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답장 못 보낸다는 말을 에둘러 적은 뒤 발송 버튼을 누른 수현은 커피를 손에 든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홍보팀 다녀올게요.”
책상 위에 있던 자료를 정리해 손에 든 수현은 막 자리에서 일어서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곤 곧 사무실을 나서려는데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 왔다.
오피스텔 관리실 번호였다.
어지간해서는 연락할 일 없는 번호였기에 의아하긴 했지만 일단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 1546 차주시죠?
뜬금없는 차 이야기에 수현은 눈을 껌뻑였다. 대체로 차 번호로 시작되는 통화는 좋은 일일 가능성이 없다는 걸 직간접 경험으로 알기에 약간 경계한 채 조심스레 답했다.
“네, 맞는데요.”
- 예, 그게요…….
약간의 간극 후에 시작된 설명에 수현은 새삼 세상의 진리를 깨우쳤다.
역시나 통계는 확실했다.
* * *
“어…….”
‘이건 좀 그런가?’라는 말을 대신해 짤막한 한숨을 뱉어 낸 수현은 이내 흔들흔들하는 사이드 미러와 찌그러진 펜더를 보곤 인상을 썼다.
“긁으셨다고 들었는데요…….”
10분 전 갑자기 걸려 온 전화는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빼던 사람이 자신의 차를 긁었다는 연락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자신은 처음 당하지만 이런 일은 회사 주차장에서도 종종 있으니까.
문제는 그 소식을 듣고 교육을 팀장님께 떠넘긴 뒤 와 보니 차의 상태가 듣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그쪽에서는 긁었다는데 긁은 정도로는 차가 저렇게 될 수가 없다.
2년 전쯤 운전 미숙이었던 운전자가 삼촌의 차 조수석 쪽을 들이받은 적이 있는데 지금 자신의 차가 딱 그때 삼촌의 차와 같은 상태였다.
이 정도면 핸들을 최대로 튼 채 액셀을 세게 밟은 거다.
“……수리가 꽤 걸리겠네요.”
단순 도색이 아니라 펜더를 교체해야 할 수준이라 당황해 그렇게 중얼거리자, 상대 남자가 옆으로 다가서며 굉장히 서글서글한 얼굴로 말을 건넨다.
“죄송합니다. 보험사에 연락했으니 곧 처리해 드릴 겁니다. 수리 중에는 렌트도 도와드리고요.”
“네에…….”
사실 1년 전 독립한 뒤 차를 거의 쇼핑용으로만 사용하던 상태라 별로 불편할 건 없었다.
친구들과 만날 때도 술을 마시니 거의 두고 다니기도 해서, 1년에 운행 거리가 5000킬로미터가 안 돼 특약을 들 정도니 사실 렌트도 필요 없긴 하다.
괜히 차 렌트하고 어쩌고 하면 시간만 깨질 것 같아 고민하고 있는데 남자가 문득 옆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럼, 연락처 좀 알려 주시겠어요?”
“……네?”
“네, 차에 번호가 없더라고요.”
“아…….”
외부에 주차할 때는 연락처를 올려 두지만 오피스텔에서는 거주자 전용 주차장에 차를 대기 때문에 일부러 연락처를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도 관리소에서 전화가 온 거고.
“사고에 관한 대화는 보험사와 하면 될 것 같은데요.”
“그건 그렇지만, 사과도 드릴 겸 제가 한잔 사고 싶어서요.”
차를 박았다고 술을 산다는 말의 개연성을 이해할 수 없어 수현은 바로 되물었다.
“왜요?”
“차 때문에 불편하시잖아요. 근무 중에 급히 나오기까지 하시고…… 여러모로 폐를 끼친 것 같아서 술이라도 사 드려야 제가 좀 덜 죄송할 것 같아서요.”
“일부러 하신 것도 아닌데 괜찮습니다. 어차피 차는 자주 안 쓰니까요.”
그러니 됐다고 돌아서려는데 남자가 끈질기게 달라붙어 온다.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 연락처는 필요하잖아요.”
옆에 주차된 그의 차와 수현의 차 틈에서 바싹 옆으로 다가서는 남자는 은근한 투로 말을 건네며 느끼하게 수현을 훑어봤다.
속이 안 좋을 정도로 거북한 느낌에 수현은 살짝 인상을 썼다.
아니, 사실은 진짜 싫었다.
남자한테서 수현이 싫어하는 향이 났다.
네롤리와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베리 종류의 향인 것 같은데 냄새가 너무 독했다.
그 냄새 때문인지 속이 메스꺼워서, 슬쩍 그에게서 멀어지며 정중하게 남자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럼 제 변호사 연락처를 드릴게요. 급한 일 있으시면 그쪽으로 연락하시면 됩니다.”
네 연락 받고 싶지 않다는 말이었다, 그건. 사회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했지만 불행히도 그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
분명한 거절에도, 포기하기는커녕 오히려 멀어진 만큼 다가오는데 그게 더 싫었다.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그게 아니라,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은 거라면요.”
“……왜요?”
“그냥요. 사람이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게 무슨 느낌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그의 냄새에 입을 열 수가 없어 재빨리 한 걸음 옆으로 가 거리를 두자 그가 또 다가서려 한다.
지하 주차장이라는 공간 탓인지 냄새가 역했다.
속이 뒤집힐 것 같아, 재빨리 손을 들어 남자에게 경고했다.
“저기, 좀 떨어져 주시면 안 될까요?”
“왜요?”
그렇게 말하며 능글맞게 웃는 얼굴로 또 다가까워지는데 너무 메스껍다.
방금보다 더 심해졌다, 그 냄새가.
“저기, 이런 말 진짜 죄송한데요…….”
진짜 하고 싶지 않고, 하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이대로는 토할 것 같아 어쩔 수가 없었다.
“냄새나요.”
* * *
“지금 차 견인 보내고, 들어가는 중이에요.”
나한테서 무슨 냄새가 나냐고 난리를 친 남자에게 향수 냄새가 너무 역해서 그랬다고 사과하자 그는 불쾌한 듯 본인 차에 들어가 버렸다.
너무 무례한 말을 해 미안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비위가 꽤 좋은 편이라 자부하고 살았는데 그의 냄새는 너무 역겨웠다. 조금만 더 있었다면 토했을지도 모른다.
그래, 면전에 대고 토하는 것보다는 말로 끝내는 게 낫다. 최소한 자신의 입장에서는 그렇다. 그가 모욕적으로 느낀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변호사를 통해 한 번 더 사과하면 된다.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사무실로 복귀하기 전 상황을 확인했다. 하지만 다행히 오늘은 어제에 비해서는 평화로운 모양이었다.
윤 팀장님한테 교육받고 있는 홍보팀 직원들만 불쌍할 뿐이지.
- 차 많이 다쳤어요?
“네. 펜더를 갈아야 할 것 같아요.”
- 주차한 상태에서 긁힌 건데요?
옆 차가 나갈 때 긁은 거면 보통 범퍼나 라이트의 표면에 흠집이 나는 정도 아니냐는 직원의 극히도 엔지니어스럽고 상식적인 의견에 수현 역시 동의를 표했다.
“그러니까요. 그런데 차가 급발진을 했는지 제대로 박았더라고요.”
그것도 하필 같은 RV 카다 보니 차의 손상이 컸다. 그쪽 차가 세단이었으면 최소한 사이드 미러는 안 나갔을 거다.
- 대리님 차 외제차죠?
“네.”
그래서 수리 기간을 최소 한 달은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렌트는 피할 수 없다.
- 와, 수리 오래 걸리겠네요.
“그러니까요…….
- 그냥 액땜한 셈 치세요. 그렇게 세게 박은 거면 사람이 안 타고 있어서 다행인 거라고요.
“그렇긴 하죠. 저 지금 사무실로 가는 중인데 다음 교육은 회계팀이죠? 거긴 제가 갈게요.”
-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지금 홍보팀 직원들이 개발팀이 저러니까 시발팀이란 소리 듣는다고 욕하고 있대요.
팀장님이 하도 성의 없이 교육해서요, 라는 말에 수현은 안 봐도 알겠다는 듯 쓰게 웃었다.
알면서 맡긴 거긴 하지만 진짜 윤 팀장님도 어지간히 일관성 있다.
본인 하고 싶은 일만 하고 하기 싫은 일을 맡기면 온몸으로 싫다는 티를 내며 너무 대충한다.
“금방 갈게요.”
홍보팀 직원들에게 심심한 애도와 사과를 표하며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19층 버튼을 눌렀다. 그러곤 막 닫힘 버튼을 누르려는데 누군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잠시만요!”
다급한 남자의 음성에 손을 멈췄다. 그리고 그를 기다리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럼, 끊을게요.”
서둘러 전화를 끊은 뒤 잠시 기다리자 텀블러를 든 채 달려온 남자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감사합니다.”
살짝 상기된 채 감사를 표하는 남자의 미소에, 이쪽 역시 묵례로 답한 뒤 다시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또 형의 문자가 와 있다.
그래도 이번엔 식사 잘하고 이불 꼭 덮고 자라는 메시지다.
그 메시지를 보니 기분이 묘했다.
보호자가 완전히 바뀐 기분이었다.
정확히는 인수인계당한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