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160)

연애를 하면 다 저렇게 되는 건지, 아니면 저 둘이 유별난 건지, 진지하게 연애와 진상 간의 상관관계를 고찰하며 퀭한 눈을 한 주영이 멍하니 방 안을 바라보고 있는데 수현이 문득 문 쪽을 돌아보곤 주영을 부른다.

“어? 일어났어?”

놀란 수현의 물음에 주영은 수현이 현재 스피커폰으로 대화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 깬 게 아니라…… 그냥, 목소리가 들리길래…….”

사실대로 네 이불 덮어 주러 왔던 거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현규가 듣고 있으니까.

“미안해. 시끄러웠지? 가서 자. 전화 끊을게.”

밤새 이불 덮어 준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는 수현의 배은망덕함에 주영은 필사적으로 고개와 손을 동시에 내저었다.

“아니! 끊지 마! 계속 통화해도 돼! 그냥, 너 잘 자나 보러 온 거야. 나도 한번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르니까 통화 편하게 해. 조금도 신경 쓰지 마. 그냥 커다란 인형이 소파 위에서 굴러다닌다고 생각해. 그럼, 나 잔다!”

잠귀가 밝은데다 아주 예민한 편이라 옆에서 바스락거리기만 해도 깨긴 하지만 지금은 숨도 안 쉬고 잘 자신이 있었다.

밤새 잠을 설쳐 피곤하기도 했지만 현규 형의 보복과 원한이 무서워 억지로라도 잘 생각이었다.

아니, 이미 자신의 생존 본능이 미친 듯이 멜라토닌을 분비하는 중이었다. 서서도 잘 수 있다, 지금이라면.

“그럼, 이만!”

순한 주영답지 않은 박력 넘치는 기세에 수현은 압도돼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래…….”

“편히 통화해.”

말과 동시에 도망치듯 문을 닫고 돌아선 주영은 그대로 다이빙하듯 소파 베드로 뛰어들었다. 그러곤 준비해 온 귀마개와 눈가리개까지 한 뒤 잠을 청했다.

괜찮다. 난 아무것도 못 듣는다.

난 지금 무척 졸리다.

그러니 난 잠을 잘 것이다, 라고 자기 최면을 걸며…….

* * *

누가 수현이 친구 아니랄까 봐, 얘도 참 눈치가 없다.

공항에서 호텔로 향하는 차 안에서 지그시 입술을 깨문 현규는 지구 반대편에서 원격 조종 로봇이 된 주영에게 온갖 험한 말을 내뱉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진짜 로봇을 설치해 줄 걸 잘못했다. 센서로 위치를 잡고 이불만 덮어 주는 정도라면 수현이 금세 코딩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가장 겁 많고 안전한 녀석을 붙여 놨더니 애가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다.

만약 바로 앞에 있었다면 눈빛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욕이란 욕은 다 해 줄 자신이 있었는데, 직접 보여주지 못하는 게 한이었다.

이제 쓸 만큼 써먹었으니 슬슬 이 녀석도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수현이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춰 속삭인다.

- 형, 좀 조용히 해야겠어요.

조용히 안 해도 된다.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도 주영은 절대 안 일어날 거다. 아니, 못 일어난다.

살고 싶을 테니까.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럼 또 ‘왜요?’가 돌아올 게 뻔해 현규는 현명하게 말을 돌렸다.

“그래. 이른 시각이니까.”

돌아가면 아무래도 서주영도 처리해야 할 듯했다.

먼저 해준 형부터 떼어 내려고 했는데 굳이 힘들게 두 번 일할 필요 없다.

어차피 해준 형과 서주영은 한 쌍이니 이 김에 둘을 묶어 유럽으로 보내 버리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해준 형은 유럽 주택에 관심이 많고 주영 역시 전공이 디자인이니 같이 보내 버리면 된다.

어차피 주영이네 집안 쪽에서는 계속 결혼을 반대할 테고, 두 사람의 성격상 허락받을 때까지 기다리려 할 텐데, 그거야말로 시간 낭비다.

두 사람을 꼬셔 혼인 신고를 하게 한 뒤 유럽으로 가 살라고 하는 게 최선이다.

그리고 가끔 수현이 보고 싶다고 하면 유럽으로 여행 가서 보면 되니 딱 좋다.

그래, 원한다면 이탈리아 쪽에 구매해 둔 저택을 두 사람에게 결혼 선물로 줄 의향도 있었다.

원래 수현이와 함께 장기 신혼여행을 가려고 준비했던 저택이지만 앞으로 저 두 사람 꼴만 보지 않을 수 있다면 기꺼이 헌납하겠다.

물론, 세금은 본인들이 해결해야 하겠지만.

- 이제 얘기해도 돼요. 저 이불 뒤집어썼어요.

“……이불?”

- 네.

“……야한데?”

순간 저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순간 옆에 있던 장 대리의 무릎과 어깨에 힘이 들어간 걸 현규는 눈치챘지만 모르는 척했다.

알 게 뭐냐?

- 뭐가 야해요?

“폰섹스하는 것 같잖아.”

순간 옆에 앉은 장 대리가 움찔하는 게 보였지만 이번에도 역시 현규는 깔끔하게 그를 무시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존재 자체를 무시했다.

그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아버지에게 실시간으로 보고하는 중이라는 건, 비행기에 탄 순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일부러 테이블 위에 엎어 놓은 휴대폰에서 아까부터 녹음 애플리케이션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 역시도.

멍청하게 그걸 들키다니 아직 요령이 부족했다, 장 대리는.

그래서, 처음으로 이런 스파이 노릇을 하는 그에게 잊을 수 없는 강렬한 기억을 남겨 줄 생각이었다.

음담패설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의 뇌리에 박히게 해 다시는 이런 짓을 못 하도록.

그러고도 한다면 그만둘 때까지 해 주면 된다.

“지금, 뭐 입고 있어?”

- 그냥 반소매 티에 트레이닝복이요. 아, 오늘은 흰 티 입었어요.

바퀴벌레 아니에요, 라는 말에 현규는 그건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잠옷을 입지 그랬어? 그게 편할 텐데.”

- 이것도 편해요.

“조이잖아. 혈액 순환에 안 좋아. 잘 때는 속옷도 안 입는 쪽이 나아.”

- 아, 그래서 형은 매일 벗고 자는 거예요?

“응. 너도 앞으로는 벗고 자. 지금 벗으면 더 좋고.”

은밀하게, 마치 유혹하듯 말을 흘리며 힐끔 옆을 곁눈질하자 애써 괜찮은 척하는 장 대리의 얼굴이 보였다.

다행히 얼굴 근육은 무표정을 잘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표정은 다스려도 눈빛은 아직 다스리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몸도.

- 싫어요. 추워요.

역시나, 너무나 이수현다운 그 답에 현규는 못 들은 척 통화를 이어 갔다.

“가슴은 괜찮아?”

- 네?

“내가 많이 빨아서 부었을 텐데.”

이번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바로 옆에서 혐오스러워하는 시선이 날아오고 있다는 걸.

그걸 인지한 순간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 아, 살짝 붓긴 했어도 괜찮았어요. 아까 큰 밴드 붙였거든요. 요즘 밴드들 크게 나와서 좋아요. 습윤 밴드는 뜯을 때 아플 것 같아서 거즈 있는 밴드로 붙였어요.

저 똑똑하죠, 라는 그 말에 갑자기 아래가 욱신거려 왔다.

유두에 밴드를 붙였다니, 그건 또 섹시하다.

“……뗐어?”

- 샤워할 때 떼고 새로 붙였어요. 주영이가 방에 잠깐 들어오다 보고 놀라긴 했는데 모른 척하더라고요.

“……서주영이 봤다고?”

- 네.

아무래도 서주영을 죽여야겠다고, 현규는 아주 잠깐 감정적 동요를 일으켰지만 이내 이성을 찾았다.

그래, 한집에서 생활하면 그럴 수 있다. 거실, 침실, 욕실을 다 합쳐도 방 한 칸 사이즈가 안 되는 만큼 본의 아니게 민망한 장면을 목격한 걸 테니, 그건 이해해 주기로 했다.

용서하는 것과는 별개로.

- 아, 이거 연고 바르니 엄청 간지럽더라고요. 다음에는 너무 만지거나 빨지는 말아 주세요.

“거긴 빨라고 있는 데야.”

- 그건 모유가 나올 경우의 얘기죠.

“뭐…… 이론적으로는 그렇지. 그래, 그럼 다음에는 대신 물어뜯을게.”

이번에도 역시 본능적으로 나간 말에 수현이 질색한다.

- 아파요, 형.

“괜찮아. 익숙해지면 쾌감으로 느낄 거야. 너 젖가슴으로 잘 느끼는 것 같으니까.”

일부러 천박한 단어를 쓰며 다리를 꼬자 옆에 앉은 장 대리의 어깨가 움찔한다. 그 반응이 아주 즐거웠다.

다시는 근처로도 안 올 것 같은데, 이젠 그가 꼭 주변에 있었으면 좋겠다.

의외로 타격감이 좋은 편이었다, 장 대리는.

- 너무 만지는 거 싫어요. 오늘 진짜 아팠어요.

“거기 내 걸로 비벼 줬을 때는 좋아했잖아? 두 번이나 쌀 정도로.”

일부러 음성을 낮춰 나른한 투로 내뱉자 이번엔 수현이 빠르게 반응해 온다.

- 그거 진짜 싫었어요.

“진심으로?”

- …….

“응?”

자지러질 듯 좋아하지 않았냐는 물음에 수현이 잠시 뭔가를 망설이는 듯 조용하다, 자백한다.

- ……기분은 좋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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