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160)

- ……피곤해질 때까지 너랑 잘 놀아 줬다고.

혼자 있으면 분리 불안을 겪을까 걱정했는데, 라는 현규의 변명 같은 말에 수현이 보이지 않을 줄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어제 진짜 재밌게 놀긴 했어요.”

- ……그래, 전혀 안 외로웠던 모양이네.

“어, 맞아요. 어제 본 영화가 재밌어서 주영이랑 오늘은 2편 보고, 그 감독 다른 영화도 전부 클리어하기로 했어요. 그 시나리오 작가가 쓴 다른 영화도 있는데 그것도 재밌겠더라고요.”

역시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액션 코믹 영화가 최고라고 수현이 엎드린 채 발을 파닥거리는 사이 현규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 그래?

“형도 좋아할 거예요. 전 이런 장르는 거의 안 봤는데 재밌더라고요. 하나씩 도장 깨기 해 보려고요.”

- ……상당히 즐겁나 보네?

현규의 목소리가 아주 좋지 않았다. 아니,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은은하고 미세한 분노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데이션처럼 점점 낮아지는 음성에도 수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못 알아챘다.

“주영이랑 있으니까 오랜만에 수학여행 온 것 같아서 재밌었어요. 대학 졸업하고 다들 바빠서 친구들하고 여행 간 지도 오래됐거든요.”

- ……여행도 다녔어?

“네.”

- ……해준 형이 널 혼자 여행 보냈다고?

이 사람이 미쳤나, 라는 투의 말에도 수현은 여전히 개의치 않았다.

“혼자는 아니죠. 친구들하고 갔으니까요.”

- 그러니까, 친구들이랑 여행을 가는 게 말이 돼?

“제 친구들은 어차피 다 베타들이거든요. 그리고 전 발정기가 안 와서 상관없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현규랑도 여행을 가 본 적이 없다고 수현은 새삼 떠올렸다. 아니, 여행이 뭐냐, 같이 영화관에 간 적도 없다.

애초에 그럴 만한 관계가 아니라 현규와 처음으로 단둘이 있던 것도 술 마시고 사고를 친 문제의 그날이었다. 같이 외출한 것도 혼인 신고하러 간 날이 처음이었고.

그럼 같이 영화관도 가고 여행도 가야지, 생각하며 발을 파닥대는데 현규가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 그래도 여행은 조심해야지. 그리고 넌 이제부터는 내가 있으니 나랑만 가야 돼. 파트너 외의 사람과 여행을 다니는 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그건 아니죠. 저희 부모님들은 지금도 친구들이랑 가끔 여행 가시는데요?”

- 그건 그분들의 사정이고.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난 내 파트너가 나 외의 상대와 여행 가는 건 절대 용납 못 해.

“형, 의외로 꼰대네요.”

- 아니, 대놓고 꼰대야. 난 고지식하고 보수적이고 깐깐한 꼰대야. 그러니까 너도 거기 맞춰 살아.

“뭐, 저도 파트너가 친구들이랑 매일 놀러 다니고 여행 다니는 건 안 좋아하니까요. 결혼했다면 가정에 충실해야지.”

회사 내 기혼자인 여직원들이 자신에게 한 충고 중 하나가 연애할 때는 친구 많은 남자가 근사해 보이지만 결혼하고 나면, 특히 애가 생긴 뒤엔 친구 많은 남자들은 쓰레기 새끼들이라는 거였다.

친구가 많으면 돌아가며 친구 핑계로 요리조리 빠져나갈 생각만 하니 현규 형 친구 관리 잘하라고.

그래서 걱정 말라고 말씀드렸다.

형은 인성에 문제가 많아서 친구 없다고.

그랬더니 윤 팀장님은 그조차도 완벽하다고 감탄했다. 물론, 그게 칭찬하는 의미인지 비꼬는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 그런 면에서 생각이 일치하니 다행이네. 파트너는 가치관이 잘 맞아야 하는 거니까.

역시 우리는 천생연분이라는 말에 수현은 빠르게 동의했다.

“그건 그래요. 친구들끼리도 그래야 오래 가니까요.”

- 그래, 그러니 네 친구들도 파트너가 있어서 함께 여행 갈 수 없는 입장을 이해해 줄 거야.

“가자고 하지도 않을 거예요. 형하고 결혼 소식 돈 후로 친구들이 아무도 연락을 안 하더라고요.”

사실 그제까지만 해도 혹시나 했다. 주말에도 연락이 없는 게 이상하긴 했지만 다들 주말은 쉬어야 하니까, 라고 납득했다. 일부러 연락은 안 하는 건 아닐 거라고.

하지만 월요일이 돼도 ‘이 좆같은 월요일’이라는 메시지가 안 왔다는 사실에서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원래 월요일 아침 출근 시간에는 늘 일대일 채팅방뿐 아니라 단체 채팅방 역시 ‘회사 망했으면’, ‘월요일 죽어라.’라는 메시지로 가득 차야 하는데 너무 조용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도 이 녀석들도 가끔은 월요일이 좋을 때도 있겠지 하며 넘겼다. 오후쯤 되면 ‘이 엿 같은 세상 술이나 마시자’는 메시지가 올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오후에도 메시지가 없고 어제도 종일 중·고등학교 단체 채팅방은 고요했다.

그래서, 메신저 서버가 터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업무 관련 연락은 너무 잘 왔다.

그래도 혹시나, 설마 했는데 주영이의 고등학교 단체 채팅방은 어젯밤에도 요란했다. 게임 하자는 연락과 주말에 술 마실 선발대를 뽑는 이야기 등등으로. 그리고 그중에 한 채팅방에는 자신의 고등학교 친구도 있었다.

매주 월요일마다 술 마시자고 하고 금요일마다 빨리 게임에 접속하라고 하던 그 녀석이었다.

그놈이 자신이 있는 방에서 그 말을 못 하니 다른 데 가서 그 짓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곧 합리적인 결론에 닿았다.

이 녀석들이 지금 일부러 연락을 안 하고 있는 거라고.

단체 방에도 글을 안 쓰는 걸로 보아 다른 방을 팠을 거다.

나만 빼고.

- 다행히 너와 달리 네 친구들은 눈치도 빠르고 생존 본능도 강한 모양이네.

“걔네도 별로 눈치 없어요.”

다들 나랑 비슷해서 만나면 편해요, 라고 하자 현규가 대강 상상이 간다는 듯 웃는다.

- 그래도 살기 위해 뭘 해야 하는지는 알잖아.

“연락하면 죽어요?”

의외로 날카로운 그 질문에 현규는 잠깐 침묵했다. 그러다 굉장히 어색하게 대화의 방향을 돌렸다.

- ……새벽인데, 좀 더 자야지?

“괜찮아요. 형은 지금 공항이에요?”

- 차 안. 바로 움직이는 중이야.

“곧장 일하러 가는 거예요?”

- 응.

“피곤하지 않아요?”

- 비행기 안에서 잠깐 잤어. 그리고 가서 사인만 하면 돼. 이미 기본 협의는 다 끝난 건이니까.

“그래도 확인은 해야죠.”

- 확인 작업은 충분히 했어. 그리고 어차피 내가 여기 있을 때 전부 조율한 일이야.

“아…….”

그러고 보니 이 사람 한국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지, 라고 수현은 실감했다. 지난 며칠간 하도 붙어 있어 몇 달은 된 줄 알았다.

“어제 갔으니까 금요일에 들어오는 거예요?”

- 한국 시간으로 금요일 밤에 입국 예정이야.

“그럼, 이제 사흘 남았네요.”

- 응.

“형 없으니까 좀 이상한 것 같아요.”

- ……그래?

“계속 형하고 있다가 옆자리가 비니까 이상하네요. 전 원래 누가 있든 말든 신경 안 쓰는 타입인데…….”

그게 이상하다는 수현의 읊조림에 현규의 목소리가 다시 살짝 높아진다.

- 혼자 자기 무서웠어?

“그건 아니고요.”

내가 몇 살인데 혼자 못 자겠냐고 수현은 웃어넘겼다. 아니, 사실 본가에서 살 때도 형들이 하도 시끄럽게 굴어 2층 구석으로 자발적 유배를 떠났던 터라 인기척이 없는 건 상관없었다.

그렇다고 겁이 많은 성격도 아니고 어차피 머리만 닿으면 자니까 허전함을 느낄 새도 없다.

하지만…….

“저 솔직히 형 가고 아무렇지 않았거든요.”

진짜, 조금도 아무렇지 않았다. 어차피 나흘 후에는 돌아올 거고 잔소리꾼 하나가 줄어든 것 같은 기분에 어릴 적 부모님이 여행 갔을 때 느꼈던, 해방감마저 느껴졌다. 주영이까지 집에 온다니 신이 났는데 막상 형 목소리를 들으니 조금 감정이 일렁였다.

형과 헤어진 지 이제 17시간, 만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문득…….

“……형 보고 싶은 것 같아요.”

짧은 그 말 뒤로 아주 잠깐 침묵이 흘렀다.

* * *

‘염병.’

본의 아니게 침실 안을 훔쳐보게 된 주영은 바로 어제 통화 중 해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새벽에, 분명 비행기에 있을 시간인데 현규 형의 메시지가 와서 심장 마비를 일으킬 뻔했던 것도 잠시…….

2시간마다 수현이 이불 덮어 주라는 메시지의 내용에 이번엔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새벽에, 그것도 시간으로 보아 예약 메시지로 발송한 게 분명한 그 내용에 처음엔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했다.

현규 형이 너무 무서워 문자를 오독했나, 아니면 내가 문해력이 떨어졌나? 그것도 아니면 그 메시지 안에 다른 이중적 의미가 있는 거 아닐까?

그렇게 고민하며 한참을 화면을 바라보다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아 조심스레 침실로 향했다.

그 메시지의 미스터리를 해결하기 위해.

그러곤 조용히 문을 열어 보자 세상모르고 잠든 수현이 눈에 들어왔다.

이불을 다 걷어찬 채.

그제야 그 말이 진짜 이불을 덮어 주라는 말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래서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덮어 줬다.

그렇게 미션을 완수하고 다시 나와 자려는데 그제야 메시지의 가장 앞에 있던 ‘2시간마다’라는 지정 시간이 떠올랐다.

그게 메시지 앞에 있던 걸로 봐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걸 어겼다간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어 잠도 못 자고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계속해서 시간을 확인했다.

그렇게 2시간마다 꼬박꼬박, 수현이 걷어찬 이불을 덮어 주기를 2번.

이번에도 선잠을 자다 깨 본능적으로 침실로 왔는데, 둘이 새벽에 저러고 있다.

남은 밤새 잠도 못 자고 불침번을 서고 있는데 새벽에 일어나 통화하는 두 사람을 보자니 참 여러 의미에서 기분이 새로웠다.

평소에는 절대 쓰지 않을 험한 말들이 입 안을 맴도는 것과 동시에, 내가 해준 형하고 연애할 때 주변 사람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는 후회와 반성, 그리고 동시에 그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절대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하는 자아 성찰까지.

솔직히, 그냥 꼴 보기 싫었다.

현규도 그렇지만 수현도 연애하고는 담쌓고 사는 것 같았는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저건 의식도 못 하고 하는 행동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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