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 좋잖아요, 그래도.”
- 뭐든 적당해야 보기 좋은 거야. 과하면 지랄이라고 하지, 보통.
절대 해준답지 않은, 다소 과격한 그 표현에 주영은 눈을 크게 떴다.
“형, 그런 말 쓰는 거 처음 들어요.”
- 그 정도로 현규가 유난이라고. 평생 연애 안 하고 살 것처럼 도도하게 굴더니 해도 너무하잖아.
“어……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유학 시절 남들이 실연당해 우울해하는 모습을 보면 진짜 한심하다는 듯 연애 안 한다고 죽냐, 라고 혀를 차며 혐오하던 사람이 지금은 그 누구보다 연애를 즐기고 있었다.
역시 사람 앞일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거다.
다른 사람도 아닌 현규가 이럴 줄은 몰랐다.
- 두 녀석 연애에 얽혀 우린 무슨 꼴이야? 아무리 소파 베드라도 불편할 텐데 괜찮겠어?
“괜찮아요. 작업실에서 자주 자 봐서 소파 베드 익숙해요.”
- 그래도. 소파랑 매트리스는 달라. 아무리 겸용이라도 계속 거기서 자면 피곤할 거야.
“현규 형 어떤지 아시잖아요. 좋은 제품이에요. 그리고 펴면 넓더라고요. 게다가, 이거라도 마련해 준 게 얼마예요…….”
자기 집에 온 친구들한테 소파도 아깝다고, 바닥에 침낭 던져줬다는 일화로 유명한 현규가 소파 베드나마 준비해 둔 건 그 나름의 성의 표시였다.
그 표현이 아주 많이 삐뚤어지고 심술맞긴 하지만…….
- 그래, 강현규치고는 많이 노력하긴 했지. 하지만 그래도 부족해. 쑥이랑 마늘 좀 더 넣어 줘야겠어.
그거 먹고 진짜 사람 좀 되라고, 라고 해준이 한숨을 내쉬자 주영은 간지러운 듯 웃었다.
동굴에 갇혀 쑥과 마늘만 먹는 현규라니, 너무 안 어울렸다. 그랬다간 마늘이 간마늘이 되도록 얻어맞을 것 같다.
“군만두 하려고 했는데 만두전골 할까?”
통화 중 문득 들려온 수현의 물음에 주영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만두전골을 아주 좋아한다는 의미로 빠르게.
그사이 해준 역시 그 소리를 듣는 듯 묻는다.
- 만두전골?
“네, 수현이가 전골 한대요.”
- 아…… 얘기 들으니 나도 먹고 싶네. 수현이 만두 맛있는데.
그러고 보니 최근 수현이가 집에 안 와서 그가 해 준 밥을 못 먹었다는 해준의 한숨에 주영은 그를 달랬다.
“다음에 같이 먹어요.”
- 그래. 그럼, 수현이 잘 지내라고 전하고 무슨 일 있으면 곧장 연락해. 새벽에라도.
“그럴게요. 그래도 별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거기까지 말하던 주영은 뭔가 떠오른 듯 말을 멈췄다, 이었다.
“아, 저기…….”
오늘 수현이에게 있었던 일을 설명해야 하나 망설이던 주영은 그건 나중에 본인이 직접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말을 돌렸다.
“아니다. 수현이한테 들으세요.”
- 왜?
“오늘 좀 일이 있었는데 제가 전하는 것보다 직접 얘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 그래, 그럼. 쉬어.
“네.”
통화를 마친 뒤 주영이 다시 돌아서 주방으로 향하자, 어느새 큰 냄비에 육수를 팔팔 끓이던 수현이 냉동실에서 꺼낸 만두를 올려 두며 묻는다.
“삼촌이 뭐래?”
“조심하고 있으라고. 무슨 일 생기면 전화하래.”
“우리 형들한테 가려져서 그렇지 우리 삼촌도 극성이긴 해.”
괴수들 사이의 유일한 조련사라 언뜻 순해 보이지만 어떻게 보면 그 괴수들을 조련한다는 점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일 수도 있다고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영이 웃음으로 답을 대신한다.
동의는 하지만 말로는 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너 못 먹는 건 없지? 알레르기 있는 음식이나.”
냉장고 안에서 차곡차곡 재료들을 꺼내 쌓아 두며 수현이 그렇게 묻자, 그 앞으로 다가선 주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응, 다 잘 먹어.”
“그럼 만두전골하고 전골에는 겉절이가 있어야 하니 겉절이도 하자. 아…… 여기에 맥주 한잔하면 딱 좋겠는데…….”
“마셔. 아까 보니 맥주 엄청 많던데 주중이라도 한 잔 정도는 괜찮잖아.”
물을 마시러 냉장고 문을 열었더니 안에 소주와 맥주가 가득 들었을 뿐 아니라 테이블 위에도 위스키병도 널려 있었다.
많이는 안 되지만 주중이라도 맥주 한 캔 정도는 무난하지 않나 싶어 그렇게 말하자 수현이 입술을 삐죽인다.
“형이 술 마시지 말래.”
“왜?”
“술버릇 더럽다고.”
“응? 너 주사 없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주사가 없는 건 아니어도 얌전하다. 기본적으로 잘 취하지도 않지만 취한다 해도 아무 데나 널브러져 잘 뿐 호기를 부린다거나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시비를 건다거나, 혹은 했던 말을 반복하거나 울며 진상을 부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물론 변기 위에서 화장실에 있는 모든 화장지를 모아 끌어안고 자고 있는 걸 봤을 때는 ‘수현아…….’라는 말이 절로 나왔고 한 번 잠 들면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 당황스럽기는 했다. 하지만 어쨌든 기본적으로 술버릇 자체는 얌전했다.
그래서 술 취해서 잠들면 끌고 나와 집 현관에만 넣어 주면 됐다.
그런데, 주사 때문에 마시면 안 된다니 그건 의외였다.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형이 나 주사 심하대. 그러고 보니 기억이 없더라고…….”
“기억이 없어?”
“응.”
“……너 필름 끊긴 적 없잖아.”
“자주 그러는 건 아닌데 마감하고 나서 피곤할 때 취하면 필름이 좀 끊기거든. 지금까지는 자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이번에 두 번이나 그래서 형이 그냥 마시지를 말라고 했어.”
“그럼, 안 마시는 게 좋긴 하지.”
괜히 마셨다 나도 혼나기는 싫으니까, 라고 하는 주영의 앞에서 수현은 빠르게 전골 재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빠른 손놀림에 주영은 새삼 감탄했다. 요리 잘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하는 건 못 봤는데, 진짜 잘한다. 거기다 빠르다.
“너, 요리 진짜 잘한다.”
“응.”
“해준 형 입맛 까다로울 것 같아.”
“좀 까다롭긴 한데 삼촌도 요리 잘해서 괜찮아.”
“맞아, 지난번에 파스타 해줬는데 맛있었어.”
“응. 우리 집에서는 내가 해서 그렇지, 삼촌도 요리 잘하니까 네가 할 거 없어. 그리고 김치 같은 건 내가 다 해 주니까.”
“그 얘기도 들었어. 너 김장 많이 하면 200포기라며?”
요즘 종갓집도 그렇게 안 한다고 주영이 웃자 수현이 그 사실을 정정해 준다.
“200포기가 아니라 500포기야.”
“……500?”
“응. 속을 너무 많이 해서 절임 배추를 더 사 왔는데 이번엔 또 속이 부족하더라고. 그래서 속을 더 하고 보니, 또 배추가 모자라고. 그걸 반복하다 보니 그렇게 되더라고.”
계속 부족한 재료를 채우다 보니 사흘 동안 김장 500포기를 한 적이 있다고 수현은 3년 전의 지옥 같았던 사흘을 떠올렸다.
그건 마치 같은 하루가 영원히 반복되는 타임 루프 속에 갇히거나, 혹은 사망한 뒤 그 자리에서 사망한 순간의 사고를 반복하는 지박령이 된 기분이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김장에 나중에는 솔직히 좀 무서웠는데 다행히 시간은 흐르고 있었고 김치는 산더미처럼 쌓여 갔다.
그리고 동시에 배추 사 나르던 형들의 욕도 쌓여 갔다.
아마 그 사흘간 평생 먹을 욕은 다 먹은 것 같다.
“해준 형이 너 손 너무 크다고 걱정하더라.”
“걱정할 만해. 내 연봉의 70%가 재료비로 나가는 것 같으니까.”
“어…… 그건 좀…… 조절해야 할 것 같은데…….”
그 정도면 4인 가구 식비도 넘을 거라고 주영은 걱정했고 수현도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이건 수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하는 요리 양은 스트레스에 비례하기 때문에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 아냐.”
그 3년 전 김장 사건 때도 전 회사에서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무를 채 썰다 보니 그렇게 된 거였다. 그러니까 절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이해 못 하지만 재료를 다듬다 보면 본의 아니게 그 행위 자체에 집중해 무아지경이 되곤 하는데, 그럼 양에 관한 생각은 의식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게 자신이 스트레스를 처리하는 방식이니 어쩔 수 없다고 수현은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그러면서 채소 손질을 다 끝낸 뒤 육수가 끓는 동안 신이 나 알배기 배추로 겉절이를 시작했다.
그리고 정확히 1시간 후 수현은 본인이 한 말을 스스로 정정했다.
* * *
“내가 양 조절을 못 하는 게 스트레스 때문은 아닌 것 같아.”
“응. 나도 그런 것 같아.”
그나마 주영이 옆에서 이건 너무 많은 것 같다고 조절한 만두전골은 다행히도 5인분 선에서 끝났다.
그래, 그건 다행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의외의 곳에서 벌어졌다.
수현이 신나서 담근 겉절이가 김치통으로 한 통이 넘게 나왔다. 그걸로 다시 만두를 해도 될 양이었다.
거기다 갑자기 칼국수도 넣어야 한다며 꺼내 온 면은 못 해도 4인분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양을 눈대중으로 가늠하는데 수현은 눈치뿐 아니라 눈대중마저 없었다. 극단적으로 손을 쓰는 능력은 좋지만 눈으로 뭔가를 하는 능력은 한참 부족한 것 같았다.
그래서 주영은 합리적인 타협안을 제시했다.
“계량컵과 저울을 사는 게 어떨까?”
식사를 끝낸 뒤 그릇을 식기세척기에 넣던 주영이 가득 찬 김치통을 보며 그렇게 제안한 순간 수현은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난 레시피대로 요리하는 타입이 아니라 의미가 없어.”
어차피 무게 재고 양 재고 넣어 봐야 간 맞추다 보면 한여름 밭의 잡초처럼 무섭게 양이 증식할 게 뻔했다.
결국 그게 그거니 그냥 생긴 대로 사는 쪽이 편하다.
둘이 함께하자 뒷정리도 순식간이었다. 식사도 정리도 빠르게 마무리한 뒤 주영이 먼저 주방을 나서자, 수현이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