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기대도 안 했다는 듯.
“……그렇긴 하지.”
“그럼, 됐어요. 형 없으면 보고 싶긴 하겠지만 다시는 못 볼 거 아니니까…….”
“보고 싶기는 하고?”
감정이 상해 저도 모르게 약간 삐친 듯한 음성이 터졌다. 순간 아차 했지만 수현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네. 예전에도 가끔 형 보고 싶을 때 있었어요.”
“……언제?”
“그냥, 가끔요…….”
순간 현규의 눈이 반짝인다.
아주 예쁘게.
“그럼 전화하지 그랬어.”
“번호를 모르는데 어떻게 해요?”
“지수가 알잖아.”
“……형 친구가 보고 싶다고 전화하는 것도 웃기지 않았을까요?”
별로 친하지도 않았는데 왜, 라는 생각을 하며 수현은 눈을 껌뻑였다. 원래 잘 알고 친하던 관계라면 몰라도 서로 데면데면하다 못해 피해 다니던 관계인데 보고 싶다고 전화를 하는 건 너무 이상하다.
보이스 피싱 같다.
“그게 아니라도 미국에 왔을 때 한 번 통화했으니 번호 알았을 거 아냐?”
“……아…….”
“미국에 있을 때는 계속 그 번호였는데, 전화 안 했잖아.”
바람맞힌 그날도, 라는 말에 수현은 현규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그때는 내비게이션 많이 쓸 거라 선불폰을 썼거든요. 한국 올 때 버리고 와서 번호 저장 안 해 놨어요.”
“……그래?”
“네……. 그런데, 형 이제 나가셔야 하지 않아요?”
아무리 전용기를 탄다 해도 오늘 3시에 출발하려면 지금쯤 회사를 나가야 하지 않나, 하며 수현은 휴대폰을 힐끔 내려다봤다.
시각은 이제 오전 12시 30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이 시간이면 길은 안 막히겠지만 공항까지 1시간은 잡아야 한다.
“아직은 괜찮아. 그리고 너 겨울옷은 다 준비했어? 아직 파카는 안 나와 있는 것 같던데.”
“……형, 아직 그 정도 날씨는 아니에요.”
“일단 꺼내 놔. 날씨가 변덕스러우니 언제 추워질지 몰라. 그리고 후드도 기모 후드로 준비했어? 겨울 코트는?”
“……겨울 코트요?”
10월에 웬 겨울 코트?
이건 웬 헛소리냐는 수현의 노골적인 표정에도 현규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멋대로 말을 이었다.
“아니, 됐어. 네 눈은 못 믿으니 그건 내 쇼퍼가 알아서 준비해 올 거야. 오늘 저녁에 집으로 보낼 테니 만나서 사이즈 체크해. 내가 지정한 브랜드 내에서 고를 테니 네가 고르지 마. 아니다, 이 김에 다른 옷들도 부탁해야겠네. 굳이 양복이 아니라도 트렌치랑 포멀하게 입을 재킷 정도는 있어야 하니까.”
“……저기, 형…….”
“그래도 출근은 지금 그대로 해. 회사 내에서 넌 그냥 바퀴벌레면 돼.”
“아니, 저기요 형…….”
혼자 빠르게 말을 내쏘는 현규의 일방적인 태도에 수현은 말을 걸려 했지만 그보다 현규가 빨랐다.
“그리고 소파도 오늘 바꾸러 올 거야. 정액이 안으로 스몄어. 페브릭이 그게 안 좋지만 어쩔 수 없지, 내 취향이니. 설치 기사들이 너한테 전화할 테니 오면 문 열어 줘. 반드시 주영이 있을 때 열어 줘야 돼. 남자 함부로 믿으면 안 돼.”
세상에서 제일 못 믿을 남자가 하는 다른 남자 믿지 말라는 말에 수현은 그것도 형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하려 했지만 이번에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 창문 공사도 하러 올 거야.”
“창문은 또 왜요?”
창문이 뭘 잘못 했길래, 라는 얼굴로 수현이 기함하자 현규가 빠르게 수현의 말을 막는다.
“간단한 필름 공사야. 외부에서는 안쪽이 보이지 않게.”
“거기 저희 집 아니라 함부로 공사하면 안 돼요.”
“돼. 필름 시트 바르는 것뿐이고 나갈 때는 전부 복구할 거야. 그래도 말 나오면 건물째로 사면 돼.”
“집주인은 건물주 아니에요…….”
따로 분양받은 사람이라고 하자 형이 알 게 뭐냐는 듯 말을 돌린다.
“그럼 오피스텔만 사면 되지. 그건 됐고. 주영이한테는 따로 주의 목록 보내겠지만 주영이랑 지낸다고 해도 같이 자는 건 안 돼. 그리고 같이 술 마시는 것도 절대 안 돼.”
유독 ‘술’이라는 단어에서 강한 현규의 악센트에 수현은 눈을 굴려 시선을 피했다.
그건 누가 봐도 자백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솔직한 수현의 얼굴에 현규가 역시나란 얼굴로 허탈하게 웃는다.
“마실 생각이었군…….”
“…….”
“꿈도 꾸지 마.”
“……맥주 한 캔도 안 돼요?”
“넌 술 마시면 사람 미치게 하니까 절대 안 돼.”
거기다 필름까지 끊겨 다음 날에는 난 아무것도 몰라요, 라는 얼굴을 하는 수현을 떠올린 현규는 진저리를 쳤다.
수현의 술버릇은 최악이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아무 일 없었다는 게 기적이다.
그래, 그 부분에 대해서만은 해준 형에게 감사한다. 유학 중에도 수현의 친구들을 관리한 사람이니까.
“딱 한 잔만요…….”
“웃기지 마. 그날 당한 게 나니까 그 정도로 넘어간 거지,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소장 속에서 헤엄치게 해 줬을 거야.”
아니,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현규가 그럴 생각을 하긴 했다.
같이 술을 마시고 그다음 날 눈을 뜬 수현이 아무 기억도 없다고 했을 때 수현이 약속을 번복한다면 법무팀과 자신의 모든 인맥을 총동원해 소장 종합 선물 세트를 선물할 생각이었다.
성희롱 및 혼인 빙자 간음과 사기뿐 아니라 넣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다 넣어, 민사와 형사 양쪽으로 멘탈이 탈탈 털릴 정도로.
자신의 순정을 갖고 논 죄는 크고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다.
그러니 절대 안 된다고 현규가 못을 박자 수현이 그제야 포기한 듯 고개를 숙인다.
“……안 마실게요.”
일단 얌전히 대답은 했지만 수현은 입술을 꾹 깨물며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형들 잔소리 피해서 집까지 나왔더니 이젠 현규 형이다.
솔직히 현규 형과 혼인 신고했을 때 당황하긴 했지만 그럼 이제 내 파트너가 현규 형이니까 형들은 더 이상 간섭 못 하지 않을까, 하고 내심 좋아했던 것도 있었는데…….
헛된 꿈이었다.
형들보다 더한 사람이 들러붙은 기분이었다.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을 빼냈다는 게 이런 건가…….
“그리고…….”
아직도 할 이야기가 남았는지 다시 입을 여는 현규를, 수현은 질렸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바로 그 순간 현규의 휴대폰에서 메시지 음이 울려왔다.
이 세상에서 가장 반가운 그 소리에 수현은 반색하며 어서 휴대폰을 확인하라는 듯 현규를 바라봤다.
“형, 메시지 보셔야죠.”
“……볼 거야.”
“어서 보세요.”
“그래.”
제발 이제 나오라는 메시지이길 바라면서 두근두근하며 기다리는데 아니나 다를까 현규 형이 혀를 찬다.
“……나가야 돼.”
“어서 가세요.”
사람들 기다리겠어요, 라며 재촉하는 수현을 슬쩍 돌아본 현규은 아주 못마땅해하는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왜 네가 좋아하는 것 같지?”
“……제가요?”
“그래.”
“……그럴 리가요.”
“…….”
“오해세요. 형 잔소리 듣기 싫었는데 형이 나가야 해서 좋아하는 거 절대 아니에요.”
“입술은 좀 내리고 거짓말을 하지?”
지금 네 입꼬리 귀에 걸리다 못해 찢어지겠다고 현규는 웃으며 손을 들어 본인의 뺨을 두드렸다.
네 입술 끝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의미였다.
그 지적에 수현은 민망한 듯 손으로 뺨을 밀어 내렸다.
“아, 얘가 왜 이러죠……. 눈치가 없네.”
“그건 자백이지?”
지금 웃고 있다는, 이라는 말에 수현이 이젠 대놓고 웃으며 뺨을 문지른다.
“어서 나가세요.”
“그럴 거야.”
“그럼, 저도 사무실로 갈게요.”
괜히 현규가 더 화를 내기 전에 수현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 나가려 하자 현규가 수현의 손목을 잡아 세게 당긴다.
그 힘에 휘청거리던 수현은 얼결에 현규의 무릎에 앉아 그의 어깨를 손을 짚었다.
바로 얼굴을 마주 본 채 현규의 위에 앉은 자세에 수현은 민망한 듯 중얼거렸다.
“형, 야해요.”
자세가, 라고 중얼거리는 수현의 목을 현규가 손을 뻗어 끌어안는다. 그러곤 목덜미의 냄새를 맡으며 그곳을 깨문다.
꽤 세게.
“좀 아파요, 형.”
“아프라고 한 거야. 마킹이 다 날아가도 잇자국은 남으니까.”
“어제 남긴 것도 그대로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