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이 할 말 있으면 하시라고 그를 재촉하듯 바라보자 그가 이내 고개를 내젓는다.
“아니다. 이건 확실하지 않으니까……. 나중에 현규랑 같이 병원에 들러. 예약하면 내가 따로 그쪽 담당의를 소개해 줄 테니 같이 클리닉 받아.”
“클리닉이요?”
“지금 네 상태가 일반적으로 정상이라고 보는 상태는 아니니까 클리닉의 도움을 받으면 결혼 생활이 더 원만해질 수 있을 거야.”
“부부 상담 같은 건가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이라고 수현이 묻자 진호가 정확히 필요한 부분을 짚어 준다.
“성생활도 포함한.”
‘성생활’이라는 단어에서 수현의 눈이 번뜩였다.
“그거 하면 좀 줄일 수 있나요?”
“응?”
“성생활이요.”
굉장히 추상적인 수현의 표현에 잠시 그 말의 의미를 고민하던 진호는 수현에게 되물었다.
“……줄인다는 건 성관계 횟수를 얘기하는 거야?”
“네.”
“……현규가 많이 하나 보지?”
“네. 아주요.”
진짜 눈만 마주치면 하려고 한다고 수현이진지하게 답하는 걸 들은 진호는, 뭔가를 말하려고 달싹이던 입술을 다물었다. 그러곤 곧 말을 돌렸다.
“신혼 때는 원래 그렇긴 한데…… 그건 내 전공이 아니니 그쪽 상담은 그쪽 전문의랑 해 보지 않을래?”
솔직히 초등학생 때부터 봐 온 수현의 성생활 따위는 전혀 듣고 싶지 않다는 게 진호의 진심이었다.
그러니 다른 의사랑 얘기하라는 말을 수현은 빠르게 수긍했다.
“그렇죠. 전문가에게 가야죠.”
“그래. 그러니까, 가.”
훠이 훠이, 어서 이 방에서 나가라며 진호가 손을 내젓자 수현이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 그럼 다음에 뵐게요.”
마지막 인사를 남긴 뒤 가벼운 걸음으로 진료실을 나섰다.
형이 오면 꼭 상담받아야지, 라고 떠올리며.
* * *
“저, 지금 사무실 들어가요.”
올 때와 달리 기분 좋게 병원을 나와 택시 정류장으로 향하던 수현은 곧장 윤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보고했다.
“택시 타고 가면 아마 20분쯤 걸릴 거예요.”
- 속은 괜찮아?
“네. 이제 가라앉았어요.”
- 왜 그렇대?
“그냥 호르몬 수치에 미묘한 변화가 있어서 냄새에 좀 예민해진 것 같대요. 이틀 정도 두고 보다 또 토할 것 같으면 위내시경 해 보자고 하셨어요.”
- 그냥 예약 잡지 그랬어? 이 대리같이 비위 좋은 사람도 드문데…….
세상 곱게 자란 얼굴로 음식에서 파리가 나오면 파리만 건져 내고 먹는 게 이수현이었다.
그래서 그나마 파리는 안 먹어 다행이라고 안도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기에 윤 팀장은 넌지시 걱정의 기색을 내비쳤다.
수현이 겨우 냄새 따위 때문에 헛구역질을 할 리 없다는 게, 윤 팀장의 소견이었다.
“건강 검진한 지도 얼마 안 돼서 일단 두고 보자고 하셨어요. 예약은 금방 잡을 수 있으니까요.”
- 약은 처방받았어?
“아뇨.”
- 혹시 모르니 구토 억제제 받아 오지.
그거 잘 듣는다는데, 라는 윤 팀장의 말에 뭐라고 대답하려던 수현은 마침 병원 입구 앞에서 손님을 내려 준 택시에 올라탔다. 그리고 곧 기사님께 목적지를 말한 뒤 통화를 이어갔다.
“구토를 실제로 한 건 아니라서요.”
- 그래도 주의해야지. 이 대리, 이제 혼자의 몸이 아니잖아.
안전띠를 매는데 문득 들려온 다정한 윤 팀장의 위로에 수현은 거대한 해일처럼 몰려오는 위화감을 느꼈다.
이 사람이 절대 친절한 사람이 아닌데, 특히나 오늘처럼 가장 하기 싫어하는 일까지 떠넘긴 상황에서는 투덜거려야 정상인데 너무 상냥하다.
아니, 실제로 회계팀 교육도 해 달라고 했을 때 ‘나 이런 거 싫단 말이야.’라고 엄청 징징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친절하다는 건…….
“주식 또 올랐어요?”
- 응.
이번엔 수현도 놀랐다.
현규 형과 자신의 결혼 이슈가 있긴 했지만, 어차피 주식을 움직이는 주체는 해외 투자인데 오너 아들의 결혼설로 그쪽 유입이 늘지는 않았을 거고…….
“아…… 샌프란시스코…….”
결혼이 아니라 형의 출장이 주가에 큰 영향을 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번 상승 폭은 안정적이라고 봐도 된다.
“팀장님은 기본적으로 도파민 중독에 약하니 주식에 너무 맛 들이지 마세요.”
- 적당한 때 뺄 거야. 그리고 오늘 돌아오지 말고 병원에서 곧장 퇴근해.
“왜요?”
- 사장님 출근하셨어.
뜬금없는 그 이야기에 수현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벌써요?”
분명히 어제 입원하셨고 그래서 현규 형이 대신 비행기를 탄다고 했는데, 지금 퇴원할 거면 대체 왜 입원한 건데…….
황당한 상황에 수현이 어이없어하자 대충 사정을 아는 윤 팀장이 주변 눈치를 보는 듯 목소리를 낮춰 속삭인다.
- 이 대리 찾으시길래 속이 안 좋아서 병원 갔다 곧장 퇴근할 거라고 했어. 이 대리 짐은 내가 퇴근할 때 갖다줄게.
“팀장님, 진짜 협조 잘하시네요.”
부탁도 안 했는데 알아서 척척인 게 간신 같았다. 그것도 아주 능력 있는.
- 이 대리야, 우리도 벌써 5년이야. 이쯤 되면 베프인데 상부상조해야지.
“제가 아니라 주식하고 베프 먹으신 것 같은데요.”
- 어느 쪽이든. 앞으로 오래오래 잘 지내야 할 거 아냐?
이쯤 되니 수현도 왜 현규가 윤 팀장을 아예 이쪽으로 끌어들이자고 한 건지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면 차라리 좋다. 오가는 게 명확해서 단순 명료하다 못해 시원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눈치도 빠르고 일도 더럽게 잘한다. 그리고 센스까지 있어서 하나를 부탁하면 그에 파생된 열을 알아서 챙겨 준다.
서류 업무와 기타 잡무를 좀 이렇게 해 보지…….
이 사람도 참 자기 멋대로 산다는 생각에 혀를 차며 수현은 다시 대화 주제로 돌아갔다.
“그럼 가방 부탁드릴게요. 아니다, 그냥 내일 갖다주세요.”
현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물건은 휴대폰이고 그게 지금 자신의 손에 있으니 가방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사실, 자신에게 가방은 액세서리 같은 거였다. 출퇴근 시에 빈손으로 다니면 이상해 보일까 미관상 들고 다니는 물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면 평범한 사원들의 넥타이 같은 거였다. 없어도 되지만 안 하면 이상한.
그래서 가끔 도시락 쌀 때를 제외하곤 늘 텅 빈 채였다.
그 순간 문득 형 돌아오면 더 추워지기 전에 도시락 싸서 옥상 데이트나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쁜 도시락이 유행이니 캐릭터 김밥에 꽃 주먹밥하고 과일꼬치에 미역국 조합도 좋아 보였다.
그러고 보면 최근 바빠 너무 요리를 등한시했다.
지난번에 삼촌하고 주영이랑 피크닉 갈 때 3단 찬합 네 통에 김밥과 유부초밥, 구절판과 닭튀김에 약밥, 그리고 샌드위치와 금귤정과까지 잔뜩 싸 간 이후로는 도시락을 만들지 않았다.
그때 금귤정과가 맛있었는데 지금은 가을이니까 무화과정과를 하면 될 것 같았다. 오렌지정과도 괜찮고.
- 그래, 그럼. 가방은 내가 가져갈 테니 오늘은 푹 쉬어. 이 대리 작업 마무리하자마자 연애하느라 바빴으니까.
“저도 그러고는 싶은데 팀장님이 오늘 저지르신 만행 때문에 내일 출근해서 뒤처리하러 다녀야 할 것 같아요.”
- 내가 뭘?
“회계팀 윤 팀장님이 방금 메시지 보내셨어요. 팀장님 때문에 환장하겠으니 다시 교육해 달라고요.”
그렇지 않아도 그 메시지를 보고 전화한 거라고 하자, 윤 팀장님이 발끈한다.
- 난 커리큘럼대로 다 했어.
“다 하긴 하셨겠죠. 제대로 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 아니, 뭘 그렇게 깐깐하게 굴어? 어차피 다 아는 내용 한 번 더 확인하는 것뿐인데. 그리고 그 나이 되면 이 정도 프로그램은 다 다뤄야 하는 거 아냐? 딱 보면 코드 보이잖아.
“그럼, 그 사람들이 엔지니어 하겠죠.”
- 어쨌든.
“팀장님이 친절해지시는 건 꿈도 안 꾸는데 그래도 다른 팀하고 원수는 지지 마세요.”
그래서 지난번 그 작은 회사에서도 고생하지 않았냐고 하자 팀장님도 이번엔 할 말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문다.
- 알았다고.
“그럼 들어가세요.”
- 그래.
윤 팀장과 통화를 마친 수현은 휴대폰으로 시각을 확인했다. 사실 이제 곧 퇴근할 때라 다시 회사로 돌아가기도 모호하다.
저녁때 방문객들이 많을 예정이라 저녁은 집에서 먹어야겠지만 애매하게 남은 시간에 잠깐 일탈을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을 정한 뒤 휴대폰을 손에 든 수현은 연락처 목록에서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기를 잠시. 세 번의 연결음 이후 곧 통화가 시작됐다.
- 응.
“언제 끝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