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은 요리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자신에 차 있었다.
하지만 현규의 관심사는 다른 부분에 있었다.
- 그래, 넌 뭐든 마음대로 해. 난 내가 알아서 잘 발라먹을게.
“네?”
- 네가 해 주면 뭐든 맛있게 먹겠다고.
기분 좋은 듯 환하게 웃는 현규의 얼굴을 보며, 수현은 약간의 의아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이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어느새 다 익은 계란말이를 꺼내 자르며 처음부터 묻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영상 통화예요?”
- 얼굴 못 본 지 오래돼서.
“40시간인데요?”
- 너무 오래됐지.
4년도 안 보고 살았는데 40시간이 대수냐 하려다가도 수현도 현규가 보고 싶다 생각하던 차라 쑥스러운 듯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저 멀리서 커피를 마시던 주영의 썩어들어 가는 눈빛 위로 한심함이 더해지는 걸 보지 못한 채.
“거긴 이제 오후 2시죠?”
- 응.
“식사는 하셨어요?”
- 대충.
“그런데…… 호텔 안이에요? 안 움직여도 돼요?”
현규 너머로 보이는 배경은 단순했다. 온통 하얀 벽뿐이었다. 소파마저 새하얘 아예 배경이 없는 느낌도 들었다.
- 슬슬 움직이는 중이야. 그 전에 잠깐 휴식 시간.
“오늘 무슨 파티 있다고 했죠?”
- 응. 아주 성대한 파티가 있을 거야. 아니, 파티라기보다는 축제지. 영원히 잊지 못할 날이 될 거야.
“술 너무 많이 드시지 마세요.”
또 누굴 꼬시려고, 라며 수현은 깔끔하게 자른 달걀말이를 접시에 올린 뒤 잘 구워지고 있는 볼락을 뒤집었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주사 논쟁에 현규는 웃으며 대꾸했다.
- 다시 말하지만 난 주사 없어.
그건 형 생각이고요, 라고 하고 싶었지만 수현은 시선을 피하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이미 여러 사람을 통한 검증을 거쳤기에 더 이상 논하지는 않기로 했다.
이성적인 성인이라면 검증된 사실에 대해 승복할 줄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래도 현규 형에게는 주사가 있다. 그게 자신의 진실이었다.
검증된 사실과는 별개로.
“국하고 주꾸미볶음도 다 됐어요. 이제 밥 먹어야 돼요.”
- 아침 잘 먹고 일 잘하고, 그리고…….
거기까지 말하던 현규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 오늘 오후에 좋은 선물이 도착할 거야.
“선물요?”
- 응. 아주 좋은 거.
“택배로 오나요?”
- 아니, 직접 배달 갈 거야.
“집으로요?”
- 물론.
“네. 그럼 기다릴게요.”
- 그래. 그럼.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어 보이며 통화를 마친 수현은 딱 맛있게 익은 볼락구이를 접시에 옮기며 오늘따라 유독 생기 넘치는 얼굴로 주영을 불렀다.
“아침 먹자.”
그 부름에 주영이 소파에서 일어서 비틀거리며 주방으로 다가왔다.
주영의 다크 서클과 피로 외에는 모든 게 평범하고 평화로운 하루의 시작이었다.
조금의 파란도 예측할 수 없는…….
* * *
모든 일이 그러하듯 시작은 아주 미약했다.
휘청대며 택시를 타고 출근한 주영을 걱정스레 바라보다 정확히 스무 걸음 만에 회사에 도착했을 때 로비는 묘하게 웅성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커피를 손에 든 채, 오늘도 텅 빈 가방을 등에 메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수현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만, 오늘도 고요한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의 단체 채팅방을 심각한 얼굴로 확인할 뿐이었다.
목요일쯤 됐으면 슬슬 술 마시자는 말이 나와야 하는데 역시나 고요하다.
어떻게 봐도 확실한 왕따가 된 상황에 수현은 채팅창을 곧 껐다.
어차피 얼마 못 간다, 이 녀석들은.
지금도 아마 손가락이 드르릉거려 미칠 거다.
다들 눈치도 없지만 하고 싶은 말은 해야 하고 궁금한 건 못 참는 이과계 인간들이라 길어야 보름이다. 짧으면 일주일이고.
오히려 그사이라도 조용히 지내 주면 감사하다고 하며 오늘도 고요한 최근 통화 목록을 확인했다.
아버지도 조용하고, 큰형과 작은형도 아주 조용하다.
평화로운 세상이었다.
적어도 수현에게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함이 없는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목소리 크고 말 많은 아버지와 형들, 그리고 그들 못지않은 친구들 덕에 메시지 창이 항상 시끄러워 바쁠 때는 아예 휴대폰을 꺼 버릴 정도였는데 지금은 너무 조용해서 편하다.
이 상황에 수현은 아주 만족했다.
그와 동시에 현규의 인성에 감사했다.
얼마나 인성이 안 좋으면 결혼 소식이 돌자마자 사람들이 자신과도 연락을 끊을까?
외형이 좋은 만큼 인성도 좋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어차피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 이대로도 괜찮을 것 같다.
자신의 주변만 평안하면 된다.
그렇게 자의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사이 막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타려는데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드디어 고등학교 친구들 채팅방에 글이 하나 떴다.
마지막 메시지로부터 133시간 만의 새 메시지였다.
그러고 보니 딱 6일째다. 얘네들도 참 의외성이 없다.
또 술 마시자는 거냐, 아니면 게임 하자는 거냐, 궁금해하며 채팅방을 여는데 순간 경악한 표정의 이모티콘과 함께 장문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더 이상 못 참겠다. 그냥 물어볼래. 현규 형한테 맞아 죽어도 난 이건 못 참겠어. 이수현 이거 사실이야?]
바로 주영의 고등학교 친구들 단체방에도 있는, 매주 금요일마다 술 마시자고 깽판 치는 그놈이었다.
대체 뭐길래, 라는 생각에 바로 아래 올라온 URL을 보는데 대문짝만하게 제목이 떠 있다.
연일 주식 최고가 갱신 중인 S그룹 대표의 혼외자 등장.
“저런…….”
어떻게 봐도 아주 찌라시스러운 그 소식에 일부러 링크도 누르지 않았다. 들어가면 바이러스가 옮아 올 것 같아서.
[진짜 혼외자 맞아? 현규 형 이복형제?]
아침 드라마의 타이틀로 딱 어울리는, 자극적인 찌라시 제목이 뜨자 순식간에 메시지 옆의 숫자가 사라졌다.
다행히 한 주 사이 죽은 놈은 없는 모양이었다.
[노 코멘트.]
내가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딱 잘라 답한 뒤 이번엔 자신이 아예 동창들 단체방의 알림을 모조리 꺼 버렸다. 그 김에 현규 형에게 배운 대로 친구들의 그룹을 찾아 모조리 착신 거부도 걸었다.
혹시 몰라 대학교 친구들은 일단 단체방 알림만 차단한 뒤 계기판을 바라보는데 얼굴이 따갑다.
껄끄러운 눈빛이 느껴져 커피를 마시며 주변을 돌아보자 이쪽을 힐끔거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시선을 돌린다.
궁금한데 너 뭐 아는 거 없냐고 묻고 싶은 듯 자신을 자꾸 곁눈질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그제야 알아챘다.
소문 다 났구나, 하고.
이러고 있자니 새삼 형하고 사고 치고 함께 탔던 그 엘리베이터가 떠올랐다. 아무도 내리지 않은 채 19층까지 올라갔던…….
그래도 오늘은 층마다 사람이 하나씩은 내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날보다는 충격이 덜한 모양이었다. 역시 멘탈은 깨질수록 강해지는 거였다.
이렇게 단련하다 보면 언젠가 이 회사가 망한다고 해도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을 거다.
그러니 이건 아주 좋은 징조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19층에 도착해 내려서는데 오늘따라 출근도 빨리 한 윤 팀장님이 달려 나와 팔을 잡아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