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160)

“찌라시 말고.”

내가 주식에 환장한 인간인 줄 아냐는 윤 팀장의 앙탈에 수현이 그럼 아니었냐고 묻듯 윤 팀장을 바라본다. 그 시선에 뜨끔했는지 윤 팀장이 시선을 돌리며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선다.

그러곤 상행 버튼을 누르며 말을 돌린다.

“아니, 내가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아버님이 치료 어쩌고 하셔서. 혹시 지난번에 병원 간 거 안 좋은 거야?”

사적인 질문이긴 하지만 내가 어쨌든 직속 상사니 알고는 있어야 할 거 아니냐고 윤 팀장이 쭈굴거리며 묻자 수현이 “아…….”라고 짧게 내뱉는다.

아버지랑 통화하면 근방 3미터 이내 사람들은 모두 그 내용을 알게 되니 엿들은 건 전혀 문제 될 게 없지만 잘못 짚으셨다.

“아뇨. 속은 이제 괜찮아요. 그것 때문이 아니라, 호르몬 치료를 받으라고 하시는 거예요.”

“……호르몬 치료?”

“네. 아직 발정기가 안 와서 임신을 못 하거든요. 이번에 결혼했으니 애 가지라고 그러신 거예요.”

시큰둥한 수현의 답과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그 안으로 올라타며 윤 팀장은 놀란 듯 되물었다.

“어…… 완전 불임이 아니라 치료받으면 되는 거였어?”

“아마, 그럴걸요.”

“그럼 왜 지금까지 안 받았는데?”

“별로 불편한 게 없어서요. 몸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호르몬 수치가 정상 범위보다 미세하게 낮은 것뿐이거든요. 많이 부족하면 그냥 호르몬 치료를 받으면 되는데 병원에서도 부작용 리스크를 안고 직접 호르몬 투여를 하기에는 미묘한 수치라고 하더라고요. 솔직히 발정기 없으니까 편해서 별생각 없기도 했고요.”

“뭐…… 호르몬 치료가 부담스럽긴 하지. 그래도 이제 결혼도 했으니까 치료받는 게 좋지 않아? 지금도 충분히 늦은 것 같은데?”

“그게, 예전에 호르몬 분비내과 담당 선생님이 그냥 결혼하고 나서 생각하라고 하셨거든요. 결혼하면 자연히 나을 수도 있다고.”

“결혼하면?”

“네. 호르몬 치료법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 필요한 호르몬을 주사로 투여하는 방식이고 하나는 알파 페로몬을 이용하는 방식인데…….”

그런데 그게 뭐였더라, 하고 수현은 오래된 기억을 더듬었다.

마지막으로 진단을 받은 게 18살 때였는데 그때 담당 선생님이 이 수치에 직접 투여는 추천하지 않는다며 두 번째 방법을 제안했었다.

그러니까, 그게 알파 페로몬으로 오메가 호르몬을 자극해서 수치를 끌어 올리는 방법이라고 했는데…….

“음…….”

“왜?”

“그때 제가 직접 설명을 못 들었어요. 보호자인 삼촌하고 아버지가 상담실에 들어가셨는데 미성년자라 절대 그 치료법은 못 쓴다고 하셨거든요.”

그래, 그랬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10년 전 기억을 하나씩 끄집어내고 있는데 윤 팀장님이 놀라 되묻는다.

“대체 무슨 방법이길래 미성년자라 안 돼?”

“그건 모르겠어요. 아버지는 그 정도면 해 볼 만하다고 했는데 삼촌이 절대 안 된다고 결사 반대 했거든요.”

“삼촌이 왜?”

그런 건 부모님이 결정하시는 거 아니냐는 말에 수현은 목을 긁적였다.

“아니, 삼촌이 삼촌이 아니라 당시 제 약혼자……. 아니다. 좀 관계가 복잡해요. 하여간 당시 제 보호자는 삼촌이라 아버지에게는 결정권이 없어서 치료 안 받기로 한 거였어요. 그때 선생님이 결혼하면 나을 수도 있다고 하셔서 기억해요. 그때는 원래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결혼하려고 했었거든요.”

이쯤 되자 그때 기억이 선명하진 않아도 대충이라도 떠올랐다. 당시 삼촌이 함께 갔고 약혼자라고 하자 담당 선생님이 그냥 두고 보자고 하셨다.

1, 2년 내로 결혼할 텐데 그럼 자연스럽게 나을 거라고.

하지만 윤 팀장님은 다른 부분을 굉장히 놀라워했다.

“와, 무슨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해? 그쪽, 조혼 문화도 있어? ”

“조혼 문화는 없지만 대부분 대학 졸업 후에 결혼하는 건 맞아요. 어쨌든 발정기 때문에 위험하니까 오메가들은 일찍 하는 편이죠.”

자신이 잘 관리하면 된다고들 하지만 호르몬이라는 게 스트레스나 주변 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 거라 컨트롤이 결코 쉽지 않다.

즉, 발정기는 이틀 밤 철야만으로도 갑자기 터질 수 있는 땅에 묻힌 불발탄 같은 거라 가능하면 일찍 파트너를 만드는 게 좋다.

그리고 윤 팀장도 그 부분은 금세 납득했다.

“하긴, 발정기가 며칠 이어진다고 생각하면 파트너가 있는 게 안정적이지. 그런데, 기준이 너무 애매한 거 아냐? 결혼하면 낫는다니? 그럼 지금은 결혼했으니 이미 나은 거야?”

“그러니까요.”

“담당의한테 가서 정확히 물어봐. 결혼하면 낫는다니, 뭐 결혼 안 하면 죽는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유사 과학이야? 샤머니즘이야?”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것에 대해 질색하는 게 공대 출신들의 특징인지 아니면 그냥 성격적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부분은 잘 맞았다.

증명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 냉소적인 것까지.

“이럴 때 보면 팀장님하고 참 잘 통해요.”

“그렇다고 반하지는 마.”

“걱정 마세요. 전 얼굴만 봐요.”

인성이고 집안이고 스펙이고 전혀 안 보고 오로지 얼굴만 본다고, 수현은 본인의 취향에 대해 냉정히 선을 그었다.

지금까지 전혀 의식하지 못했지만 최근 현규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자신을 보고 내린 최종 결론이었다, 그게.

자신의 취향은 흔히 칭하는 ‘혐성 미인’이라고.

그러니까 아무리 말이 잘 통해도 팀장님에게 반할 일은 없을 거라는, 과하게 솔직한 수현의 커밍아웃에 윤 팀장은 수현을 무표정하게 바라봤다.

“이 대리, 최근 근처에 만둣집 생긴 거 모르지?”

순간 수현의 눈이 모처럼 반짝였다.

“만두요?”

“응. 역 근처 안쪽 골목 사이에 시래기 만둣국집 새로 생겼거든.”

“어? 갈래요!”

수현이 반색한 순간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어느새 27층에 도착해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밖으로 향하며 수현은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점심은 제가 사겠습니다.”

“누가 데려간대?”

“제가 뒤처리해 드렸잖아요.”

“뭘?”

“회계팀 클레임이요.”

유독 회계팀 팀장님을 어려워하는 팀장님을 대신해 내가 교육까지 다시 해 주지 않았냐는 수현의 주장에 윤 팀장이 입을 꾹 다문다. 그건 사실이라 반박할 수 없었다.

회계팀 사람들 전부 깐깐해서 무서운데 다들 유독 수현은 예뻐해 일이 생기면 수현을 방패로 쓰긴 했다.

“아버지가 사람은 은혜를 알아야 한다고 했어요.”

우리 상부상조하는 사이 아니냐고 수현이 윤 팀장의 어깨를 툭 치자 윤 팀장이 새초롬한 표정으로 답한다.

“난 특으로 먹을 거야.”

“드세요. 그럼 점심에 만두 먹는 거예요?”

“음…… 좀 멀기는 한데 충분히 걸어서 갔다 올 수 있을 거야.”

차로 가기엔 골목 안이라 그렇고 걸어서 한 정거장 거리라는 말에 수현은 날아갈 듯한 걸음으로 회의실로 향했다.

즐거운 점심을 기대하며.

* * *

“여기 만두 진짜 맛있네요.”

“이 대리 만두돌이라 좋아할 줄 알았어.”

프랜차이즈가 아니라 더욱 좋다며 맛있게 점심을 먹은 두 사람은 가을의 나른한 햇살 아래를 걸어 회사로 향했다.

각자의 손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든 채.

“그런데 아까 법무팀 정 대리는 왜 그런 거야?”

“네? 아…….”

점심시간 직전 있었던 법무팀과의 미팅 내내 자신을 보며 안절부절못하던 정 대리를 떠올린 수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알파라서 그런가……. 아니, 그래도 지금쯤이면 약발 다 했을 텐데.”

“약발이라니?”

“전 잘 모르는데 형이 저한테 페로몬 샤워를 해 놓고 가서 이틀 정도는 효과 있을 거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게 월요일 밤이었으니까, 아마 오늘은 거의 냄새 안 났을 텐데, 이상하네요.”

“그런 게 진짜 있어?”

“있대요. 알파나 오메가들은 알아본다더라고요. 다른 알파 페로몬이 남아 있으면 근처에 안 가는 게 매너라고 하니까요. 오메가들은 알파 페로몬을 별로 안 좋아하고요.”

“왜?”

“이론적으로는 좀 자극을 당한다고 들은 것 같아요. 오메가 페로몬도 알파에게 영향이 있지만 알파 페로몬도 오메가한테는 그냥 성 자극 호르몬 같은 거니까요.”

“이야, 진짜 동물의 왕국이네.”

그쪽 세계 얘기를 들으면 영장류는 영장류인데 같은 인류 같지는 않다며 윤 팀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베타들에게 알파와 오메가는 셀러브리티와 SF장르의 크리처를 섞어놓은 느낌이라고.

“시스템과 메커니즘은 알겠는데 그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건 어렵죠.”

“이 대리가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저도 아직은 그 세계의 관찰자니까요.”

실질적으로 나는 그냥 베타와 별 다를 바 없다고 말하며 수현은 드디어 휴대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사실 별로 켜고 싶지는 않지만 업무상의 연락도 올 테고, 계속 연락이 안 되면 큰형이 성질에 못 이겨 회사까지 들이닥칠 거라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까지는 답을 줘야 한다.

아슬아슬하게 점심시간 끝나기 1분 전에 전화해서 빨리 끊어야지, 하고 잔머리를 굴리는데…… 역시나 부팅이 끝난 순간부터 무시무시한 속도로 메시지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 속도에 질색하면서도 일단 알림란을 확인하자 역시나 대부분이 큰형의 메시지다. 물론, 부재중 전화도 5건 있다.

이 정도면 잔소리 한 시간 형이다. 집행유예나 가석방 없는.

[회의 끝나면 전화해.]

[왜 전화 안 해? 점심 안 먹어?]

[너 전원 꺼 놨지?]

[왜 전화 안 받아?]

[그 회사는 점심시간도 없어?]

[너희 노조 없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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