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의는 아니지만 현규에 대한 정보가 넘쳐나는 주영이 그렇게 줄줄이 읊어 주자 수현이 놀란 눈으로 주영을 바라본다.
“진짜 아이를 싫어한다고?”
“응. 형 그것 때문에 유명했잖아. 혹시라도 임신할까 봐 오메가랑은 아예 사귀지도 않는다고. 그래서, 베타만 주로 사귀었을걸. 그것도 거의 여자들만.”
나름 현규와 함께 유학까지 해, 꽤 신빙성 높은 주영의 간증에 수현은 4년 전 기억을 떠올려 봤다.
그때 그 사람은 분명히 오메가였다. 그런 걸 잘 아는 편은 아니지만,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럼,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난, 전혀 몰랐어.”
“너야 형한테 관심 없었으니까. 나도 내 친구가 현규 형 좋다고 따라다니지 않았으면 몰랐을 거야.”
듣기 싫다고 해도 밤마다 전화해 현규 이야기를 해 대던 친구를 떠올리며 주영은 진저리를 치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이 현규 형을 무서워하는 걸 뻔히 알면서 일일이 소식을 전하길래 대체 왜 저러나 했는데, 그 녀석은 진짜 현규 형을 스타를 좋아하듯 좋아했다. 일종의 그루피족, 요즘 표현으로 하자면 사생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연예인이 아니다 보니 같이 정보를 공유하고 관심 있게 떠들 상대가 없어 만만한 자신을 붙잡고 원치 않은 정보를 주입했던 거다.
사실 형과 약혼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도 제일 걱정된 게 그 녀석이었다. 당연히 약혼은 현규 형 쪽에서 거절할 줄 알아서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그 녀석이 알게 되면 김치전 테러를 할 수도 있기에 내심 긴장한 채였다.
그래서 수현과 현규 형의 결혼 소식이 돌 때도 그 부분을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직까지는 조용했다. 혹시나 해 알아보니 화병으로 병원에 앓아누웠다고 한다.
답답증과 간헐적인 분노 조절 불가 증상 및 부정맥을 호소하며.
잠깐 병문안을 갔을 때 이를 부득부득 갈던 걸로 보아 퇴원하는 대로 수현을 찾아갈 가능성이 높아 보였는데……. 수현에게 그 녀석 얘기를 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여졌다.
말해 두는 쪽이 좋긴 하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두 사람 결혼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 힘들 텐데 거기에 괜히 문제를 얹어 주고 싶지 않았다.
물론, 수현은 절대 그런 걸 걱정할 성격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요즘 양쪽 집안이 거의 전쟁 중이라니…….
“아!”
거기까지 생각하던 주영은 순간 뭔가 떠오른 듯 탄성을 내뱉었다. 그 소리에 수현 역시 빠르게 반응한다.
“왜?”
“어…… 혹시…….”
“응?”
“그 남자들…… 설마, 현규 형 아버님이 보내신 거……는 아니겠지?”
시작은 창대했으나 그 끝은 미약했다.
순간, 확 하니 떠오르긴 했는데 그걸 확신할 수는 없기에 주영은 마지막 말에 가서는 자신 없게 말을 흐렸다.
주말 내내 무슨 일이 있어도 현규와 수현을 이혼시키고 말겠다고 여기저기에 장담하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그것만으로는 강 대표 짓이라고 확언할 수 없다.
그래서 괜히 말을 꺼냈나 후회하는데 수현이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맞을걸.”
“……응?”
“우리 대표님이 보내신 거 맞을 거야.”
태연하게 그렇게 답하며 수현은 느긋하게 창을 닫았다.
주영과는 달리 확신에 찬 그 답에 어느새 도착한 오피스텔 건물 주차장으로 진입하던 주영은 놀라 되물었다.
“맞아?”
“아마도.”
“아마도?”
“일단 심증은 있으니까.”
“심증이라니?”
“사고 난 장소가 오피스텔 거주자 전용 주차장이었는데, 그 남자 차에는 거주자 카드가 없었거든. 거기다 CCTV를 돌려 보니 너무 작정하고 들이받은 거 있지. 그것도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차를 빼면서.”
“아…….”
“엘리베이터 남자는 반대쪽 벽에도 있는 계기판을 두고 굳이 내가 서 있는 쪽을 누르려고 하더라고. 거기다 복장은 너무 캐주얼했고. 사원증도 안 메고 있던데 거래처 오는 복장도 아니었어.”
나도 거래처 갈 때는 정장을 입는 척은 한다고 수현이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한 팩트와 의견을 늘어놓자 막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선 주영이 수현을 힐끔거린다.
이런 걸 보면 또 예리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논리적인 거지만.
“그런데 진짜 괜찮아? 대표님이 일부러 이러시는 건데…….”
“응?”
“반대하시는 거잖아.”
“아…… 뭐, 찬성하실 이유도 없잖아.”
애초에 이 결혼 자체가 영감탱이들 엿 먹어라, 하고 시작한 기획이다 보니 어른들이 쉽게 결혼에 찬성하실 거라고는 꿈도 안 꿨고 사실 저쪽에서 어떻게 생각한들 상관없었다.
알 게 뭐냐는 무심하다 못해 대담한 수현의 태도에 주영은 새삼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인생은 무심하게 살아야 편하다, 라는 것.
정확히 1시간이었다.
집 안이 한 번 더 환골탈태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정확한 시간에 맞춰 도착한 소파 팀과 필름 시공팀은 우르르 현관으로 몰려와 빠르게 작업을 마친 뒤 또다시 우르르 현관을 박차고 나갔다.
뭐가 지나갔나 싶을 정도로 빠른 그들의 움직임에 멍하니 서 있던 수현은 그들이 사라진 뒤, 조금 당황한 듯 집 안을 돌아봤다.
겨우 필름 시공을 하고 소파 하나 바꾼 것뿐이지만 확실히 이전과는 달라졌다, 집안은,
굉장히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게.
이 집의 주인인 수현뿐 아니라, 손님인 주영 역시 그걸 느끼고 있었다.
“어…… 이건 뭔가…….”
“…….”
그러니까, 문제는 소파였다.
둥글둥글, 아기자기한 베이지색의 2인용 소파를 대신해 들어온 새 소파는 환한 톤으로 꾸며진 거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진한 회색의 칙칙한 소파 베드였다.
그건, 아무리 대충 사는 수현이 보기에도 너무나 이 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디자인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너무 현규답지 않았다.
“형은 뭐든 세트로 사야 하는 타입인가 봐.”
그러고 보니 옷도 거의 세트로 맞춰 입는 양복이었다. 어쩌면 일상복도 백화점에서 디스플레이된 그대로 사는 걸지도 모른다고 수현은 진지하게 현규의 심미안을 의심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안 어울리는 소파를 구매할 수 없다. 이건 나라도 안 산다.
지난번 산 가구들이 너무 예뻐 모델 룸을 통째로 옮겨 왔나 했는데 진짜 그랬던 모양이다.
이번엔 모델 룸을 통으로 옮기는 게 아니라 저런 소파를 선택한 것 같다. 혹은 지금 모델 룸에 있는 소파가 저거였거나.
“형이 의외로 색을 못 고르나 봐.”
집안 전체가 이런 톤이라면 무난한 흰색만 사도 중간은 하는데, 굳이 저런 색을 고른 걸로 봐서는 확실히 형에게는 쇼퍼가 필요해 보였다.
하지만 그런 수현의 걱정과 달리 주영은 이 소파에 담긴 메시지에 집중하고 있었다.
함께 유학 생활을 했기에 현규가 본인의 몸에 닿는 것뿐 아니라 보이는 것에도 엄청 예민하고 까다롭다는 걸 잘 아는데, 이건 어떻게 봐도 현규의 초이스는 아니었다.
현규는 굳이 저 소파를 들일 거라면 이 오피스텔을 통째로 공장형 인테리어로 바꿨을 사람이다.
그럴 돈도, 그렇게 만들 특권도 있는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이 이 집과 엄청나게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소파를 골랐다면 거기에는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거다.
대체 그게 뭘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이 식탁 의자 위에 있던 가방 안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울려 왔다.
그 소리에 서둘러 가방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든 주영은 반가운 듯 전화를 받았다.
“네.”
- 수현이네야?
“네, 지금 와서 소파 갈고 창문 필름 공사 끝냈어요.”
수현과 대화할 때와는 달리 생기와 약간의 부끄러움이 느껴지는 음성에 수현은 작게 “삼촌이야?”라고 물었다.
주영이 고개만 끄덕여 그렇다고 답하자, 수현은 알아서 자리를 피해 주방에 들어섰다. 그러곤 곧 냉장고를 뒤지는 수현을 뒤로한 채 주영은 거실 쪽으로 향해 갔다.
그사이 해준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 ……소파를 갈아?
“네. 현규 형이 오늘 소파 바꿨대요. 창문도 외부에서 안 보이게 필름 공사하고요.”
- 뜬금없이 왜…….
……라고 하던 해준이 순간 뭔가 떠오른 듯 아차 한다.
- 아, 강현규…… 어쩐지…….
“왜요?”
- 그거 혹시 소파 베드야?
“네.”
그 답에 해준이 길게 한숨을 내뱉는다. 어이없다는 듯.
- 그거, 너 자라고 보낸 거야.
“네?”
- 수현이랑 자지 말고, 거기서 자라고.
해준의 설명에 그제야 주영은 뭔지 알겠다는 듯 탄식했다.
“아…….”
어쩐지 현규 형이 고른 것치고는 너무 센스가 없다 했더니, 침대에서 자지 말고 저기서 자라고 어울리지도 않는 소파 베드를 급히 산 모양이었다.
그 배려에는 감사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현규가 굳이 경고하지 않아도 수현과 한 침대를 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옷을 갈아입으려 침실에 들어갔다 침대를 본 순간 무서워서 진짜 옷만 갈아입고 도망치듯 나온 게 바로 1시간 전의 일이었다.
잘 데가 없어 욕조 안에서 담요를 덮고 잘망정 알파 페로몬, 그것도 현규 형의 페로몬이 듬뿍 묻어 있는 침대에서 잘 정도로 용감하지 않았다, 자신은.
아니, 말이 페로몬이지 사실 정액이다.
분명 커버도 이불도 갈았지만 현규 형이 남긴 페로몬이 워낙 강하다 보니 거기서 잠만 자도 임신할 것 같았다.
아마, 그것도 일부러 그랬을 거다.
근처로도 오지 말라고.
성격 진짜 나쁘다.
- 어쩐지 아까 비행기 타기 전이라고 전화해서는 너 절대 수현이랑 같이 못 자게 미리 말해 두라길래 무슨 소린가 했더니…….
“현규 형이 진짜 수현이를 많이 ……하나 봐요.”
무심히 말을 꺼냈다 아차 한 주영이 가장 중요한 동사를 뺀 채 어정쩡하게 중얼거리자 해준이 혀를 찬다.
-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그 녀석을 보고 있자니 사람들이 염병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아.
지금 상황에서 그 단어만큼 확실하게 주변 사람들의 감정을 표현할 만한 단어는 없다고 해준은 확신했다.
꼴 보기 싫어 죽겠다는 뜻이었다.
그런 해준의 속내가 너무 훤히 보여 주영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