차피 나흘 뒤면 돌아오실 거잖아요.”
예상은 했지만 너무나 의외성이 없는 반응에 현규는 자꾸만 처지려는 표정을 겨우 담담하게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