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160)

“너 먼저 샤워할래?”

“어…… 그럴까?”

“응. 그런데 진짜 소파에서 자도 되겠어?”

침대 넓은데 그냥 거기서 자지, 라는 수현의 속 모르는 소리에 주영은 정색했다.

“아니, 여기가 좋아. 나 소파 베드 좋아해. 작업하다 자주 자 봐서 아주 편해.”

절대 그 침대에서는 자고 싶지 않기에 주영은 온 힘을 다해 거부했다.

그 침대에서 자면 현규의 생령에 눌려 압사할 것 같았다.

“그래, 그럼. 그런데 형이 그거 생각해서 소파 베드로 산 건가?”

“그렇겠지.”

“의외로 다정하단 말야.”

안 그래 보이는데, 라며 수현이 흐뭇해하는 모습에 그거 절대 다정한 거 아니라는 말이 주영의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가라앉았다.

소파 베드를 놔 준 것까지는 다정한 게 맞g다. 하지만 자신이 오메가인 줄 뻔히 알면서 침대에 정액 칠을 해 놓고 소파 베드에서 잘 수밖에 없게 만듦으로써 앞서 보였던 다정함 역시 위협으로 바뀐다.

그래, 다정하게 위협하는 거다.

용기 있으면 자 봐라, 단 뒷일은 책임 못 진다, 앞으로 네 미래가 심해에 가라앉은 타이태닉호가 되더라도 그건 절대 네 잘못이지 내가 박정한 게 아니다, 라는 의미였다.

지금 이곳에 현규 형은 없지만 저 침대 위에 그의 영혼이 남아 있는 것 같아 절대 그 근처로도 가고 싶지 않았다.

진짜, 너무 이상한 사람이다.

“나 샤워하고 나올게.”

“응. 그럼 베개랑 이불 준비할게. 영화 뭐 볼래?”

“아무거나.”

2인용이지만 테이블을 치우고 아랫부분을 펴면 침대가 되는 소파 베드는 여전히 이 오피스텔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소파와 소파를 제외한 배경의 질감도 색도 전혀 달랐다. 흔히 말하는 그림체가 다른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수현은 그 소파가 마음에 들었다.

매트를 펴면 등받이가 헤드 보드가 되는데 그 헤드 보드가 높은 덕에 기대앉아 영화를 보기 좋았다. 거기다 넓은 것도 좋았다.

형이 오면 여기서 같이 영화를 봐야지, 라고 몰래 데이트 계획을 추가하며 수현은 재빨리 소파를 펴기 시작했다.

이 소파가 나흘 뒤에 사라질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 * *

영화는 재미있었고 야식으로 먹은 군만두와 골뱅이무침은 맛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영과 헛소리를 하며 느슨하게 시간을 보낸 게 가장 즐거웠다.

아직 비행 중이라 현규에게서 연락이 없는 건 아쉬웠지만 엉망이었던 하루를 보람차게 마무리한 수현은 역시나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오늘은 이불도 안 걷어차고 기절하듯 잠에 빠져 있던 수현을 깨운 건 휴대폰에서 울려온 벨 소리였다.

아직 어둡긴 했지만 요새 해가 짧아져 알람인가 하며 휴대폰을 찾아 손에 든 수현은 화면 안에서 반짝이는 ‘새엄마’란 이름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다음으로 휴대폰 화면 상단에 보이는 시각에 더 놀라워했다.

새벽 5시다.

아무래도 지금 도착한 모양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

“형, 잘 도착했어요?”

- 괜찮아?

“……네?”

- 괜찮냐고. 어제 엘리베이터에서 입 막고 뛰어나가던데?

마치 그 자리에 있기라도 했던 듯, 과하게 구체적인 현규 형의 설명에 살짝 잠겨 있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았어요?”

- 스파이가 있어. 그보다 진짜 토했어? 속 안 좋아?

스파이라니, 무슨 영화 찍나.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답했다.

“토하진 않았고, 속도 괜찮았어요.”

- 병원은?

“다녀왔는데 아무 문제 없대요. 그냥, 호르몬에 미묘한 변화가 있어서 냄새에 예민해진 것 같다고 하셨어요.”

- 냄새?

“네. 그 사람들 냄새가 좀 싫어하는 냄새라서요. 대표님은 사람을 보내시려면 좀 좋은 향수도 같이 사서 보내시지, 너무 대충 일을 하시는 것 같아요.”

좋아하는 베르가모트 향이었으면 그래도 나름 친절하게 거절했을 텐데…….

수현은 못내 얼굴 앞에서 토할 뻔했던 걸 신경 쓰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무례했다.

- 아버지가 시킨 건 줄, 어떻게 알았어?

“보면 알죠.”

누가 봐도 외형 좋은 남자 둘이 거의 1시간 간격으로 우연을 빙자해 번호를 따려 드는데,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둔하지는 않다.

그러고 보니 너무 어설펐다. 할 거면 좀 시간차 공격을 하시지.

그렇게 연이어 나타나면 미취학 아동이 아닌 이상 의심하게 돼 있다.

아무래도 대표님이 그다지 치밀하고 섬세한 성격은 아니신 모양이다.

- 똑똑하네.

우리 수현이, 라고 대견해하는 말투에 수현은 우쭐했다.

“제가 눈치는 없지만 추리력과 논리력은 좋거든요.”

누군가의 조작 없이 그런 일이 연이어 벌어질 확률은 제로에 수렴하기에 나름 추리를 했고 이 모든 게 대표님의 모함이라는 결론에 닿았다.

대체 그 남자들을 보내 뭘 하려고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표님의 짓은 맞았다.

- 그래, 그건 다행인데…… 진짜 속은 괜찮아?

“괜찮아요. 저녁으로 주영이랑 만두전골 맛있게 해 먹고 야식으로 골뱅이무침도 먹었어요.”

- 술은?

“안 마셨어요.”

전혀, 조금도, 입도 안 댔다고 수현이 맹세하자 그제야 현규가 안도한다.

- 그럼, 됐어. 주영이는 소파에서 잤지?

“네. 그런데 형, 그 소파 좋아요. 주영이랑 누워 봤는데 둘이 눕는데도 넓고 편안했어요.”

- ……주영이랑 누웠어?

“네, 같이 거기서 영화 봤어요.”

- ……주영이가 겁이 많은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

“겁 많아요. 형 무섭다고 침실 안으로는 들어오지도 않더라고요.”

침실에 결계라도 쳐진 줄 알았다고 하면서 침대를 뒹굴 구른 수현은 사이드 테이블 위의 무드 등을 밝혔다.

새벽 5시다 보니 사방이 깜깜했다. 아직 2시간은 더 잘 수 있는 시간이라 베개를 가슴에 대고 엎드린 채 통화를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그러곤 곧 휴대폰을 앞에 내려 둔 뒤 조금 목소리를 낮췄다.

“거긴 몇 시예요?”

- 오전 12시. 거긴 새벽이지?

“네. 지금 도착하신 거예요?”

- 도착해서 휴대폰 켜자마자 너 토했다는 연락이 와서 놀랐어. 속은 진짜 괜찮은 거지?

“네. 어…… 그런데…….”

- ……그런데?

“형 냄새 맡고 싶긴 해요.”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목소리를 들으니까 갑자기 형의 냄새가 떠올랐다. 그나마 방 안에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어 다행이긴 했지만 이 정도로는 약하다.

- ……그냥 돌아갈까?

진지한 음성으로 방금 도착한 비행기를 그대로 돌리면 갈 수 있다는, 마치 차를 갖고 옆 동네에 간 것 같은 현규의 물음에 수현은 간지러운 듯 웃었다.

“일은 다 하고 와야죠. 대신, 오늘 형 향수 써도 돼요?”

- 향수?

“네. 블루요.”

그루밍 제품까지 전부, 라고 덧붙인 순간 현규의 목소리가 살짝 들뜬 듯 높아졌다.

- 얼마든지. 그걸로 샤워해도 돼.

“그건 안 되고요. 냄새 독해지면 진짜 싫더라고요. 형한테서 나는 냄새는 좋은데.”

그 냄새를 맡으면 기분도 좋지만 안정이 됐다는 걸 지금 깨달았다, 수현도.

항상 옆에 있을 때는 몰랐고, 사실 후각이 예민한 편은 아니라 제일 좋아하는 냄새가 치킨 냄새였을 정도인데 최근 갑자기 민감해진 느낌이었다.

혈액 검사상으로는 큰 문제 없다고 하셨어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일단 이론적으로는 보통 사춘기 시절에…….

- 밤에, 잠은 잘 잤어?

“네? 아, 네. 잘 잤죠.”

머리만 대면 잔다고 수현은 자랑스레 말했지만 현규의 목소리는 조금 언짢아졌다.

- 그래?

“네.”

- ……이불은 안 걷어차고?

“어제 너무 피곤해서 뒤척이지도 않고 잤나 봐요. 이불이 그대로 있어요.”

순간 아주 작게 “서주영이 소파값은 했네…….”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 응?

“방금 소파값 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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