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160)

앞으로도 영원히…….

“빨리 돌아갈게, 최대한.”

- 일은 다 하시고 오세요.

“응. 내가 할 일은 다 마치고 갈 거야.”

그러니까, 내가 할 일만, 이라고 딱 잘라 답한 순간 옆에 있던 장 대리가 작게 말을 건넸다.

“거의 도착했습니다.”

이제 곧 리셉션장으로 들어가야 하니 최종적으로 한 번 더 동선과 스케줄을 체크해 달라며, 장 대리는 다 죽어 가는 얼굴로 현규에게 태블릿은 건넸다. 그제야 현규는 그가 내미는 태블릿을 받아 들었다.

“곧 일정이 있어서 끊어야겠다.”

- 네, 그러세요.

“일 끝나고 전화할게.”

- 어…… 먼저 메시지 주시면 화장실 가서 받을게요.

“화장실은 가지 말고…….”

얘는 왜 이렇게 화장실을 좋아하는 걸까 하며 현규가 쓰게 웃자 수현이 금세 수긍한다.

- 그럼 서버실로 갈게요. 거긴 좀 춥긴 한데 전화받기는 좋아요.

누가 보면 죄지은 사람인 줄 알겠지만 시스템개발팀 직원이 가서 숨기에는 서버실이 가장 이상적이긴 하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니까.

“겉옷 꼭 챙기고. 감기 안 걸리게.”

- 네, 그럴게요.

“그럼, 좀 더 자고 출근해. 아침밥 꼭 챙겨 먹고.”

- 네. 형도 일 잘하세요.

“그래.”

녹아들어 갈 것 같은 목소리로 통화를 마친 현규는 시선을 돌려 손에 든 태블릿을 내려다봤다.

어차피 이미 비행기 안에서 보고받았던 바라 대충 확인만 한 뒤 옆을 돌아보지 않은 채 무심히 말을 건넸다.

“이제, 우리 얘기를 해야죠?”

이번에도 역시나 솔직한 장 대리는 팔을 움찔해 답을 대신했다.

수현이가 얼굴로 자백하는 타입이라면 이 사람은 몸으로 자백하는 타입이다.

저 정색하는 표정은 학습된 건데 몸은 학습이 덜 됐다.

이런 사람을 과연 써도 될까 싶긴 했지만 몸 다루는 거야 새로 가르치면 된다.

그건 멘탈 문제다. 아예 멘탈을 탈탈 털어 다시 만들어 주면 된다.

“장 대리님.”

“……네…….”

이미 기가 다 빨린 듯 담담한 장 대리의 답변에 현규는 모처럼 예쁘게 웃으며 아주 친절한 투로 그를 걱정했다.

“요즘 살기 힘들죠?”

“……다들, 살기 힘든 시기죠…….”

“특히나 비서팀은 힘드시잖아요. 우리 아버지가 쉽지는 않은 분이시니까요.”

“……아닙니다. 힘든 거야 어디든 마찬가지니까요.”

현규가 어떻게 꼬투리를 잡을지 알 수 없어 장 대리는 최대한 무난하고 보편적이며 모난 데 없는 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현규는 그를 나무랄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사실 작정하고 그의 멘탈을 박살 낼 거라면 어디든 힘들다는 건 남의 돈 받아먹기 힘들다는 거냐, 부터 시작해서 남이 우리 아버지를 말하냐, 회사를 말하냐, 회사 다니기 싫으냐고 달달 볶을 스킬은 있지만 굳이 그럴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앞으로의 그는 적이 아니니까.

“맞아요. 요즘 어딜 가든 살기 힘든 세상이죠. 그러니까 이 험한 세상에서 삶에 도움이 될 부업 하나 해 보실래요?”

“……네?”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잔뜩 경계한 듯 긴장한 장 대리의 눈빛에 현규는 그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건넸다.

“이중 스파이요.”

* * *

그날은 시작부터 모든 것이 완벽했다.

“저 오늘도 이불 안 걷어차고 잤어요.”

휴대폰을 세워 둔 채 현규와 영상 통화를 하던 수현은 부지런히 달걀을 풀며 어서 칭찬해 달라고 눈을 반짝였다.

신이 난 그 얼굴에 화면 너머의 현규는 주저 없이 화답했다.

- 잘했어.

양복 차림에 넥타이를 푼 채, 느긋하게 새하얀 소파에 기대앉은 현규의 칭찬을 들은 수현은 만족한 듯 웃으며 다 푼 달걀을 사각 팬 위에 부었다.

현규가 떠난 지도 이제 40시간, 수요일 하루는 종일 다른 사무실과 서버실을 돌아다니며 대표님을 피했고, 정시가 되자마자 가방 들고 튀었다. 그리고 오후 내내 현규 형과 삼촌의 전화 외에는 절대 받지 않으며 하루를 보냈다.

퇴근 후에는 꾸벅꾸벅 조는 주영과 같이 맛있게 저녁을 먹고 밤에는 야식으로 김치 해물전을 해 먹었다.

주영이 전을 먹다 자는 바람에 전부 자신이 먹어야 하긴 했지만, 오랜만의 전은 맛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오늘이 드디어 사흘째의 아침이었다.

어제 야식을 제대로 못 먹은 주영을 위해 아침은 겉절이와 볼락구이에 해물 된장국, 매콤한 주꾸미볶음과 계란말이 등등을 하던 중이었다.

“신기해요. 삼촌이 진짜 저 그 버릇 고치려고 침낭에도 재워 보고 이불을 묶어도 보고 다 했는데도 못 고쳤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고쳤어요.”

자신에게 고성능 이불 덮개 AI가 있다는 걸 모른 채 수현은 자신의 오랜 버릇을 드디어 고쳤다고 기뻐하고 있었다.

현규는 그 원인을 알았지만 모르는 척했다.

몰라도 되니까.

- 감기는 안 걸릴 테니 다행이네.

“네. 그런데, 역시 주영이는 역시 집이 아니라 불편한가 봐요. 오늘도 피곤해 보이더라고요. 다크 서클도 심해졌고.”

역시 소파 베드라도 침대만큼은 안 좋은가 봐요, 라고 걱정하며 수현은 저 멀리 소파에 앉아 퀭한 눈으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주영을 바라봤다.

곧 출근 시각이라 준비해야 하는데 애가 영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아니, 사실 어제도 별로였다. 철야 작업할 때의 자신처럼 눈이 썩어 있었다.

- 아무래도, 집이 아니면 편하지 않기는 하지.

“그러니까요. 우리 집에서 살 빠져서 가기 쉽지 않은데…….”

오피스텔에는 누가 올 일은 없었지만 그간 본가에 방문했던 형의 친구들은 2, 3일 사이 기본적으로 2kg씩은 쪄서 나갔다.

그래서 한동안 본가가 형 친구들 사이에서 ‘폭식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정도였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 살이 빠져서 나가다니, 주영이가 많이 예민한 것 같다고 수현이 걱정하자 현규가 수현을 다독여 준다.

- 잠자리 바뀌면 그런 사람들 있어.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서 말인데요…….”

- 응?

“오늘 주영이 그냥 집에…….”

보내려고 하는데요, 라는 말을 내뱉기도 전에 정신줄을 놓은 채 텔레비전 화면을 보고 있던 주영이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곤 격렬하게 고개를 내저어 거부 의사를 보였다.

“아냐! 난 괜찮아! 걱정 마!”

“……응?”

“오늘도 여기서 자고 싶어. 영화도 봐야 하고. 만두도 맛있어!”

비장한 주영의 외침에 휴대폰 쪽에서 현규가 놀라 되묻는다.

- 만두가, 아직도 남아 있어?

“네.”

주영이는 이불 덮개 AI로는 훌륭했지만 만두 처리반으로는 별로였다. 출장 간 사이 만두 다 처리해 놓으라고 보낸 것도 있는데 그쪽으로는 시원치 않은 모양이었다.

- 하긴, 400개니…….

“천천히 먹어도 돼요. 어차피 다 먹으면 또 할 거니까요.”

- 또 한다고?

흥분한 듯 높아진 현규의 음성에 수현이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답한다.

“시간 날 때 해야죠.”

지금 아니면 언제 한다고.

- ……만두는 그만하지?

“왜요?”

형도 만두 좋아하잖아요, 라는 수현의 말투에 현규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침묵한다.

만두를 싫어하냐 하면 그건 아니지만 만두를 또 할 거냐, 하면 그건 답하기 곤란했다.

만두 공장 컨베이어벨트 부품 역은 한 번으로 족하다.

- 만두는 아직 많을 테니 천천히 해. 김치도 있어야 하잖아.

“김치로 안 해도 돼요. 시래기 써도 맛있어요.”

게다가 만두는 김치만두만 있는 게 아니라 고기만두, 새우만두, 교자도 있답니다, 라고 자랑하듯 웃는 수현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만두란 만두는 모두 만들 것 같은 기세였다.

순간 재빨리 현규는 항복을 외쳤다.

- 그래, 그건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단 지금은 있는 걸로 먹어.

“그럴게요. 아, 형 한국 오면 뭐 먹고 싶어요?”

- 왜?

“내일 오후에 재료 사다 준비해 두게요.”

- 너.

단 1초의 틈도 없이 본능적으로 내뱉은 듯한 그 답에 수현은 간지러운 듯 웃었다.

“절 먹으면 안 되죠.”

- 왜?

“그럼, 앞으로 맛있는 거 못 먹잖아요.”

순간 현규의 눈빛이 묘하게 빛났다. 조금 음흉하게.

- 앞으로 뭘 먹여 주려고?

“아무거나요. 한식, 중식, 양식은 다 잘해요. 일식은 잘 못 하지만 노력해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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